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호락논쟁12. 세계관 가른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소한마리-화절령- 2015. 9. 13. 14:58

세계관 가른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등록 :2015-09-1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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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⑫ 논쟁의 또다른 이름, 인성(人性)과 물성(物性) 논쟁
한국 철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호락논쟁에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가장 치열한 주제였던 인성과 물성에 주목하여 ‘인성물성 논쟁’,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으로 부르는 것이다. 주제를 중시하는 입장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실제의 사건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철학자들의 견해와 비교하게 만든다. 비교가 가능한 이유는 ‘타자에 대한 인정’이란 문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성은 타자에 대한 자세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을 떠올린다면 유학에서 인성(人性) 즉 인간의 본성은 오랜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물성’(物性)은 좀 낯설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강했던 유학에서 물(物)이라는 범주는 원래 ‘사건’ 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유학을 우주적 범주까지 넓힌 성리학에서는 물을 ‘물자체’, 말하자면 인간의 주관에 대응하는 객관적 실재로 확장시켰다. 그런 사유의 대표적 보기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인간의 지혜를 다한다는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그런데 성리학의 사물 인식에서는 두 길이 항상 대립하였다. 하나는 인간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니, 지금의 과학적 인식에 가깝다. 서양어 ‘피직스’가 ‘물리학’으로 번역되고, ‘사이언스’의 번역어 중 하나로 ‘격치학’(格致學)이 20세기 초까지 쓰였던 것은 이러한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의 주류적인 노선은 그쪽이 아니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인간의 주관, 다시 말해 가치 판단, 의리관 등을 객관 사물에 연결하였다. 사물은 객관적 실재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투영시킨 존재가 되어, 결국 인간과 사회가 직면한 물음의 해답을 위해 불려나왔다. 그런데 인간이 사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설명에는 좀 더 그럴싸한 수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사물 중에서는 무생물보다 식물이, 식물보다 동물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 같지 않은 인간’ 즉 오랑캐가 더 생동감 넘치는 비유를 제공하였다.

인성과 물성을 논쟁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대다수가 두 번째의 길에 서 있었다. 호락논쟁의 최대 주제였던 물성과 관련해서는 대개 동물에 대한 비유나 논쟁으로 시작해 오랑캐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가지면서 결론이 내려졌다. 예컨대 호론에서는 동물과 오랑캐의 비윤리성을 들어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했다면, 낙론에서는 꿀벌들의 의(義), 호랑이의 인(仁) 등을 내세워 인간의 한계나 위선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낙론의 논법이 한발 더 전진하면 박지원 등의 소설이 되었다. 박지원의 ‘호질’(虎叱)에서 호랑이의 입을 빌려 인간의 가식을 비판하고, ‘허생전’에서 북벌의 허위성을 비꼰 것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동물에 대한 성리학자들의 저술이나 수사를 들어 성리학자들에게서 과학적 태도, 생태적 관심, 윤리의 확장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그들은 동물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매개물로서 그들을 보고 있었기에, 현대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물론 동물, 사물에 대한 박물학적 관심과 계보화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걸 찾기 위해서는 위에 소개한 첫 번째 길, 즉 실증적 태도를 중시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여기서 각설하고.

 

 

타자 통한 자신과 인간 본성 사유
주관 배제, 사물 그대로 파악하느냐
주관적 판단에 사물을 활용하느냐
성리학, 호락논쟁?居인성·물성 논쟁
불교, “악인도 부처가 될 수 있나?”
기독교, “인디오·흑인도 인간인가?”

 

 

악인도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물성에 대한 정의는 결국 타자에 대한 정의이자,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타자를 통해 자신 혹은 인간의 본성에 더 깊이 개입하는 사유는 동서양 공통의 화두였고 때로 격렬한 논쟁을 동반하였다. 그리고 사물이나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주체의 겸손을 촉구하는 주장은 대개 기성 견해에 대한 비판을 동반하였으므로 반대는 물론 박해에 직면하기도 했다. 불교에는 드라마틱한 설화가 전한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축도생의 견해나, 아메리카 원주민 또한 신의 창조물이라는 라스카사스의 주장은 차별을 극복해온 동서고금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림은 현대 중국의 화가 팡사오칭이 그린 <축도생>.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축도생의 견해나, 아메리카 원주민 또한 신의 창조물이라는 라스카사스의 주장은 차별을 극복해온 동서고금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림은 현대 중국의 화가 팡사오칭이 그린 <축도생>.

