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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소한마리-화절령- 2015. 8. 16. 20:08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등록 :2015-08-13 20:17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⑩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
조선에서 제작한 <연행도>(1784년 이후 추정)의 ‘태화전’(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매년 정월 초하루, 자금성의 태화전에서는 조선 사절을 비롯한 여러 사신단이 황제에게 신년 조참례를 행하였다. 1713년 정월 김창업도 행사에 참여하여 자금성과 화려한 행렬을 구경했다.
조선에서 제작한 <연행도>(1784년 이후 추정)의 ‘태화전’(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매년 정월 초하루, 자금성의 태화전에서는 조선 사절을 비롯한 여러 사신단이 황제에게 신년 조참례를 행하였다. 1713년 정월 김창업도 행사에 참여하여 자금성과 화려한 행렬을 구경했다.
청 화가 요문한 등이 그린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부분, 베이징고궁박물관 소장).
청 화가 요문한 등이 그린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부분, 베이징고궁박물관 소장).

 

 

18세기 청나라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경외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이 바람은 조선에서 오래 지녀왔던 사고의 근본을 흔들었다. 조선은 청을 세운 만주족을 ‘오랑캐=열등한 인간’으로 규정했고, 따라서 그들의 국가 또한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예상치 않았던 청의 융성을 목격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인간’과 ‘문명’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淸), 제국이 되다

 

 

중국의 수많은 황제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했던 이는 강희제였다. 1661년 8살에 즉위한 그는 1722년 사망할 때까지 61년 동안을 통치하며 청의 기틀을 놓았다. 조선에서는 현종, 숙종, 경종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강희제는 먼저 청의 내분을 진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집권 20년을 넘긴 1680년대 초반 남쪽의 오삼계 세력과, 대만에 근거지를 두었던 정성공 세력이 정리되었다. 이후에는 북쪽 일대를 정리하였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매듭짓고, 몽고 일대의 강자 갈단을 패배시켰으며, 티베트까지 복속시켰다. 현재 중국 국경선은 강희~건륭제 때에 대강이 그려졌으니, 지금 중국이 꿈꾸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는 이미 실현되었던 셈이다.

 

 

강희제는 내치에서도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배합하였다. 세금을 크게 줄이고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아 인민 일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과 같은 대규모 학문, 문화 사업을 벌여 지식인 또한 포섭하였다. 한편으로 변발과 만주족 복식을 강요하여 한인(漢人)의 정체성을 허물고 ‘중국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이전의 북방 유목 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가 100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강희제와 그를 이은 옹정제, 건륭제의 통치로 인해 청은 20세기 초까지 총 270여년에 이르는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안정기에 접어든 청은 대조선 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강희제 이전의 순치제 시기, 청의 실권자였던 도르곤은 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구사했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좀 달랐다. 그는 조선에 대해 ‘예의로 국가를 일으켰다’거나 ‘조선이 사대의 모범이고, 문아(文雅)하다’는 수사를 종종 구사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에 대한 추모 작업을 공공연히 진행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명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못할 따름이다’라고 해명했지만, 조선은 명을 계승하고 있다는 속내가 깔린 일들이었다. 이 때문에 충분히 청의 신경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의 발언은 조선을 ‘예의의 나라’로 고정시켜, 죽은 명나라에 대해서 그 정도로 예의를 지킨다면 살아 있는 청나라에는 더욱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역포석이었다. 이처럼 강희제 이후 청과 조선은 ‘의리’를 매개로 서로를 적절히 인정하는 선에 머물렀다.

 

 

정기사신단 중국 간 김창업
‘오랑캐=열등’ 깬 <연행일기> 남겨
홍대용·박지원 앞선 연행록 효시
청의 융성·유교 덕치 실현 모습에
조선 지식인 세계관 인간관 흔들
호락논쟁 최고 논쟁거리 떠올라

 

 

김창업의 <연행일기>

 

강희제 후반부에는 조선 사신에 대한 청의 경계도 점차 완화되었다. 사신들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스럽게 돌아다니고 물품을 구입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712년(숙종 38)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 문제도 해결되어 양국의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 그해 겨울 정사로 정기 사신단을 이끌었던 이가 김창집이었다. 함께 간 자제군관으로는 원래 둘째 동생 김창흡이 가려 했는데 여의치 않아 셋째 동생 김창업이 가게 되었다. 형들 못지않은 학식과 재능의 소유자였던 김창업은 이때의 경험을 장문의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조선 3대 연행록의 효시로 평가받는 걸작 <연행일기>(일명 <노가재연행록>)이다.

