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반영웅의 정치

소한마리-화절령- 2018. 4. 10. 10:57
반(反)영웅의 정치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에디스 해밀턴의 『신화』가 취합한 영웅들 중 단연 우뚝한 인물은 아테네 왕 테세우스다. 가령 헤라클레스가 종종 충동적이고 쉽게 감상에 젖기도 한 반면, 테세우스는 전사의 용맹성에다 지적인 신중함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함께 지녔던 영웅이었다. 그는 신들에 농락되거나 스스로의 성정을 못 이겨 이모저모의 비극을 겪었던 여타 영웅들과 달랐으니, 많은 경우 그의 분노는, 트로이 장군 헥토르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 불의(不義) 전반을 향했다. 테세우스의 인간적 면모와 식견은 테베 왕 크레온이 아르고스 다섯 적장의 장례를 거부했을 때, 제3자였던 그를 찾아온 크레온의 전령에게 했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자네가 아테네의 주인을 찾아 나를 보러왔다면, 번지수가 틀렸네. 자네는 테베가 시류에 요동하는 무지한 군중 아닌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된다는 것을 자랑하네만, 아테네는 시민이 주인인 자유의 도시일세. 여기선 누구나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하며 함께 법을 만들고 모두가 그 법에 구속된다네. 독재자보다 국가에 더 해악적인 적(敵)은 없는 법일세. 그러니 크레온에게 전하게. 흙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으며 단지 죽은 자를 땅에 묻어 하늘의 정의를 실현하려 할 뿐이라고.”(에우리피데스, 「탄원하는 여인들」, 축약의역)

   먼 훗날, 정치적 보수주의자 토머스 칼라일이 “인류역사는 그 근본에서 영웅들의 전기”라고 말했을 때(『영웅들과 영웅숭배에 관하여』), 그가 여러 분야를 두루 살펴 선정한 10여 명의 영웅들은 어쩌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류사에 긴 족적을 남긴 테세우스들이었다.

영웅의 시대는 갔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신들의 간섭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들의 부단한 개입이 없었다면 애초에 영웅으로 탄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쩌면 신이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은 인간이 마음대로-오욕칠정에 따라-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 텐데, 문제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개인의 행위는 당사자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히 국민의 이름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의 선택이 미치는 파장은 넓고도 깊다. 어린아이의 손에 망치를 쥐어주면 모든 것을 못으로 보며 달려들듯이, 본래 인간이란 인식과 윤리 모두에서 불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현명한 지도자는 가능하면 선한 구조를 만들어 자신을 그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스스로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지레 경계하고 견제한다. 영웅사관은 역사를 우연에 맡기자는 것이지만, 사람은 오고가되 구조는 남는 것, 인류가 토구(討究)해온 그 선한 장치의 하나가 민주주의일 터이다. 정치선진국이란 사람이 주체적으로-즉 민주주의라는 장치를 통해-역사에 관여해서 우연에 따른 재앙의 가능성을 될수록 줄여온 나라일 것이다.

   당연히 민주주의가 불완전할수록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며, 포퓰리즘의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 다수를 동원해 자행하는 횡포가 여기서 멀지 않음은 자명하다. 17세기 중엽 왕권신수설을 고집하며 왕정복고를 외쳤던 로버트 필머(Sir Robert Filmer, 1598~1653)는 “다수의 폭정에 비견할 폭정은 없다”고 단언했지만, 훗날 자유주의자로서 국가개입의 정당성을 주창했던 민주주의 대 이론가 존 S. 밀 또한 다수의 압제를 누구보다도 경계했다.

   특히 밀은 다수를 업은 정권의 횡포 못지않게 여론이 가하는 강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는데, 그에 따르면, 사고와 비판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선이야말로 진리를 박해하는 큰 요인이다. 침묵을 강요당한 소수의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은 상존하며, 적어도 진리의 일부를 포함하거나 다수의 의견을 보완할 수 있고, 다수가 옳을 때라도 토론과 비판을 거치면서 다수의견의 정당성은 더 강화되리라는 혜안이다. 정치가 SNS의 준동과 공격적 팬덤 뒤에 숨어 일상적으로 진영논리를 부추긴다면, 정권의 시작은 창대해 보일지 모르나 그사이에 정치문화는 뭉텅뭉텅 퇴행할 것이다.

지루한 합의를 택하라

   운동은 날것 그대로 정치에 심어지는 것이 아니며, 촛불정신이 아무리 숭고해도 그것이 구체적인 정치의제에 포섭되는 과정은 복잡하고도 지난하다. 더욱이 정권의 명운을 가른 촛불이라면 정치적 이해관계와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될 터인데, 개혁을 도모하되 촛불을 전가의 보도로 앞세울수록, 쟁점들을 둘러싼 갈등은 진영논리의 양상을 더해 갈 것이 뻔한 노릇이다.

   민주주의 시대는 더 이상 영웅을 요구하지 않거니와, 성숙한 지도자는 자신을 소멸시켜 자청하여 견제의 틀 속에 가두는 법이다. 독단이 만든 선한 체제보다는 지루한 합의를 거친 다소 미진한 개혁이 오히려 낫다. 오만과 견강부회의 악순환은 반민주적 관행을 고착시키되, 합의를 이끌어내는 고된 과정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다. 테세우스가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이 된 것은 먼저 스스로 반(反)영웅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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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고세훈
· 고려대 명예교수

· 저서
〈조지 오웰: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한길사, 2012)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집문당, 2011)
〈복지국가의 이해:이론과 사례〉(고려대 출판, 2000)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2009)
〈국가와 복지〉 (아연출판사, 2003)
〈영국노동당사〉 (나남, 1999)

· 역서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2015)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후마니타스, 2009)
〈페이비언 사회주의〉 (아카넷,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