 

5세기 초반 중국에 축도생(竺道生)이란 스님이 있었다. 그는 “일천제(一闡提)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천제는 산스크리트말로 ‘이찬티카’(icchantika)인데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 혹은 ‘불법을 훼방놓아 구원되지 못할 존재’ 정도의 의미였다.

인간 말종인 일천제조차도 성불할 수 있다는 축도생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이었다. 다른 승려들의 거센 비판이 일었고, 마침내 산으로 쫓겨났다. 그는 홀로 수도했는데, 바위를 앞에 두고 ‘내 견해가 맞지 않는가’를 물었고, 바위가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완고한 바위도 움직인다는 ‘완석점두’(頑石點頭)란 고사가 여기서 생겼다.

더 극적인 장면은 뒤에 일어났다. 나중에 <대승열반경>이 완역되었는데, 그 경전의 핵심이 바로 축도생의 의견과 부합하였고, 결국 모두가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되었다. 축도생을 기사회생케 한 <열반경>의 내용이 그 유명한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즉 뭇 생물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 보편론이었다.

축도생의 설화는 인간 혹은 인간 외의 존재까지도 가능성을 가진 평등한 개체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일깨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축도생의 설화는 감동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아마 현실에서는 타자에 대한 차별을 내세워 핍박을 감행했던 사례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리라.

 

 

바야돌리드 논쟁

타자에 대한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경험하고 정교한 논리를 만들어 증명한 이들은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이 자기 내부와 외부에서 발견한 타자들은 마녀가 되거나 악마의 대리인이 되었고, 그들에 대한 부정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물었던 대학살을 정당화했다. 새로 ‘발견한’ 인간의 범주를 두고 서양의 역사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장면을 찾으라면, 지금도 종종 소설이나 영화·연극의 소재로 등장하는 ‘바야돌리드 논쟁’을 들 수 있다.

15세기 후반 이래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어마어마한 재부를 약탈했고, 원주민인 인디오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보다 못한 일부 신부들은 이를 본국에 고발하였고 원주민 또한 같은 인간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인디오가 신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유럽인의 잔학 행위가 신학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옹호하는 이들은 법률가이자 철학자였던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의 견해를 내세웠다. 그의 주장은 인디오의 여러 이교도적 행위들, 예를 들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 등을 들어 그들은 신에 의해 정당하게 창조되지 않은 존재라는 식이었다. 때문에 유럽인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이고, 인디오들의 비참함은 신에 의해 정해진 그들의 운명일 따름이었다.

19세기 멕시코의 화가 펠릭스 파라의 <라스카사스>. 돌에 호소하고, 학살된 원주민 앞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19세기 멕시코의 화가 펠릭스 파라의 <라스카사스>. 돌에 호소하고, 학살된 원주민 앞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에 대해 원주민을 옹호하고 나선 이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였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본성은 같으며, 원주민들 또한 개종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잘못된 관습은 외부적 요인이기에 변화가 가능했다. 그의 반박에는 이성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논쟁은 라스카사스의 승리로 귀결하였다. 스페인의 국왕은 인디오들의 노예화를 금하는 등의 좀더 인간적인 법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또다른 책략이 시도되고 있었다. 인디오보다도 더 인간 같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썼기 때문이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동물, 오랑캐, 일천제, 인디오를 두고, 이른바 문명을 자처한 이들이 벌인 철학적 논쟁을 보면 사실 무엇이 더 고귀하고 무엇이 더 야만인지 그저 회의가 들 따름이다. 이 문제 앞에서 어찌 철학만을 탓할 수 있으랴. 종교, 인류학, 사회학, 과학 등 이성과 문명이 이룩한 학문들도 타자라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신들의 정체성이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야만’은 결국 우리 안의 배타성에 붙여야 하지 않을까.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