 

 

김창업 이전에도 많은 사신단과 지식인들이 청을 왕래했었다. 그러나 청의 쇠퇴를 바라는 저의가 너무 강해서였는지, 정보는 빈약했고 서술도 객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창업은, 달라진 분위기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정보의 양에서 이전 서술을 압도하였고, 비록 일부나마 객관적인 정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새로 전한 실상은 이런 것들이었다.

 

 

‘욕심 많고 기강이 없으며 모든 일은 뇌물로 해결한다’던 청인(淸人)들을 만나보니 ‘마음이 밝고 통이 크며 모든 일을 이치에 맞게 처리’하였다. 열린 마음으로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닐 수 없다. 터무니없는 편견이 빚어낸 허상 역시 신빙성 있게 고쳐졌다. ‘음탕, 방탕한 오랑캐 황제’인 강희제는 ‘검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태평을 이룩한’ 군주였고, 그가 ‘궁궐 15채를 사치스럽게 지어놓고, 전국에서 미녀들을 뽑아놓았다’고 알려진 창춘원(暢春園)은 실제로 보니 ‘소박하고 건실하여 시골집 같았다.’

 

 

김창업은 때론 저들 문물의 장점도 소개하였다. ‘도시에서는 벽돌과 석회를 사용하여 새나 쥐가 없다’, ‘하수구를 만들어 쓰니 오물이 없다’는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기술이 훗날 ‘저들의 장점을 따라 배우자’는 사고 전환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선입견이 무너지는 한편에서 ‘문화의 상대성’과 ‘시간에 따른 변화’가 고개를 들었다. 김창업의 기술 가운데 ‘우리는 저들의 요강을 술그릇으로 착각하고, 저들은 우리의 요강을 밥그릇으로 잘못 쓴다’는 대목은 자못 우스꽝스럽다. 이후의 여러 연행기에 인용될 정도로 당시에도 널리 회자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가 빚어낸 웃음 다음에 문화 차이가 자연스러워지는 상호 인정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이제 청인이 중국에 들어온 지 오래이고 그들 또한 문치에 점점 교화되어 가고 있다’는 서술은 어떠한가. 김창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저들을 포착하였다. 오랑캐였던 그들 또한 문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

 

 

중화(中華)와 오랑캐

 

동아시아의 많은 유학자들은 새로 등장한 ‘청의 세상’을 두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사건’이라거나 ‘모자를 신고 옷을 뒤집어쓴 형세’라고 표현하곤 했다. 천지가 뒤바뀌고 유교 문명이 붕괴했다는 놀라움의 표현이다. 그처럼 전도된 세상을 지식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고 행동지침을 마련해야 했다.

 

청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인(漢人)들은 청의 지배를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논쟁을 벌였다. 지식인들은 반청 운동을 간헐적으로 지도했다. 그때마다 청 정부는 철저한 진압으로 응답했다. 옹정제는 아예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란 저서를 지어 유교의 논리를 빌려 대응했다. 그 뼈대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청은 덕(德)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유교국이라는 점. 둘째는 인간과 짐승(또는 오랑캐)을 가르는 기준은 오로지 인륜(人倫)이므로 인륜이 있다면 몽고인도 오랑캐가 아니며, 인륜이 없다면 한인들도 짐승이라는 논리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다시 설정하며 새 질서에 적응하고자 했다. 홀로 남은 유교문명국 조선은 유교의 보루가 되어 다시 밝아질 유교 문화를 준비해야 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전 유목계 왕조들이 오래가지 못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청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다시 ‘한인(漢人)왕조와 조선’이 주축을 이룬 관계가 들어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던 차에 전해지는 청의 융성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김창업조차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청의 분열 조짐, 청의 지배에 분노하는 한인들의 불만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의 의도와는 반대였던 것이다. 그의 긍정적인 자세는 자신의 주관과는 달라진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

 

 

김창업을 통해 새로운 실상을 접한 이들은 오랑캐 국가와 오랑캐의 범주에 드는 인간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수정을 가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오랑캐가 세운 청이 이전 명 왕조를 뛰어넘는 성세를 누리고 유교의 덕치(德治)를 실현한다면 그들도 유교 문명의 적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좀 더 깊숙한 철학적 질문, 즉 오랑캐로 분류되는 인간에 대한 수정도 동반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윤리를 가진 존재이지만, 금수와 같은 오랑캐는 보편 윤리가 결핍된 존재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청의 실상은 그들도 보편 윤리를 가진 존재였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오랑캐에 대한 수정된 견해는 오랑캐를 멸시하는 기성의 견해와 대립하며 호락논쟁 최고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여담 하나. 김창업의 고민을 한 차원 높게 정리하며 가장 빛나는 지점에 도달한 이들은 홍대용과 박지원이었다. 그들이 김창업의 연행록을 뛰어넘는 <담헌연기>와 <열하일기>를 남긴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