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에서 만난 홍대용과 항주 선비 엄성, 육비, 반정균과의 친교는 후손들 대까지 계속되었다. 홍대용의 후배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도 이에 크게 고무되어 교유를 확대하였다. 이들의 경험은 훗날 조선 개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림은 1765~1766년의 동지사 사신들. 엄성의 문집인 <철교전집>에 실렸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홍대용, 이훤, 김선행, 홍억, 김재행, 이기성. 국사편찬위원회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16) 호락논쟁을 뛰어넘은 홍대용
(16) 호락논쟁을 뛰어넘은 홍대용
1766년 홍대용은 청나라 북경의 정양문(正陽門)을 보며 감탄과 한탄이 뒤섞인 기분에 젖었다. “수많은 수레와 말이 드나들고 바퀴 구르는 소리는 벽력 같네. 옆사람 말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참으로 천하의 장관이구나! … 슬프다. 이렇게 번화한 곳을 오랑캐가 관장한 지 백년이 넘었는데도 회복할 계책이 없으니 중국에 과연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홍대용의 착잡함은 꽤나 연고가 깊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청이 쇠퇴하리라 예견했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고 대신 청의 융성이 도래했다. 그의 묘한 느낌은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사실 많은 이들이 그 불일치를 경험했었다. 그렇지만 홍대용처럼 해법을 집요하게 파고든 이는 없었다. 고민의 끝에서 그는 호락논쟁의 사고 차원을 뛰어넘었다.
노론 명문 홍대용, 집요한 물음
“큰 의심 없이 큰 깨달음 없다”
스승에 “노론 잘못” 바른 소리도
18세기 청 둘러보고 연행록 남겨
호락논쟁 속 근대 이성까지 접근
호락논쟁의 세례를 받으며 출발한 홍대용은 논쟁에서 멀리 떨어진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그곳은 근대의 이성주의, 때론 탈근대의 상대주의까지 걸쳐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는 그의 사유는 가히 조선 철학의 정점이라 할 만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공관병수,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기
홍대용은 노론의 명문 출신이었다. 낙론을 크게 확장한 김원행에게 배워 수제자가 되었다. 김원행은 5촌 고모부이기도 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낙론을 크게 번성시킬 기대주였다. 그런데 사고가 좀 남달랐다. 20대 초반 홍대용은 김원행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질문의 요지는 소론을 이끌었던 윤증의 처신에도 긍정할 점이 있고, 경종 대에 노론이 화를 입었던 신임옥사에서는 노론 또한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조목조목 따지는 제자 앞에서 스승은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너의 말이 지나치고 망령되니, 내가 대답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김원행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은 신임옥사에서 죽임을 당했었다. 그러니 그가 인내심을 잃은 것도 이해는 간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홍대용은 왜 질문한 것일까. 흠씬 야단맞은 홍대용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큰 의심이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의혹을 감추고 겉으로 맞장구치느니, 생각을 털어놓고 분명히 밝히는 게 나을 듯해서입니다.” 이성의 힘이 금기를 돌파하는 장면이다. 제자의 진심은 얼어붙은 스승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원행은 이내 “낡은 견해를 씻고 공평한 마음으로 생각하자”고 동감을 표했다. 편견을 성찰하고 공정함을 추구하는 태도는 호락논쟁에 대한 평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학문의 통이 크면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인다. 어느 한쪽에 얽매이는 편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 호론과 낙론은 모두 주자의 학설에 의거했다. 그런데 주자의 견해는 젊을 때와 늙었을 때가 다르고, 저술에도 서로 어긋나는 곳이 종종 있다. 논쟁은 이 차이에서 발단했는데 큰 사단으로 번진 것은 한결같이 이기는 데만 힘썼기 때문이다.” 홍대용 생전에 호락논쟁은 이미 타성에 젖었고 상대에 대한 비난이 난무하였다. 그 해결책은 편견과 이기심을 버리고 다양한 견해를 존중하는 데 있었다. 다양성에 대한 긍정이 없으면 논쟁은 고장난 레코드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향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자’는 말은 한문으로는 ‘공관병수’로 쓴다. 이 말만큼 그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표현은 없다.
