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특집 사각지대에 놓인 경찰관] 6450일의 시련과 단련

소한마리-화절령- 2018. 4. 3. 22:34

[특집 사각지대에 놓인 경찰관] 6450일의 시련과 단련

|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 2018.04.03. 11:20  

용의자 쫓다 사고로 오른쪽 다리 크게 다쳐.. 18년 투병 김형경 경사의 인생 2라운드

[주간동아]

18년 전 오토바이로 용의자를 쫓다 큰 부상을 입고 10차례 수술을 했던 김형경 경사. 은평 u-도시통합관제센터에서 제2의 경찰인생을 살고 있다. [사진 제공·서울서부경찰서]
서울 은평구청에 있는 U-도시통합관제센터(은평 관제센터). 경찰관 1명과 모니터 요원 3명이 관내 폐쇄회로(CC)TV 화면이 실시간으로 비치는 모니터 16대를 통해 은평구 거리 곳곳을 살핀다. 한 사람에 4대씩이다. 연결된 CCTV는 한 사람에 450여 대에 이른다. 범죄 단속 그물망이라 할 수 있는 CCTV 모니터 시스템을 통해 지난해에만 절도범죄 260건을 적발했다. 절도뿐 아니라 강도, 살인 등 강력범죄의 단서나 정보를 제공하고 경우에 따라 수사에도 참여한다. 

은평 관제센터는 4조 2교대로 근무한다. 1개 조는 경찰관 1명과 민간인 3명으로 편성돼 있다. 은평경찰서와 서부경찰서에서 각각 2명씩 파견된 경찰관 4명이 각 조 팀장이다. 은평 관제센터는 지난해 절도 이상 강력범 검거 실적에서 서울지방경찰청 관할 25개 관제센터 가운데 상반기 3위, 하반기 1위를 차지했다. 

김형경(49) 경사가 이곳에 온 지는 8년째. 2010년 은평 관제센터가 설립되면서 파견된 이래 줄곧 근무해왔다. 그는 지체장애 4급 판정을 받은 공상(公傷) 경찰관이다. 2000년 사고를 당한 이후 18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한 그는 걸을 때마다 절룩거린다. 오금 주변의 근육과 동맥, 신경이 다 제거된 상태다. 오른쪽 신발은 신을 수 없다. 걷기도 힘든 판이니 운동은 거의 못 한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스포츠광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절망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0회 수술, 3개월 입원, 자살 시도…

그가 사고를 당한 것은 2000년 7월 25일 오후 1시. 경찰관이 된 지 1년 2개월이 됐을 무렵이다. 서울 서대문경찰서 홍은3파출소 소속 김형경 순경은 오토바이로 순찰을 돌다 수상한 청년을 발견했다. 안전모도 안 쓴 채 오토바이를 몰던 장발 청년이 김 순경을 보고 급히 달아났다. 범죄 혐의자라고 판단한 그는 청년의 오토바이를 뒤쫓았다. 

맨홀을 지나는 순간 오토바이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담벼락에 충돌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극한 고통이 전류처럼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오토바이 뒷좌석 발판에 붙은 뾰족한 쇠파이프가 오른쪽 다리 무릎 주변을 깊숙이 찌른 것이다. 피가 콸콸 쏟아졌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그는 소속 파출소에 연락하고 119에 신고했다. 그러고는 혼절했다. 

"뇌가 싸늘해지고 몸에 있는 온기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달려온 동료의 말이, 피가 얼마나 쏟아졌던지 핏물이 100m가량 흘렀다고 하더라고요."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키 184cm의 만능스포츠맨은 처참하게 널브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최초 진료를 맡은 인근 병원에서 26차례 수혈을 했다. 오금 부위에 심한 염증이 생기고 무릎 아래로 괴사(壞死)가 발생했다. 감당할 수 없는 통증에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병원 측에서는 다리를 자르면 통증을 줄일 수 있다고 했으나 그가 반대해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다. 자정 무렵 시작한 수술은 오전 9시 반에 끝났다. 끊어진 대동맥을 잇고 고인 피를 빼내고 곳곳을 째고 봉합했다. 

그는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하루 7~8회 진통제 주사를 맞았으나 통증은 성난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한 달 반 동안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다. 몸무게가 25kg이나 줄었다. 퇴원 후에도 추가로 수술을 할 때면 한 달씩 다시 입원해야 했다. 수술 횟수가 10차례나 됐다. 통증에 잠을 설치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도 아파 소리를 지르며 깨는 일이 되풀이됐다. 한동안 그는 술에 의존했다.

사소한 것의 소중함 재발견

사고로 18년째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한 김형경 경사는 “흉측하다”며 상흔의 일부만 보여줬다. [조성식 기자]
그의 집은 홍은동 산동네였다. 3000만 원가량의 병원 진료비가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을 철근더미처럼 짓눌렀다. 공상으로 인정돼 치료비를 지원받고 동료 직원들이 성금도 보탰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빚을 내 나머지 치료비를 댔다. 아내가 맞벌이에 나섰다. 그는 아들, 딸을 연년생으로 뒀는데 사고 당시 두 살, 한 살이었다. 

태권도 유단자에 농구, 축구를 즐기던 스포츠맨.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활동적 성격이었기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육군 전차 조종수로 군복무를 마치고 경찰이 되기 전까지 수영강사를 하기도 했다. 육체가 무너지니 정신도 무너졌다. 

"운동을 그토록 좋아하던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다시는 서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좌절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 파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더군요." 

어느 날 집에 혼자 있을 때 목을 맸다. 하지만 큰 키가 방해가 됐다. 몸이 축 처지면서 발끝이 바닥에 닿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내의 위로와 동료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1년 4개월 후 복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통증이 완화되고 마음도 안정을 찾아갔다. 관제센터 업무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을 안겼다. 사고를 겪지 않았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자리지만, 삶의 철학이 바뀐 그에게는 매우 뜻있는 보직으로 다가왔다. 

"지역주민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일이라 뿌듯합니다. 사실 복직 이후 피해 의식 때문에 힘들었어요. 몸이 불편하니 동료들에게 내 업무를 전가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여기 와 실적을 내면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주변의 좋은 평가에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도 부각되고요. 동료와 가족에 대한 죄의식을 덜 수 있었죠." 

그는 "민간요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경찰관 못지않게 열심히 한다"며 모니터 요원들에게 공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올해 업무 목표는 검거 실적 1위를 고수하는 것이다. 퇴직 전까지 '베스트 관제센터'를 운영하겠다는 장기 목표도 세웠다. 

그는 요즘 아내의 권유로 피트니스클럽에 다닌다. 다른 운동은 못하고 러닝머신에 올라 조심스레 걷기를 한다. 사고는 사람을 더 강하게 단련하는 걸까. 그는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다"고 말했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던 내가 신문과 책을 읽게 됐습니다. 또 전에는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소한 일이 이제는 즉각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했어요. 행복이 뭔지도 알겠고요."

|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