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에 대한 소고 |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병영에서도 가족의 제삿날에는 공무를 쉬고 그리움에 젖곤 했다.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앉았으니 그리워서 마음을 달랠 길 없다.(11.15)”, “둘째 형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1.23)”, “맏형님의 제삿날이라 공부를 보지 않았다.(1.24)” 그는 또 왕이나 왕비를 기리는 나라 제삿날에도 공무를 보지 않았는데, 공식적인 휴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관리에게 식가(式暇)라는 휴가를 주어 조상과 형제자매 등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조상 제사에 담긴 뜻 올해 추석 명절은 연휴가 열흘이나 되어 제사보다는 휴가에 열중하는 모양이다. 같은 자손이지만 제사의 임무를 띤 부류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집마다 제사로 인한 고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흩어져 사는 자손들의 제사 참여 문제, 제수 비용의 문제, 제사 수를 조절하는 문제 등을 놓고 시대 상황과 타협을 모색하는 눈치들이다. 사안이 복잡할수록 근본으로 돌아가 제사의 의미를 묻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 제사, 교감과 대화의 시간 조상 제사는 장남이 지내야 한다는 원칙도 특정 사상의 산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외손봉사나 윤회봉사가 역사 속의 한 시기에는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16세기를 무대로 한 이문건의 일기에는 “어머니의 기일이다. 제사는 누님 댁 차례다.(1545.1.5)”라고 하고, “어머니의 기일이라 당(堂)에서 혼자 제사를 지냈다.(1567.1.5)”고 한다. 또 그의 집안은 외조모의 기일도 친손과 외손이 돌아가며 지냈다.
이문건은 장모의 기일도 꼬박꼬박 챙겼는데, 다른 집 차례일 때는 재계(齋戒)와 소식(素食)으로 임하고, 아내의 차례가 되자 자신이 직접 차려 지냈다. 또 “증조부의 기일이나 제사가 어느 곳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어 소식(素食)만 했다.(1546.1.29)”고 한다. 어느 해에는 아버지의 기일 제사를 지낸 후 다시 큰 누님과 큰 형님의 신위(神位)에 국수·떡·술을 올렸다. 아버지의 제삿날에 그 죽은 자녀들을 한 자리에 초대한 것일까.
“조상은 이성(異姓)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비판한 김육(金堉)은 수천 개의 가지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예로 든다. 그는 “아들의 아들은 동성의 손자가 되고 같은 성을 가진 딸의 아들은 성이 다르더라도 역시 손자이다. 딸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아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어찌 다르겠는가?” 라고 묻는다. 외손봉사와 윤회봉사를 금지하자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죽은 형의 애달픈 마음을 위로하고, 형을 향해 자신을 다짐하는 것이다. 제사는 죽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매체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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