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한강 가에 자리잡은 석실서원(石室書院). 겸재 정선이 그린 이 그림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녹음 사이로 서원 건물이 듬성듬성 보이고 오른편에는 논밭도 보인다. 왼쪽 상단의 ‘渼湖(미호)’는 이곳의 지명인데, 미호는 김원행의 호이기도 하다. 석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렸고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⑨ 김원행 - 실심(實心)을 찾아서
옛날 나는 책을 읽다 문득 새소리에 방해를 받았다. 가만히 있다가 “이게 과연 방해가 되겠는가. 울 것은 울고, 읽는 자는 읽는 게지. <중용>(中庸)에도 ‘만물은 함께 자라 서로 해치지 않고, 도(道)는 함께 행해져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또 방해를 받자, “아아, 아직 나는 마음을 보존하는 데 미숙하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18세기 중반 낙론을 크게 부흥시킨 김원행의 글이다. 글에 나타난 ‘함께 공존하고, 마음을 찾는다’는 다짐은 낙론의 이론과 지향에 큰 뼈대가 되었다.
이기심에 휩쓸리는 사회
김원행의 증조부 김수항과 조부 김창집은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낙론을 개창한 김창협·김창흡은 작은할아버지였다. 그러나 김수항은 숙종 대에 남인과의 정쟁으로 사사당했고, 김창집은 경종 대에 소론과의 정쟁에서 사사되었다. 할아버지 김창집이 죽을 때는 부친 김제겸과 형 김성행도 함께 죽었다. 김원행의 가문은 남인과 소론을 몰락시키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입은 피해도 매우 컸다. 그들이 바로 노론 명문 안동 김씨이다. 훗날 세도가문이 되어 국권을 좌우한 것은 김원행 다음 세대의 일이다.
김원행은 작은할아버지 김창협의 양손(養孫)이 되어 있었으므로, 부친 등이 죽을 때 함께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는 충청도로 내려갔고, 낙론의 큰 학자 이재의 제자가 되었다. 과거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기(氣) 철학으로 유명한 임성주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세월이 흘러 영조가 등극하고 가문은 점차 복권되었다. 할아버지의 제자인 어유봉과 박필주가 영조의 호감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승인 이재는 영조의 탕평을 비판하다 1746년(영조 22)에 사망하였다. 이재가 사망할 무렵, 40대 중반에 접어든 김원행은 경기도 양주의 한강가로 이사하였다. 이곳에는 가문과 인연이 깊은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었다. 20년 넘게 교육 기능을 상실한 서원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그는 제자를 기르기 시작했다.
김원행이 서원을 재가동한 지 10여년. 1755년(영조 31) 영조는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소론을 대거 숙청하고 노론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였다. 이로써 노론의 탕평 비판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김원행은 사회의 다른 흐름을 우려하고 있었다.
중년 이후의 김원행은 사회가 세속화하는 현상을 자주 입에 올렸다. 학풍을 비판할 때나 정치를 비판할 때도 이익에 휩쓸리는 세태를 문제 삼았다. 그 세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유속’(流俗)이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세속화의 지나친 유행’ 정도랄까. 김원행은 ‘이익에 이끌려 마음의 밝은 덕을 잃어버리고 올바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였다. 그 폐해는 구체적으로는 어떠했을까. 학문하는 이들은 순수한 동기를 잃어버리고 번지르르하게 말을 꾸미고 명성만을 추구하였다. 그게 아니면 경전 암기에만 골몰하였다. 그들은 유학의 적이었다. 과거를 보는 이들은 어떤가. 그들에게 과거란 애당초 이익과 명예를 향한 출세의 수단이었다. 그들은 아첨배나 될 뿐이었으니, 그들의 해악은 이단보다 더 심했다.
우려스런 사회 흐름으로 유속을 거론한 것은, 호론이 의리론을 견지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진단이 달랐으므로 처방 또한 달랐다. 김원행은 마음의 진실함을 회복하자고 촉구하였다.
