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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소한마리-화절령- 2016. 7. 22. 17:0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박 원 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노인들의 삶을 소재로 한 케이블 방송의 드라마 하나가 세대를 넘나들며 따듯하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남기고 얼마 전 끝났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한 세대를 풍미하고 있는 브라운관의 대스타들이 함께 출연하여 그것만으로도 화제가 된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제목의 드라마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평생을 언니·오빠, 형·동생하며 살아온 초등학교 동창들로 이루어진 육칠십대 노인들의 ‘지지고 볶는’ 일상을 줄기로 하고, 그 자식들의 일과 사랑을 곁가지로 삼은 내용이다.

정말 삶은 축복이며 감사일까?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은 그들이 살아온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갖가지다. 언젠가는 세계여행 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가부장제의 화신인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견디다가 어느 날 그것이 메아리 없는 자신만의 꿈임을 확인하고는 집을 나가 독립을 선언하는 문정아(나문희)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화해를 시도하는 그녀의 남편 김석균(신구), 깨끗하고도 여린 소녀 같은 삶을 살다가 치매에 걸려 좌절하는 정아의 죽마고우 조희자(김혜자), 젊어서는 남편의 바람으로 억장이 무너지고 나이 들어서는 친정가족과 마흔을 바라보는 과년한 딸 뒤치다꺼리로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는 짬뽕전문점 주인 장난희(고두심), 암 투병을 하면서도 우아한 여배우의 삶을 놓지 않는 난희의 동갑내기 친구 이영원(박원숙), 지지리도 못난 일가친척들을 돌보느라 결혼도 못하고 평생 돈 버는 일에 매달려 살면서도 언제나 쿨한 카페 여사장 오충남(윤여정), 상처하고 혼자가 된 후 첫사랑 희자에게 대시하다가 그녀가 치매에 걸리자 조심스럽게 돌봄의 손길을 내미는 ‘노땅’ 변호사 이성재(주현).

  이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여준 드라마에 젊은이들까지 호평을 쏟아내며 갈채를 보낸 이유는 한 마디로 가식이 없기 때문이다. 때론 꼰대스럽고 때론 철부지 같지만, 사회가 자신들에게 일괄적으로 덧씌우는 ‘노인’이라는 단색의 포장지를 걷어치우고 등장인물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준다. 그 나이에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두 주인공처럼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가 하면, 첫사랑과 재회로 가슴앓이하고 새로 사귄 ‘남친’ 때문에 마음이 설렌다.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정작 그 자식을 힘들게 하고, 당차게 살다가도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에 짜증을 내며, 함께한 시절에 대한 추억으로 같이 행복해하다가도 사이사이 불청객처럼 끼어있는 불편한 기억이 반추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가시를 돋운다.

  그러는 가운데 이들의 삶에서는 공통의 불안감 또한 읽힌다. 내가 제대로 살긴 살았던 걸까? 그냥 이렇게 살다 끝나면 그만인가? 내 삶이 의미가 있기는 한 건가? 굳이 말하자면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해당하는 이 물음은 극중에서 관찰자이자 나레이터 역할을 하는 난희의 딸 박완(고현정)의 입을 통해 이렇게 던져진다.

  누군가 그랬다. 우리는 살면서 세상에 잘한 일 보다는 잘못한 일이 더 많다고. 그러니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남는 장사이며 넘치는 축복이라고. 그러니 지나고 후회하지 말고 살아있는 이 순간을 감사하라고. 정말 삶은 축복이며 감사일까?

  ‘언젠가’에 머물러 있던 죽음이 어느새 손에 잡히는 거리에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시간을 살면서 자신의 삶은 축복이자 감사라고 말할 수 있는 ‘노인’은 몇이나 될까? 이것은 언필칭 입신양명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유한한 생명을 살면서 자신의 종말을 의식해야 하는 생물종이 굴레처럼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노인의 삶은 이 문제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러므로 노인이야말로 운명 앞에 선 단독자이다. 죽음은 ‘우리’가 아니라 결국 ‘나’의 존재가 소멸되는 사건임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여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인 문제의 본질, 제대로 물을 수 있어야

  노인들이 느끼는 이 단독자로서의 불안감을 사회적으로 완화시켜 줄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인정받음’이 아마 그 가운데 하나일 듯싶다. 자신의 지나온 인생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을 알 때, 다른 이의 삶에서 그것이 적어도 하나의 의미였음을 확인할 때, 그는 적어도 삶의 무의미성이 주는 불안감으로부터 얼마간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 관하여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노인의 경험이 젊은 세대로부터 인정받고 있는가? 나이든 세대의 지혜가 여전히 젊은이들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고 있는가?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 영화감독 코엔 형제가 2007년에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라는 영화가 있다. 마약상들이 서로 총격전을 벌이다 전멸한 현장에서 우연히 돈가방을 주워 도주하는 사내와 그를 쫓는 마약조직이 고용한 킬러 그리고 이 둘을 추적하는 보안관의 이야기이다. 보안관은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25살 때부터 그 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3대째 보안관을 지내고 있는 베테랑이다. 이런 경력에 걸맞게 그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범인들의 행적을 추적해나간다. 하지만 범인, 특히 킬러의 행동은 이 베테랑 보안관의 경험칙(經驗則)을 번번이 배반한다.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사람을 죽일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건이 돈가방을 챙긴 사내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자 그는 할아버지의 부관을 지냈던 자기보다 더 나이든 노인을 찾아가 차를 마시며 은퇴를 이야기한다. 상대하기 힘겨운 ‘강적’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농담같은 진담을 이유로 들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평생에 걸친 경험이 더 이상 지혜가 되지 못함을 이 늙은 보안관은 깨달은 것이다. 이 달관(?)의 과정을 진즉에 거쳤을 부관 노인이 무심히 받아 건네는 말 - “네가 옛날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그 시간에 더 많은 것들이 저 문밖으로 나가버린다”는 말은 등불은커녕 시대를 따라잡기에도 버거워하는 우리 시대 노인의 삶에 대한 메타포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이젠 없다. 노인문제에 대한 모든 접근들이 직시해야 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이듦의 마지막 훈장인 경험과 지혜마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강적’ 앞에서 무력하게 권위를 잃어가는 시대에 〈디마프〉의 ‘사랑스런 나의 친구들(Dear My Friends)’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다시 묻는다. 무엇이 노년의 삶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 노인 자살률 OECD 1위의 부끄러움을 달랑 기초연금이나 부모님 용돈으로 어찌해 볼 요량을 하는 우리가 정작 자문해야 하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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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원재

·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