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도 차거니와 인심도 어나보다 격장천리 소식이야 알듯말듯 하다마는 밤마다 잠못이루는 내 가슴이 아파라 인권변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병린(1911~1986) 변호사가 지은 ‘양심수’라는 제목의 시조다. 높은 담장으로 하여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양심수를 걱정하는 인권변호사의 애틋한 마음이 아련하다.
인권변호사라고 하면 군사독재시절, 권력의 정치적인 인권 탄압에 맞서 양심수와 정치범에 대한 적극적인 법률구조 활동을 벌인 일단의 변호사들을 가리킨다. 인권사건의 수임은 그 자체로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른다. 정보정치의 작동에 의해 돈 되는 사건의 수임이 줄기 때문에 생활상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정보기관에 의해 협박과 공갈, 도청과 미행, 연금과 연행, 나아가서는 구속까지도 당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인권사건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변호사로서는 용기 있는 결단이요 투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권변론 한 시대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유신정권은 이른바 민청학련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 당시로써는 해방 이후 최대라 할 수 있는 1,204명을 연행, 180여 명을 구속기소했다. 구속된 학생들의 가족들이 변호사 선임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맡아주는 변호사들이 없었다. 당시 황인철(1940~1993) 변호사 사무실에 사법연수원생으로 실무수습차 와 있던 이우근으로부터 유인태와 이철의 변론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는 하소연을 듣고, 황 변호사가 동기 변호사들에게 호소하여 임광규, 홍성우 변호사와 함께 이 사건 변론을 맡기 시작한 것이 ‘인권변론 한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75년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재구속되었을 때 이돈명(1923~2011) 변호사가, 명동성당 학생시위 기도 사건에 조준희(1938~2015)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의 ‘인권변론 4인방’이 형성되었다. 상호 간에 역할분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돈명 변호사는 연치가 높아 맏형 노릇을 하면서 가장 민감한 부분의 변론을 자청해서 맡았고, 조준희 변호사는 변론이 감정에 흐르는 것을 막는 그 중앙의 위치를, 황인철 변호사는 대외협력과 기록관리 등 총무의 역할을, 홍성우 변호사는 변론의 방향을 잡아 나가는 일을 각각 알아서 맡았다. 법정 안팎에서 호흡이 아주 잘 맞아서 1980년대에 정법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생기기 전까지 이들이 인권변론이라는 무거운 시대적 소명을 온몸으로 떠맡아졌던 것이다.
인권변론과 관련한 애환도 많았다. 이돈명 변호사가 이부영을 당신 집에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는 법조사상 최대규모인 289명의 변호인단이 꾸려졌다. 가톨릭농민회원이었던 오원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앞에서 쓴 그 자신의 양심선언을 법정에서 뒤집자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간에서 황인철 변호사는 바닥에 퍼질러 앉아 펑펑 울었다. 조준희 변호사가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부당해고 무효확인 소송’의 증인신문에서 선우휘와 김윤환을 그 날카롭고 정연한 논리로 몰아세워 쩔쩔매게 만들었던 장면은 한 편의 드라마로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홍성우 변호사의 쾌유를 빌며 『신동아』1975년 1월호에 ‘법정의 애국가’라는 제목의 홍성우 변호사의 글이 실렸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1974년 9월 28일, 국방부 내 비상고등 군법회의 법정에서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20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군법회의 심판부가 입정하여 재판장이 개정선언을 하자 기립해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비장한 음성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며 애국가를 봉창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의 애국가 봉창이 시작되자 돌연 해괴한 사건이 벌어졌다.
옆에서 계호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아우성을 치며 손으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기 시작한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는 학생들과 그 입을 틀어막는 교도관들의 손과 닥치라는 아우성… 손으로 막고 밀치고 소리치는 통에 법정은 수라장이 되고 막는 손을 피해가며 학생들이 애국가를 계속하자 재판장은 학생들 전원을 퇴정시킬 것을 명령했고, 그 뒤 정작 재판을 받아야 할 학생들은 모두 퇴정당하고, 방청하던 학생 가족들과 신문기자들마저 모두 퇴정당한 가운데, 휑하니 빈 법정에서 7인의 심판관과 2인의 헌병, 군법회의 직원이거나 수사기관원인 듯한 방청인 10여 명과 그리고 피고인인 학생들 대신 변호인 필자 한 사람만 변호인석에 덩그러니 앉혀 놓은 채 모두 합산한다면 도합 백수십년은 됨직한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 어떤 학생이었던가 법정의 최후진술에서 ‘이 부조리하고 불의가 판치는 사회에는 나의 설 땅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 감옥에 들어와 있는 것이 행복합니다”하며 말문을 맺지 못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그 법정에 섰던 학생들을 포함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모여 얼마 전 홍성우 변호사를 찾아 병문안을 갔다. 간곡한 병문안이 끝나고 인근의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옆에는 그 병원의 간호사들이 따로 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을 알아본 간호사들이 합석, 병중의 홍 변호사 얘기를 나누었다. 그 뒤 이들 간호사들의 홍 변호사에 대한 따뜻한 문안인사와 정성을 다한 간호가 홍성우 변호사와 그 가족들에게 아주 큰 위안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발 홍성우 변호사가 하루속히 쾌유하기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