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순의 별장 옥호정(玉壺亭). 옥호정은 서울 세도가의 생활 풍경을 보여준다. 1815년께 완성되었다. 현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일대. 하인들이 사는 바깥마당, 사랑채인 옥호산방과 안채, 옥호동천(玉壺洞天)으로 불렸던 후원, 소나무 숲이 우거진 뒷산으로 구성되었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18) 세도(世道)에서 세도(勢道)로
순조 초반을 흔들었던 벽파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 뒤를 새 외척들이 대신했다. 외척이 정치를 주도하는 성격은 여전했지만 달라진 점도 있었다. 대개 낙론-시파에 뿌리를 둔 그들은 통제보다는 완화를 선호했으므로 분위기는 한층 풀렸다. 그러나 사회와 사상의 활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혈연과 인맥, 경제력, 지역 등 타고난 배경을 중시하는 세태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이념을 중시하는 ‘세도(世道)’란 말이 세력을 중시하는 ‘세도(勢道)’로 바뀐 것은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바뀐 정국
순조는 1802년에 김조순의 딸과 혼인했다. 새 왕비 순원왕후는 서울의 명문 안동 김씨 출신이었다. 막강한 가문을 처가로 두게 된 순조는 1804년에 친정을 했다.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정순왕후는 1805년에 세상을 떴다.
수세에 몰린 벽파는 1806년에 일련의 사건으로 몰락했다. 그중 벽파를 역적으로 못박아버린 사건은 이른바 ‘김한록의 8자 흉언(凶言)’이었다. 영조 말년에 한원진의 수제자였던 김한록이 정조의 왕위 계승을 문제 삼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이 공개되자 호론과 벽파는 재기 불능이 되어버렸다. 이미 사망한 김한록과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는 주모자로 낙인찍혀 관작(官爵)이 박탈되었다. 김한록의 아들 김관주는 함경도로 유배가다 사망했고, 일족들도 유배되었다. 생전에 이들과 가까웠던 김종수, 심환지의 관작도 박탈되었고, 호론의 일부 학자들의 문집이 파기되었다.
이른바 ‘안동 김씨 세도’를 열었던 김조순.
정국 변화에 주도적인 역할은 안동 김씨와 순조의 외가 반남 박씨 등이 담당했다.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이들은 다소 개방적인 낙론의 세례를 받았고, 문물이 왕성했던 서울에서 자랐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의 전력을 보자. 그는 젊은 시절 새로운 문체를 즐겼던 신유행의 선도자였다. 그의 정치적 동지인 남공철, 이상황, 심상규 등도 모두 소설과 새 문체를 즐겼다. 이들이 하나같이 열광했던 사실은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일 정도였다.
어쨌든 이들의 등장으로 숨 쉴 공간은 조금 열렸다. 유배된 이들은 다시 풀려났고 통제는 완화되었다. 심지어 서학 역시 다소간 교세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긍정적인 모습은 딱 거기까지였다. 공포스런 탄압은 사라졌지만, 정권이 교체되는 와중에 최소한의 정치 원칙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벽파가 축출된 과정은 그들의 허망한 마지막보다 훨씬 더 허망했다. 김한록 사건은 수십년 전에 그것도 사석에서 한 말에 불과했다. 반대파를 숙청하는 명분이 ‘옛날에 ~라고 했다더라’는 수준이라면 저급한 정치공작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상적인 공론(公論)은 사라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고식적인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는 말에도 반영되었다. 지금 우리는 이 시대를 ‘세도(勢道) 정치기’로 부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세도(世道)’가 보통명사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바른 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외척 세도가들은 마치 국왕에게서 세도를 위임받은 존재처럼 굴었다. 그러자 ‘세도가’, ‘세도 부린다’, ‘세도를 잃었다’와 같은 말이 유행했다. 사람들은 세도를 도리와 상관없는 권력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초반부터는 아예 ‘세도(勢道)’로 글자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민심은 어눌한 듯하지만 예리하게 세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수십년 전 사석에서 한 말로
호론은 정계에서 완전 축출
사상의 지나침 경계한 낙론
명분 이용하다 스스로 소멸
차별주의 사로잡힌 호론
명분 체화해 생명력 얻어
호론은 정계에서 완전 축출
사상의 지나침 경계한 낙론
명분 이용하다 스스로 소멸
차별주의 사로잡힌 호론
명분 체화해 생명력 얻어
김조순은 후원 바위에 ‘아름다운 산수가 영원할 것이다’라는 글귀를 새겨넣었지만 지금은 주택가와 청와대에 속해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림은 1960년에 공개되어 일반에게 알려졌다.(개인 소장)
이야기 만들기
호론 일부에서 역적이 나오게 되자 논쟁은 종착점에 다다른 듯했다. 이에 호응하듯 낙론 학자들은 호론을 확실히 묻어버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논쟁의 전말을 이야기 속에 고정시키는 일이었다.