청 융성 보며 지식인들 대혼란
노론 명문 홍대용, 집요한 물음
“큰 의심 없이 큰 깨달음 없다”
스승에 “노론 잘못” 바른 소리도
18세기 청 둘러보고 연행록 남겨
호락논쟁 속 근대 이성까지 접근
누가 중화이고 누가 오랑캐인가
낙론에 속한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주장했다. 만물의 평등을 가능성으로 열어놓은 이 논리는 그러나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그 벽은 ‘그렇다면 저 야수와 같은 오랑캐를 용납하자는 말인가?’ 하는 반박이었다. 낙론을 몰아붙인 호론의 무기 또한 이것이었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대자’를 들먹이는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견해를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법이다. 이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일부에서는 논쟁이 불러온 폐단을 지적하며 실(實)의 정신을 촉구하였다. 실에 대한 강조는 나름의 해법이었지만 논의의 초점을 우회로로 돌린 감이 없지 않았다. 정면승부는 적대자를 현실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지, 또 그들을 단죄하는 기준이 과연 공평한지를 검증하는 데 있었다. 이 문제를 고심했던 홍대용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준 계기는 연행(燕行)이었다. 1765년 겨울 홍대용은 숙부 홍억을 따라 청에 다녀왔다. 그의 연행 성과는 화려했다. 북경의 천주당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서양 선교사들과 서학, 과학 등을 장시간 논한 사건은 전무한 일이었다. 그뿐인가. 음악에 정통했던 그는 천주당의 파이프 오르간 원리를 즉석에서 파악하고 조선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차원이 달랐던 그의 연행 경험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에게도 전해졌고, 그가 쓴 연행록은 조선 3대 연행록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한문 연행록보다 더 많은 정보와 소감을 담은 장편의 한글 연행록(<을병연행록>)을 집필한 것은 정말로 탁월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는 후대의 관심에 의해 강조된 측면이 있다. 연행에서 홍대용이 가장 정열을 쏟았던 작업은 한인(漢人) 지식인을 만나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홍대용은 항주 선비 엄성(嚴誠), 육비(陸飛), 반정균(潘庭均)을 만났고 그들과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등 다양한 주제가 도마에 올랐는데 가끔 위험한 주제도 올랐다. 홍대용은 ‘청나라의 지배는 한족(漢族)의 재앙이 아닌가’, ‘명나라가 다시 일어설 기미는 없는가’, ‘오랑캐를 상징하는 변발을 하고 의복을 입으면 마음이 편한가’ 등을 물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청은 천명을 받았다’, ‘청에서 태어난 우리는 청에 충성을 바치는 게 도리이다’, ‘예악은 실용이 중요한데 청의 의복은 편리하다’ 등등. 대화를 나누며 홍대용은 청나라에서 태어난 저들의 처지를 점차 이해했다. 처지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불변한다고 여겼던 의리조차도 시간이나 상황 앞에서는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에 사로잡힌 조선의 인식이 아닌가.
절대 기준이 사라진 다양한 세계
홍대용이 중국 선비들과의 대화를 나눈 기록은 조선의 젊은 사대부 사이에 제법 퍼져나갔다. 저들을 인정하자는 홍대용의 주장은 당시의 국시였던 ‘청에 대한 복수’를 균열시키는 불온한 측면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보수적인 학자들이 공격에 나섰다. 선봉에 선 것은 호론의 대학자 김종후. 그의 동생이 정조 대 우의정을 지냈고 벽파를 이끌었던 유명한 김종수였다. 김종후는 홍대용이 ‘비린내 나고 더러운 원수의 나라’ 인사들과 만나 그들에 동조했다고 비판하였다. 변발을 강요한 청에 대해서는 역대의 오랑캐 왕조 중에서 가장 심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선배 김종후와의 논쟁에서 완강하게 저들의 처지를 옹호했다. 논쟁을 거치며 벼려진 홍대용의 사상은 만년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의산문답>으로 꽃을 피웠다. 걸작이란 칭호에 조금도 손색없는 이 책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허자(虛子)와 새로운 사유를 대표하는 실옹(實翁)의 문답이다. 허와 실의 대비가 이처럼 선명히 드러난 작품은 없었다. 그렇지만 독해는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이 책은 과학철학서로 알려져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실옹의 입을 빌려 지구설, 자전·공전설, 대기설, 우주무한설, 심지어 외계인의 존재까지 논했기 때문이다. 전반의 우주설 등은 후반을 위한 안배였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우주와 지구에 대한 사유는 결국 ‘절대적인 중심이나 기준은 없다’를 실증하는 장치였다. 책의 후반부는 이 정리가 인간, 사회, 역사, 조선에 적용되었다. 그러자 인간 중심주의, 유학의 절대성, 중화의 우월성 등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만큼 철저하게 ‘중심(인간/유학/중화)-주변(자연/이단/오랑캐)’을 해체한 논리는 지금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