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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의 라이벌] 케루비니-베토벤-베를리오즈

소한마리-화절령- 2015. 7. 18. 16:32

[음악사의 라이벌] 케루비니-베토벤-베를리오즈

조선비즈 |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 입력 2015.07.18. 08:34

음악사에는 숱한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음악이 함께 빛난다. 하지만 겨우 이름은 알아도 음악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름도 음악도 다같이 깊이 잠자는 동시대인도 있다.

② 케루비니 vs. 베토벤 vs. 베를리오즈

작곡가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베토벤(1770-1827)보다 열 살 위 작곡가였다. 하지만 15년을 더 살았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의 작곡가였지만 프랑스를 주무대로 활동했고 인정도 받았다.

↑ 모차르트의 친구이자 베토벤의 은인인 시카네더가 오페라 ‘마술피리’의 새잡이 파파게노로 분장한 모습

↑ 시카네더가 지은 극장 ‘테아터 안 데어 빈’

↑ 케루비니와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이 초연된 앵발리드 돔의 천정

케루비니는 빈의 베토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그가 프랑스 혁명기에 작곡한 공화국 찬양 음악은 베토벤의 교향곡에 각인됐다. 케루비니의 오페라 '로도이스카'나 '메데아'는 '레오노라'를 작곡하던 베토벤에게 넘어야 할 산이었다.

◆ '구출 오페라'의 효시, 케루비니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와 같은 시기인 1791년에 초연된 '로도이스카'는 '구출 오페라'의 효시였다.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구출하는 내용의 오페라는 억울한 정치범이 수감되곤 하던 혁명기의 극장에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마술피리'의 작곡을 제안하고, 초연을 직접 제작, 출연까지 한 에마누엘 시카네더는 친구 모차르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꾸준히 공연했다. 흥행에도 성공한 그는 1801년에 '테아터 안 데어 빈'('빈 강변극장'이라는 뜻)이라는 공연장을 열었다.

그는 이 극장에서 1803년 3월 23일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를 공연했다. 그는 베토벤의 거처까지 극장으로 옮기게 하고, 4월 5일에는 베토벤을 위한 음악회까지 열어 줬다. 그 무렵 베토벤이 쓴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3번(베토벤이 피아노 독주), 오라토리오 '올리브산의 그리스도'가 차례로 연주되었다.

케루비니와 베토벤을 나란히 경쟁시킨 시카네더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그는 모차르트가 시작한 독일 오페라를 베토벤이 더욱 힘차게 이어가길 바랐을 것이다. 베토벤은 "안마당에서 케루비니와 겨루겠다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극장에 살면서 오페라 '피델리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를 썼다.

◆ "베토벤은 털이 비쭉비쭉한 새끼곰"

드디어 1805년 11월 20일 베토벤은 '레오노라'를 초연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 공연 직전에 시카네더가 극장 경영권을 잃고 말았다. 베토벤도 극장에서 방을 빼야 했다. 공연 날 케루비니가 이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난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아마 베토벤식 구출 오페라를 '로도이스카'의 아류로 치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케루비니는 거친 베토벤의 성격을 "어미가 핥아주지 않아서 털이 비쭉비쭉한 새끼 곰"과 같다고 묘사했다.

베토벤은 그래도 여전히 케루비니의 위상을 높이 샀다. 케루비니를 비롯해 자신의 '레오노라'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의견은 베토벤에게 요긴한 채찍질로 작용했다. 그는 뒷날 이 곡을 개작해 '피델리오'라는 제목으로 재연했다.

케루비니는 1816년 '레퀴엠 C단조'를 작곡했다. 이듬해 1월 21일 이 곡을 파리 외곽 생드니 대성당에서 초연했다. 생드니 대성당은 오랫동안 왕실 묘역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때 폭도들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졌다. 케루비니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지 25주기 되던 날 '레퀴엠'을 초연했다.

당시 왕당파였던 그는 루이 18세가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루이 18세는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나폴레옹을 쫓아내고 즉위했던 왕이다.

◆ 베토벤 "찬미하며 사랑하는 케루비니남"

반면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공화주의자였던 베토벤은 정치적인 견해와 무관하게 자신이 레퀴엠을 쓴다면 케루비니가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레퀴엠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 때 케루비니의 곡이 연주되었다. 먼 훗날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도 케루비니의 초상을 간직했다. 케루비니의 절친한 친구였던 앵그르가 그린 그림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bpWdBIYefE (케루비니의 C단조 레퀴엠)

1823년 베토벤은 자신의 최고작으로 생각한 '장엄미사'의 필사본을 여럿 만들어 많은 제후와 명사들에게 보낸 적이 있다. 이중에는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한 "찬미하며 사랑하는" 케루비니도 들어 있었다.

