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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쏙 뺀채 '정규직 양보' 강조..하향 평준화 가능성

소한마리-화절령- 2016. 6. 20. 23:23

최저임금 쏙 뺀채 '정규직 양보' 강조..하향 평준화 가능성

한겨레 | 입력 2016.06.20. 21:46 | 수정 2016.06.20. 22:36

[한겨레]새누리 대표연설 뜯어보니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0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고임금 노동자(대기업·공기업 정규직)가 자신의 ‘기득권’을 대폭 양보해야 한다는 이른바 ‘중향평준화론’을 주장했다. 이를 ‘사회적 대타협의 핵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 원내대표의 주장은 현재 한국 사회 ‘불평등’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해법으로 정규직의 ‘양보’만을 강조했을 뿐 ‘바닥’을 높이는 방안, 즉 저임금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 노동계와 전문가들은 정 원내대표의 ‘중향평준화론’은 실제로는 ‘하향평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0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뒤 유승민(오른쪽)·김무성(왼쪽) 의원과 김광림 정책위의장(뒷모습 보이는 이) 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0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뒤 유승민(오른쪽)·김무성(왼쪽) 의원과 김광림 정책위의장(뒷모습 보이는 이) 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불평등·분배 문제 전면 내세운건 진일보

정 원내대표는 이날 연설에서 새누리당의 기존 입장과 견줘서는 이례적으로 불평등과 분배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 성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분배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고, “한국은 미국과 함께 가장 불평등한 국가군에 속한다”고 현실을 인정했다. 이런 정 원내대표의 연설은 최근 서울 구의역 19살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의 사망사고,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의 대량 해고 사태 등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제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점점 악화해온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문제는 기간제법(비정규직보호법) 제정 등 정부 대책에도 전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제는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우려를 낳고 있는 상황이다.

저임금 해법 입닫고 파견확대 ‘노동4법’ 역설

정 원내대표가 이런 현실의 해법으로 내세운 것이 ‘중향평준화’다. 그동안 노동계나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이른바 ‘중향평준화’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기업 쪽이 가져가는 몫과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 사이를 조정해 후자를 키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노동자 내부에서도 상층과 하층의 격차를 줄이는 조정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수준 등을 일부 낮추고, 대신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의 처우 수준은 올리자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날 정 원내대표는 정규직 양보의 강조 외에 어떻게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의 몫을 늘릴지에 대한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중향평준화를 통해 격차를 해소하자는 문제의식은 일부 동의할 수 있다”며 “하지만 중향평준화를 하려면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 비정규직 노동자 축소,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바닥’을 높이려는 조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남신 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노동시장 격차를 해소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라며 “이에 반대하는 전경련이나 경총을 설득하는 것이 정치권과 정부의 임무인데, 이에 대해서 정 원내대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구나 이날 정 원내대표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은 ‘중향평준화’ 원칙에 입각해 진행되고 있다”며 정부의 ‘노동 4법’ 등 노동개혁 추진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노동 4법 중 특히 파견법의 경우 파견 허용 대상을 확대하자는 내용으로 비정규직 축소와는 정반대 방향이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파견법은 중향평준화보다는 비정규직 고착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재벌 대주주·경영진의 고배당·고임금엔 침묵

정 원내대표는 이날 상위 10%로 대기업의 오너, 경영진,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꼽았다. 하지만 정작 이어진 연설에서 ‘양보’가 필요하다고 지목받은 집단은 대기업·공기업 정규직뿐이었다. 재벌 오너·대주주가 누리는 부당한 특혜나 고배당, 대기업 경영진의 초고액 연봉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수십억원씩 연봉을 가져간다. ‘상위 10%의 양보’를 논의하려면 이들의 연봉에 대해서도 최고임금제 등으로 제한을 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소기업(하청기업) 저임금의 근본적인 이유로 꼽히는 대기업(원청기업)의 ‘단가 후려치기’ 등을 언급하지 않은 점도 한계로 꼽힌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많은 하청기업이 근로자 임금을 올려주고 싶어도 올려줄 수 없는 구조”라며 “재벌·대기업에 유리한 경제구조를 고치고 중소기업을 혁신하는 작업을 같이 하지 않으면, 자칫 위에서 끌어내리기만 해 하향평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신규고용 없이 비정규직만 확대해 20년 동안 재벌대기업은 엄청난 이익을 누렸다”며 “양극화 책임은 대기업·재벌과 이를 비호한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정규직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는 중향평준화가 원칙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정 원내대표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기업도 그동안 비정규직을 활용해 이익을 얻어왔다. 정규직 노조가 기득권을 포기하면 기업도 어떻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지 구체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규직조차 고용불안 내몰리는 현실 ‘모르쇠’

정 원내대표가 이날 선진국의 예를 들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서도 선후가 바뀌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 등 노사간 사회적 대타협을 한 나라들, 즉 노동과 기업 쪽이 모두 한발씩 양보해 일자리 창출을 이뤄낸 나라들은 튼튼한 사회안전망이 갖춰져 있어, 노동자 쪽에서 고용 유연화나 노동시간 단축, 임금 삭감 등을 받아들일 여지가 큰 나라들이었다.

정 원내대표는 또 “정규직이 과보호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비정규직보다 다소 나을 뿐 정규직 역시 명예퇴직 등으로 상시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과 괴리가 있다. 이병훈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고임금 정규직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한번 일자리를 잃어도 다시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실업 때 생계를 책임져주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등 인프라를 바꿔가면서 정규직에 양극화 해소에 동참하자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 박태우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