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사실은 많은 지식인을 당혹하게 한 사건이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유태인 혐오감 등 다양한 설명이 있었지만, 나의 소박한 독서 경험으로 보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셰리 버먼(Sheri Berman)의
『정치가 우선한다』이다.
히틀러가 낮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집권한 까닭은?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터졌을 때 미국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받은 나라는 독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전쟁 배상금과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이던 독일경제는 미국의 차관과 수출에 의존해 간신히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월가의 주가가 폭락하자 미국 자본이 독일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수출의존 독일경제는 무너졌다. 대공황 절정기였던 1932년 미국의 실업률은 23.6%였는데, 독일의
실업률은 32.8%로 실업자가 무려 560만 명에 달했다.
대공황 시기에 독일 사민당은 집권당은 아니지만 제1당이었다.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등 중산층 이하 독일 시민이 기대할 수 있는 정당은 사민당이었다. 사민당의 현장 조직책들은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자 사민당 지도부에게 지금 당장 실업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보고를 지도부에 빗발치듯이 올렸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 특히
힐퍼딩(Hilferding, Rudolf, 1877~1941)은 일자리 창출과 재정확대를 요구한 노조의 제안에 대해 지금의 대공황은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공공사업으로 불황을 완화시키자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라며 반대했다. 사민당 지도부
회의에서 최고위원들은 한명만 제외하고 모두 힐퍼딩을 지지했다. 사민당은 경제위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총선을 치렀고, 결국 전쟁배상금 지불
거부, 고속도로 건설 등 공공투자와 군수산업 확대, 산업부흥을 위한 금융계와 노동계급의 책무와 같은 국가의 경제 통제를 강조한 히틀러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뉴딜 개혁의 비(非)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정치 동맹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공황을 극복했다. 미국과 독일의 차이는 대공황이라는 위기가 닥쳤을
때, 미국의 기성 정치권은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통해서 뉴딜이라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낸 반면, 독일의 기성 정치권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치스의 1930년 총선 득표율 18.3%는 독일 국민들의 나치스 지지가 독일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한 소극적
지지로 시작한 것이란 걸 보여준다. 18.3%의 지지로 득세한 히틀러가 시장 통제와 국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독일경제를 부흥시켰고 히틀러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공고해지면서 더 큰 비극이 독일과 전 유럽을 휘감은 것이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에도 불구하고 당선된 까닭은?
트럼프가 승리한 이유를 설명하는 걸 보면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이었던 쇠락한 공업지역(rust belt) 노동자들의 민주당 외면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와 트럼프가 미국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를 부채질해 승기를 잡았다는 두 가지다. 트럼프가 인종주의를 선거 전술로 활용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지만, 미국사회의 금기를 건드림으로써 미국사회 주류가 외면하는 손해도 봤다.
자유무역으로 애플, 구글 같은 동·서부
해안지역의 비교우위산업은 이익을 크게 얻었지만, 운 없이 러스트 벨트에 속한 미국 시민들은 구조조정의 비애를 겪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우아한 조정은 경제학 책의 은유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현실을 가장 분명하게 지적한
대선 후보는 트럼프와 샌더스였다. 샌더스가 경선과정에서 탈락하자 미국 노동자들 손에 남은 카드는 트럼프뿐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고학력 여성의
이슈인 유리천정 깨기라는 정치구호에 공감할 수 없었다. 샤이 트럼프는 인종주의 문제로 꺼림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무역의 잔혹성을 정면으로
비판한 트럼프를 찍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래를 말하다』로 번역한 폴 크루그먼의 『The Conscience of a
Liberal(리버럴의 양심)』은 양극화와 불평등을 악화시킨 신자유주의 시대를 종식시킬 제2의 뉴딜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담대한 희망”을
말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개혁 노력과 진정성은 인정받고 있지만, 성과는 초라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권위는 무너졌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은 아직 제시되지 못했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시킨 구체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민주당은 더
담대한 오바마, 21세기형 뉴딜 동맹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제2의 루스벨트를 후보로 내세워야 했다. 트럼프의 승리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외면한
민주당의 패배란 것이 이번 대선을 가장 잘 정리한 요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