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⑩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
조선에서 제작한 <연행도>(1784년 이후 추정)의 ‘태화전’(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매년 정월 초하루, 자금성의 태화전에서는 조선 사절을 비롯한 여러 사신단이 황제에게 신년 조참례를 행하였다. 1713년 정월 김창업도 행사에 참여하여 자금성과 화려한 행렬을 구경했다.
청 화가 요문한 등이 그린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부분, 베이징고궁박물관 소장).
‘오랑캐=열등’ 깬 <연행일기> 남겨
홍대용·박지원 앞선 연행록 효시
청의 융성·유교 덕치 실현 모습에
조선 지식인 세계관 인간관 흔들
호락논쟁 최고 논쟁거리 떠올라 김창업의 <연행일기> 강희제 후반부에는 조선 사신에 대한 청의 경계도 점차 완화되었다. 사신들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스럽게 돌아다니고 물품을 구입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712년(숙종 38)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 문제도 해결되어 양국의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 그해 겨울 정사로 정기 사신단을 이끌었던 이가 김창집이었다. 함께 간 자제군관으로는 원래 둘째 동생 김창흡이 가려 했는데 여의치 않아 셋째 동생 김창업이 가게 되었다. 형들 못지않은 학식과 재능의 소유자였던 김창업은 이때의 경험을 장문의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조선 3대 연행록의 효시로 평가받는 걸작 <연행일기>(일명 <노가재연행록>)이다. 김창업 이전에도 많은 사신단과 지식인들이 청을 왕래했었다. 그러나 청의 쇠퇴를 바라는 저의가 너무 강해서였는지, 정보는 빈약했고 서술도 객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창업은, 달라진 분위기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정보의 양에서 이전 서술을 압도하였고, 비록 일부나마 객관적인 정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새로 전한 실상은 이런 것들이었다. ‘욕심 많고 기강이 없으며 모든 일은 뇌물로 해결한다’던 청인(淸人)들을 만나보니 ‘마음이 밝고 통이 크며 모든 일을 이치에 맞게 처리’하였다. 열린 마음으로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닐 수 없다. 터무니없는 편견이 빚어낸 허상 역시 신빙성 있게 고쳐졌다. ‘음탕, 방탕한 오랑캐 황제’인 강희제는 ‘검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태평을 이룩한’ 군주였고, 그가 ‘궁궐 15채를 사치스럽게 지어놓고, 전국에서 미녀들을 뽑아놓았다’고 알려진 창춘원(暢春園)은 실제로 보니 ‘소박하고 건실하여 시골집 같았다.’ 김창업은 때론 저들 문물의 장점도 소개하였다. ‘도시에서는 벽돌과 석회를 사용하여 새나 쥐가 없다’, ‘하수구를 만들어 쓰니 오물이 없다’는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기술이 훗날 ‘저들의 장점을 따라 배우자’는 사고 전환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선입견이 무너지는 한편에서 ‘문화의 상대성’과 ‘시간에 따른 변화’가 고개를 들었다. 김창업의 기술 가운데 ‘우리는 저들의 요강을 술그릇으로 착각하고, 저들은 우리의 요강을 밥그릇으로 잘못 쓴다’는 대목은 자못 우스꽝스럽다. 이후의 여러 연행기에 인용될 정도로 당시에도 널리 회자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가 빚어낸 웃음 다음에 문화 차이가 자연스러워지는 상호 인정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이제 청인이 중국에 들어온 지 오래이고 그들 또한 문치에 점점 교화되어 가고 있다’는 서술은 어떠한가. 김창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저들을 포착하였다. 오랑캐였던 그들 또한 문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 중화(中華)와 오랑캐 동아시아의 많은 유학자들은 새로 등장한 ‘청의 세상’을 두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사건’이라거나 ‘모자를 신고 옷을 뒤집어쓴 형세’라고 표현하곤 했다. 천지가 뒤바뀌고 유교 문명이 붕괴했다는 놀라움의 표현이다. 그처럼 전도된 세상을 지식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고 행동지침을 마련해야 했다. 청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인(漢人)들은 청의 지배를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논쟁을 벌였다. 지식인들은 반청 운동을 간헐적으로 지도했다. 그때마다 청 정부는 철저한 진압으로 응답했다. 옹정제는 아예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란 저서를 지어 유교의 논리를 빌려 대응했다. 그 뼈대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청은 덕(德)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유교국이라는 점. 둘째는 인간과 짐승(또는 오랑캐)을 가르는 기준은 오로지 인륜(人倫)이므로 인륜이 있다면 몽고인도 오랑캐가 아니며, 인륜이 없다면 한인들도 짐승이라는 논리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다시 설정하며 새 질서에 적응하고자 했다. 홀로 남은 유교문명국 조선은 유교의 보루가 되어 다시 밝아질 유교 문화를 준비해야 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전 유목계 왕조들이 오래가지 못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청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다시 ‘한인(漢人)왕조와 조선’이 주축을 이룬 관계가 들어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던 차에 전해지는 청의 융성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김창업조차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청의 분열 조짐, 청의 지배에 분노하는 한인들의 불만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의 의도와는 반대였던 것이다. 그의 긍정적인 자세는 자신의 주관과는 달라진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 김창업을 통해 새로운 실상을 접한 이들은 오랑캐 국가와 오랑캐의 범주에 드는 인간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수정을 가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오랑캐가 세운 청이 이전 명 왕조를 뛰어넘는 성세를 누리고 유교의 덕치(德治)를 실현한다면 그들도 유교 문명의 적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좀 더 깊숙한 철학적 질문, 즉 오랑캐로 분류되는 인간에 대한 수정도 동반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윤리를 가진 존재이지만, 금수와 같은 오랑캐는 보편 윤리가 결핍된 존재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청의 실상은 그들도 보편 윤리를 가진 존재였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오랑캐에 대한 수정된 견해는 오랑캐를 멸시하는 기성의 견해와 대립하며 호락논쟁 최고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