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으로 돌아가다.

[단독] ‘사북 항쟁 주동’ 35년 만에 무죄

소한마리-화절령- 2015. 2. 13. 20:03

[단독] ‘사북 항쟁 주동’ 35년 만에 무죄

등록 :2015-02-12 00:37수정 :2015-02-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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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사북항쟁 당시 사북읍을 점거한 광산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저항은 나흘 동안 계속됐다. 사북항쟁동지회 제공
계엄령 아래서 ‘광부 난동’ 징역형 받은 70대 재심에서 명예회복
법원 “군경, 영장 없이 20여일 구금…물고문·구타로 허위자백”
1980년 ‘사북 노동항쟁’의 주동자로 몰려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35년 만에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었다. 사북항쟁은 신군부가 회사와 어용노조의 횡포에 저항한 광부들을 폭도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는 사북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이원갑(75)씨와 신경(73)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11일 밝혔다. 재판부는 “이씨 등은 광산노조 본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하거나 탄원서 제출 등에 관해 논의했을 뿐 계엄포고령이 금지한 불법 집회를 했다고 볼 수 없다. 특히 경찰과 광부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해, 소요를 선동한 점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경찰과 군검찰이 20여일간 불법 구금하고 물고문과 구타로 받아낸 허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씨 등은 강원도 정선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일했다. 동원탄좌는 24개 석탄광구에서 3400여명이 국내 석탄 생산량의 9%를 담당하던 최대 민영 탄광업체였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열악했다. 방음이 안 되는 스티로폼 벽에 천장이 허물어진 사택에서 겨울에는 수돗물이, 휴일에는 전기가 끊긴 채 생활했다. 사장 친인척으로 구성된 ‘암행독찰대’가 사생활을 감시했다. 회사는 채탄량을 축소 계산해 임금을 낮췄다. 광부들 사이에서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1980년 4월21일 노조지부장 부정선거 무효화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경찰이 불허했다. 이날 노조지부 사무실에 배치됐다가 광부들과 다툰 뒤 자리를 뜨려던 경찰관이 이를 막아서는 광부들을 차로 치어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광부들과 그 가족은 사북지서에서 물건을 부수고, 노조지부장 집에 몰려가 그의 아내를 집단폭행했다. 결국 경찰과 충돌해 경찰관 1명이 숨지고, 경찰과 민간인 160명이 다쳤다.

강원도청과 경찰은 통제가 쉽지 않자 이씨 등의 중재로 광부들과 사태 종식에 합의했다. 4월24일 합의문에는 “사태 수습에 경찰당국은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전날 밤 결정된 공수부대 투입은 취소됐다.

하지만 이를 ‘광부 난동사건’으로 규정한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단은 4·24 합의를 깨고 불법 연행과 무자비한 고문 수사 끝에 31명을 구속 기소했다. 당시 처벌받은 이씨와 신씨는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 뒤 2008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과 관련해 “계엄 당국이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국가는 당시 연행·구금된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