그 무렵 파리에서 케루비니의 명성은 정점에 달했다. 1822년 그는 파리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당시 이 음악원 도서관에서는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가 글루크의 오페라 악보를 공부하고 있었다. 아직 입학은 하기 전이었다.

그가 하루는 케루비니가 통행을 금지한 여학생 통로로 다니다가 수위에게 제지당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보고를 들은 케루비니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불러 호통을 쳤다. 베를리오즈는 태연하게도 "언젠가 정식으로 인사드릴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는 유유히 도망간다.

정식으로 음악원 학생이 된 뒤에도 베를리오즈는 케루비니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가 원장의 음악보다는 글루크, 스폰티니 심지어 베토벤의 곡에 더 열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를리오즈는 베토벤이 죽은 이듬해인 1828년, 그의 교향곡 3번과 5번을 처음 듣고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케루비니로서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제자였다.

◆ "베를리오즈, 망아지처럼 떠날 수는 없지 않나"

베를리오즈가 1830년 '환상 교향곡'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고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를 때였다. 케루비니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스승은 "망아지처럼 마구간을 떠날 수는 없으니 돌아와서 다시 보자"고 했다. 베를리오즈는 "왜 안 됩니까? 우릴 말처럼 다루셨으면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삼켰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회고록에 나오는 얘기다.

그가 회고록에서 은사를 비꼬곤 했던 것은 그의 음악을 깎아내리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권위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 특유의 반발 심리를 과장해 드러낸 것이었다. 베를리오즈 역시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는 1837년 정부로부터 레퀴엠 작곡을 위촉 받았다. 1830년 7월 혁명 당시 사망자를 기리기 위한 곡이었다. 젊은 작곡가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케루비니는 자신이 아닌 제자가 선택된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도 베를리오즈는 스승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번에는 베토벤이 높이 샀던 C단조의 곡이 아니라 1836년에 작곡된 'D단조 레퀴엠'이었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초연은 앵발리드 성당에서 있었다. 그에 앞서 베를리오즈는 그곳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 덕에 곡이 울려 퍼질 공간 속에서 빛의 밝기와 음악의 상관관계에 대해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케루비니는 'D단조 레퀴엠'이 자신의 장례식에도 쓰이기를 바랐다. 1842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bpWdBIYefE (케루비니의 D단조 레퀴엠)

자신에게 비아냥거리고 반감을 표하기 일쑤였던 베를리오즈에게 케루비니가 죽어서 복수라도 한 것일까? 베를리오즈가 초기에 쓴 '환상 교향곡'(1830)과 '이탈리아의 헤롤드'(1834)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은 케루비니만큼이나 홀대를 받고 있다. 그 나머지란 것도 많지 않다.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테데움',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가곡집 '여름밤' 등이다.

베를리오즈는 만년에 자기 작품 중에서 하나만 남기라 한다면 '레퀴엠'을 꼽겠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모차르트나 베르디의 레퀴엠에 비해 이 곡에 대한 관심은 초라하기만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0j59aElISNk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가운데)

◆ 베를리오즈 최고의 곡 '로미오와 줄리엣'

나는 열렬한 베를리오즈 예찬자다. 나보고 그의 작품 중에서 하나만 남기라고 한다면 드라마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들고 싶다. 내게 차지하는 이 곡의 위상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비길 만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y1KMUNcDk3Q 뱌리츠의 말랑뎅 발레단이 공연한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 불멸의 걸작인 이 러브스토리에는 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다. 베를리오즈의 후배인 샤를 구노는 오페라로, 차이콥스키는 환상 서곡으로 작곡했고, 20세기에 나온 프로코피예프의 발레나 레너드 번스타인의 번안작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선구적인 작품은 나머지 곡들과 다른 점이 있다. 대개 대본 작가와 작곡가는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훈계를 생략하고 두 연인이 무덤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그 훈계란 베로나의 영주가 두 가문에게 싸움을 그만 멈추고 젊은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정을 맹세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이다. 오직 베를리오즈만이 이 부분을 베이스 가수를 통해 노래하게 한다. (위 동영상 7분 28초부터 https://youtu.be/y1KMUNcDk3Q?t=7m28s)

로렌스 신부의 이 설교를 두 가문이 반복해서 합창하는 것으로, 1시간 반이 넘는 드라마 교향곡은 막을 내린다. 노랫말에 나오는 '형제애'(fraternité)라는 것이 바로 자유, 평등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 중 하나다.

이는 톨레랑스, 곧 배려와 존중의 다른 표현 아닐까? 그저 슬픈 러브스토리로만 알기 쉬운 '로미오와 줄리엣'에 프랑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각인한 베를리오즈. 이제는 그만 저승에서라도 케루비니와 화해하고 두 사람 모두 음악가로서 좀더 합당한 대우를 받기 바란다. 베를리오즈의 진짜 라이벌 이야기는 다음 글에 이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Y5MJDd8zEOM <로미오와 줄리엣> 전체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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