18세기 중반 낙론 부흥시킨 주역
신실·순수한 마음(실심) 추구
이익과 출세 위한 학문 배격
낙론 이론·지향에 큰 뼈대 이뤄 석실서원이 배출한 무명 학자들
철학왕국 조선의 숨은 뿌리 역할 일상에서 찾는 진실한 마음 김원행은 호락논쟁의 주요 논쟁에 개입하고 논증하는 저술이 많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배우고 체험하는 개인의 신실함, 학문을 대하는 순수한 마음을 강조했다. 그 마음이 바로 실심(實心)이었다. 실심은 본래 가지고 있던 천진한 본성을 자각하면서 얻어지는데, 그 자각은 어려운 학문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수양과 실천 속에서 가능하였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도를 깨치자는 것인데, 유학에서는 이것을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 불렀다. 김원행은 실심과 그에 연관하는 여러 개념들을 부각시켰다. 실심이 있으면, 개인의 이익과 상관없는 만인을 위한 공덕을 이룩하니 이것이 실공(實功)이다. 실심을 지니고 실공을 이룩하는 인물이 실사(實士)이다. 한국의 유학사에서 이처럼 ‘실’(實)과 연관한 개념들을 그렸던 선배를 꼽자면 위대한 개혁가였던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정도가 손꼽힌다. 다만 두 사람이 현실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던 데 비해, 김원행은 철학과 교육에 주력했던 점이 차이였다. 김원행은 실심을 회복하여 일정한 경지를 넘으면 인간의 보편 본성을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성인의 마음이라 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그 점을 강조하였다. “아아 나의 본성은 이미 성인과 같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도 거리낌 없이 포기하고 회복시키려 하지 않는구나. … 회복할 방법은 학문에 있으며, 학문에서 귀한 것은 힘써 행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본성이 보편적으로 같으며, 따라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김원행이 호락논쟁의 중요한 테마였던 ‘성인과 범인의 마음 논쟁’에서 ‘마음의 동일성’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천선(遷善)을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또한 그 점 때문에 호론에서는 김원행이 양명학에 접근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학문공동체 석실서원 주장이 바르다 해도 그의 삶에서 검증되지 않는다면 감동이 없다. 명가 출신 김원행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고 서울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석실서원은 서울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개인적 처신도 귀감이 되었지만, 적극적인 실천도 되새길 만하다. 그 정점에 경건한 학문 공동체였던 석실서원이 있었다. 석실서원 학규(學規)의 첫머리는 ‘독서에 뜻을 두면 나이와 귀천에 상관없이 입학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임원들은 덕망과 행실을 기준으로 뽑았고, 회의를 거쳐 대소사를 결정했으며, 소지품은 모두 기록하고 공공으로 사용하였다. 일상은 어떠했을까. 원생들은 새벽에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했다. 청소는 가장 연소자가 했다. 서로 소리를 내지 않고 인사하고는 각자 재실(齋室, 공부방)로 들어가 독서하였다. 독서할 때에는 용모를 가다듬고 똑바로 앉아 집중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뜻을 기울여 의미를 캐고, 서로 돌아보며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 식사할 때는 편식하지 말아야 하고, 배부르게 먹는 것을 삼갔다. 식사 후에는 정원을 산책하는데 연장자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이밖에도 함께 모여 글을 강독할 때의 규칙, 지켜야 할 일곱 가지 계율, 용모와 행동거지 등등이 빼곡하다. 지금 보면 딱 절에서의 스님들이나 수도원의 수도사가 연상된다. 반(半)종교인 같은 경건한 그들의 생활은 유학의 덕목을 몸에 자연스럽게 배게 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원행이 기른 제자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들어 150여명을 넘었다. 학문 성향 등을 고려해 그들을 분류하면 크게 세 부류였다. 학문을 따른 제자, 관직에 진출한 제자 그리고 지방 출신의 제자들이다. 학문 방면에서는 홍대용과 황윤석이 돋보인다. 정계에 진출한 이들은 주로 정조 대에 시파(時派)로 활동했다.
그들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스승의 지향에 오히려 꼭 들어맞는 자들은 무명의 지방 제자들이었다. 김원행은 이들이야말로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학문을 향한 의지가 굳건하다고 칭찬했다.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중에서 임보의 사례를 들어보자. 그는 효성이 지극했지만 서른 살이 넘도록 까막눈이었다. 젊어서는 공부를 깔보았지만 석실서원에서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고향에 내려가 40년 동안 매일 <소학>을 읽어 ‘임소학’(任小學)으로 불렸다. 충청도 출신 고사행이란 제자는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사람 수십명과 함께 초당(草堂)을 세우고 석실서원의 규칙에 따라 강학하였다. 일종의 분교를 세운 셈이다.
