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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다

소한마리-화절령- 2016. 11. 5. 00:57
민주주의,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다
박 원 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근래 헌법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국가권력을 위시한 공권력의 비상식적인 운용이 초래한 반작용이다. 주로 언급되거나 인용되는 부분은 국체(國體)를 명시한 헌법 제1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항)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2항)는 두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인 주권재민과 그에 따른 대의정치의 원칙을 천명한 내용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그런데 제1조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우리 헌법에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있다. ‘자유민주적’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우리가 선택한 민주주의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표현은 헌법 전문과 평화통일의 기조를 밝힌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에 차례로 등장한다. 이 두 곳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한민국의 기본 정치질서는 자유민주주의이고, 통일은 이 자유민주적 질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한마디로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다른 그 어떤 민주주의, 이를테면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선언이다.

   우리는 보통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한다. ‘자유’(특히 정치적 자유) 역시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주요한 파생적 가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이 말이 별도로 사용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개념적으로 의미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가 선택한 ‘민주주의’에 대해 좀 더 사려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언어사용의 일반적인 용례를 볼 때,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조합된 단어에서 의미상 비중은 피수식어가 아니라 수식어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근래 회자되고 있는 ‘비선 실세’의 경우 ‘실세’보다 ‘비선’ 즉 ‘정상적 의사결정 라인을 벗어나 있음’에 강조점이 있는 식이다. 이를 적용하면 자유민주주의에서도 방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에 놓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한 민주주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자유’라는 말의 의미와 역할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가리키는 것은 ‘자유주의(Liberalism)’에서 말하는 자유이다. 그러니까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곧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체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맨얼굴

   사람들은 어떤 이념을 받아들일 때 그 명칭의 사전적 의미를 그것이 지향하는 고유의 가치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그것이 역사 속에서 각색되거나 왜곡 또는 오용된 흔적들이 켜켜이 퇴적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이점은 그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누구이며, 또 어떤 맥락에서 주장하고 있는지를 짚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자유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자유’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전적 뜻만으로 그 의미 맥락이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자유는 일차적으로 흔히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불리는 서양 근대 시민계급의 자유를 가리킨다. 일련의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리거나 무력화시킨 시민계급이 반대급부로 어디에도 침해받지 않을 자신들의 배타적인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벌인 투쟁의 산물로 등장한 것이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유는 출발점에서부터 모든 사람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계급이라는 특정한 계층의 자유였다. 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인 1인1표 보통선거가 서양에서조차 전면적으로 시행된 것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심지어는 2차 대전 이후에서 와서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유주의자들의 눈에 민주주의는 늘 불순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다수결 혹은 민의(民意)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위험을 지닌 제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이후 민주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추세였다. 특히 신생국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 제도가 앞으로 어떻게 가지를 뻗어 무성해질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자신들의 호오와 관계없이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자유주의자들은 차선책을 택한다. 민주주의와 손을 잡되, 그것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용시키는 방법이다. 곧 대의민주주의의 불가피성에 대한 강조이다.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이유로 보통 국가조직의 비대화와 교통, 통신 등 제반 사회기반시설의 미비를 든다. 그리고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말미암는다는 ‘비효율성’도 전가의 보도처럼 단골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런 요인도 없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더 은밀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민주주의는 곧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무식한’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방어 노력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이런 고민을 해결해준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정치적 의사를 대표하는 이른바 민의의 대변인들은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신들 속에서 나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마치 민주주의의 알파요 오메가인 양 선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모든 국민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것은 선거를 통해 뽑힌 대표들에게 맡기고, 나머지 사람은 그들을 뽑는 절차의 공정성에만 관심을 쏟으면 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정치’가 개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성숙해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민주주의의 본래 모습인 참여민주주의의 취지는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주권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당’이라는 업체가 ‘선거판’이라는 슈퍼마켓에 주기적으로 공급하는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

적어도 현명한 소비자라도 되어야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나마 이것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비자인 주권자는 상품의 설명서나 제원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나 해당 상품의 광고모델과 같은 부차적 부분에 현혹되어 구매를 결정한다. 상품 자체의 사용가치, 한 걸음 더 양보하여 교환가치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런 풍토 속에서 제대로 된 상품이 구매될 리 만무하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부딪치고 있는 집단적인 자괴감과 상실감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금, 예전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의 제목처럼,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었다. 상인들의 모리배 풍토도 문제지만, 그들의 농간에 춤을 추는 현명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그것을 더 조장하고 있음을 불편하더라도 인정해야 한다. 상품설명서의 깨알 글씨는 물론이고 상인들의 창고 구석구석까지 카메라를 들이대는 〈소비자 리포트〉의 존재가 절실한 때다. 불량상품을 배송받고 할 수 있는 게, 할 줄 아는 게 분노밖에 없어서는 상인들의 상술에 놀아나는 일이 되풀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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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원재

·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