호락논쟁을 소개하는 저술이 이전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낙론 학자였던 황윤석은 일찍이 1778년(정조 2)에 ‘기호락이학시말’(記湖洛二學始末)을 지었다. ‘호학과 낙학, 두 학파 논쟁의 전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글에는 두 학파의 이론, 논쟁의 전개, 학통 수립, 정치와의 연관 등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쓰였다. 그런데 대립이 격화되자 한쪽 입장을 노골적으로 편드는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십이변>(十二辨), <호락사실>(湖洛事實) 등이었다. 이들 책에서는 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와 같은 서사성이 점차 강화되었다. 그리고 상대의 학술이 이단으로 흘렀다거나, 스승을 높이는 과정에서 빚어진 조작과 기만 등 민감한 내용들도 추가되었다.
순조 초반의 정치 파동을 겪고 김한록의 잘못이 공인되자 서술 방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최소한의 인정은 사라지고 선명한 이분법과 원천적인 부정이 자리잡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은파산고>(恩坡散稿)란 책에서는 정조~순조 대 시파와 벽파의 대립을 충(忠)과 역(逆)으로 한결같이 갈랐다. 그리고 벽파가 역적이 된 것은 잘못된 학술 때문이고, 그 기원에는 한원진의 학문이 있었다고 지목했다. 이로서 학술논쟁은 정치논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역적은 그릇된 학문을 배웠기 때문이고, 그릇된 학문은 못된 마음에서 나왔다’는 논리는 정치 전말을 정리하는 책에서 종종 써먹던 방식이었다. 자기 붕당의 입장에서 쓰인 이 같은 정치 관련 책들을 이른바 ‘당론서’(黨論書)라 부른다. 말하자면 호락논쟁의 정리 작업은 마침내 당론서와의 결합으로까지 진행되었던 것이다.
당론서 형식의 책이 나온 것은 학자와 학문을 정치적 입장에서 재단하고 취사(取捨)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창조적인 해석은 차단되고 풍부한 철학 논쟁은 단순화되었다. 그것이 호락논쟁의 또다른 종착지였다.
잃은 것과 얻은 것
호론은 역적이 되고 낙론은 그들을 확실히 단죄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끝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학파로서의 정체성은 낙론이 먼저 상실하였다. 벽파가 호론을 종속시켰던 것처럼, 새로 등장한 척신 또한 낙론의 학자들을 종속시켰다. 몇몇 낙론 학자에게는 ‘세도가의 식객’이란 불명예스런 호칭이 붙기도 했다. 논쟁의 정리 작업은 호론에게서 정치 명분을 빼앗았지만, 그 작업을 주도한 낙론의 학자들은 학파로서의 생동감을 잃어버렸다. 정체성을 상실한 낙론은 지방에 건재한 여타 학파들보다 훨씬 빠르게 구심력을 잃었다.
호론은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러나 학맥마저 단절되지는 않았다. 호론의 두 지도자였던 한원진과 윤봉구에 대해, 낙론에서 그들의 잘못을 확인했다 할지라도, 정부 차원에서까지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는 일은 없었다. 일부 온건한 제자들은 한원진의 문집을 간행했고, 그들을 모신 서원은 조금씩 늘어났다. 큰 타격을 입은 김한록 가문에서조차 김일주 등을 통해 가학으로 계승되었다.
한원진의 정교한 성리논설은 여전히 논쟁거리였지만, 그 이론에서 태어난 유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정신은 조선의 상황에 맞추어 갱신되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들어 서양과 일본 등 ‘새로운 오랑캐’가 등장하자 한원진의 후예들은 한원진의 주장을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스스로를 ‘남당(南塘) 한원진의 문하’라는 ‘당문’(塘門)으로 자칭하며 척사 상소를 올렸고 충청도 보령, 홍주 등지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남인에 속한 영남의 퇴계 학파와, 새로 부상한 경기의 화서 학파와도 연대하였다. 위정척사라는 대의(大義) 안에서 그들은 노론-벽파라는 오래된 정치적 정체성조차 넘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한원진의 학문으로 인해 충청도 한 지역에 의리가 설 수 있었다고 자부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낙론은 사상의 지나침을 경계했지만, 명분을 이용하다가 스스로 소멸했다. 호론은 차별주의에 사로잡혔지만, 적어도 이중적으로 처신하지는 않았다. 명분을 체화한 호론의 생존은 보수의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시의에 뒤떨어질지라도 언행이 일치했던 그들은 보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