이 무명의 학자들이야말로 철학 왕국 조선의 숨은 뿌리였다. 낙론의 학자들은 유학의 저변화를 통해 조선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신실·순수한 마음(실심) 추구
이익과 출세 위한 학문 배격
낙론 이론·지향에 큰 뼈대 이뤄 석실서원이 배출한 무명 학자들
철학왕국 조선의 숨은 뿌리 역할 일상에서 찾는 진실한 마음 김원행은 호락논쟁의 주요 논쟁에 개입하고 논증하는 저술이 많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배우고 체험하는 개인의 신실함, 학문을 대하는 순수한 마음을 강조했다. 그 마음이 바로 실심(實心)이었다. 실심은 본래 가지고 있던 천진한 본성을 자각하면서 얻어지는데, 그 자각은 어려운 학문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수양과 실천 속에서 가능하였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도를 깨치자는 것인데, 유학에서는 이것을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 불렀다. 김원행은 실심과 그에 연관하는 여러 개념들을 부각시켰다. 실심이 있으면, 개인의 이익과 상관없는 만인을 위한 공덕을 이룩하니 이것이 실공(實功)이다. 실심을 지니고 실공을 이룩하는 인물이 실사(實士)이다. 한국의 유학사에서 이처럼 ‘실’(實)과 연관한 개념들을 그렸던 선배를 꼽자면 위대한 개혁가였던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정도가 손꼽힌다. 다만 두 사람이 현실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던 데 비해, 김원행은 철학과 교육에 주력했던 점이 차이였다. 김원행은 실심을 회복하여 일정한 경지를 넘으면 인간의 보편 본성을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성인의 마음이라 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그 점을 강조하였다. “아아 나의 본성은 이미 성인과 같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도 거리낌 없이 포기하고 회복시키려 하지 않는구나. … 회복할 방법은 학문에 있으며, 학문에서 귀한 것은 힘써 행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본성이 보편적으로 같으며, 따라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김원행이 호락논쟁의 중요한 테마였던 ‘성인과 범인의 마음 논쟁’에서 ‘마음의 동일성’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천선(遷善)을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또한 그 점 때문에 호론에서는 김원행이 양명학에 접근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학문공동체 석실서원 주장이 바르다 해도 그의 삶에서 검증되지 않는다면 감동이 없다. 명가 출신 김원행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고 서울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석실서원은 서울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개인적 처신도 귀감이 되었지만, 적극적인 실천도 되새길 만하다. 그 정점에 경건한 학문 공동체였던 석실서원이 있었다. 석실서원 학규(學規)의 첫머리는 ‘독서에 뜻을 두면 나이와 귀천에 상관없이 입학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임원들은 덕망과 행실을 기준으로 뽑았고, 회의를 거쳐 대소사를 결정했으며, 소지품은 모두 기록하고 공공으로 사용하였다. 일상은 어떠했을까. 원생들은 새벽에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했다. 청소는 가장 연소자가 했다. 서로 소리를 내지 않고 인사하고는 각자 재실(齋室, 공부방)로 들어가 독서하였다. 독서할 때에는 용모를 가다듬고 똑바로 앉아 집중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뜻을 기울여 의미를 캐고, 서로 돌아보며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 식사할 때는 편식하지 말아야 하고, 배부르게 먹는 것을 삼갔다. 식사 후에는 정원을 산책하는데 연장자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이밖에도 함께 모여 글을 강독할 때의 규칙, 지켜야 할 일곱 가지 계율, 용모와 행동거지 등등이 빼곡하다. 지금 보면 딱 절에서의 스님들이나 수도원의 수도사가 연상된다. 반(半)종교인 같은 경건한 그들의 생활은 유학의 덕목을 몸에 자연스럽게 배게 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원행이 기른 제자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들어 150여명을 넘었다. 학문 성향 등을 고려해 그들을 분류하면 크게 세 부류였다. 학문을 따른 제자, 관직에 진출한 제자 그리고 지방 출신의 제자들이다. 학문 방면에서는 홍대용과 황윤석이 돋보인다. 정계에 진출한 이들은 주로 정조 대에 시파(時派)로 활동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