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려(伉儷) |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번부인(樊夫人)과 유강(劉綱)은 부부 신선으로 자연재해를 물리치는 도술로 백성들에게 해마다 풍년을 안겨주었다. 한가할 때면 부부는 도술을 겨루는 시합을 하는데, 매번 아내 번씨가 이기는 것이다. 남편이 접시에 침을 뱉어 잉어를 만들면 아내는 침을 뱉어 수달을 만들어 잉어를 먹어버리는 식이다.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대적하면서 짝을 이루는 이런 유형의 부부를 항려(伉儷)라고 하는데, 고대 문헌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대적함 또는 대등함의 뜻을 가진 한자 항(伉)과 짝을 뜻하는 려(儷)가 결합한 용어 항려를 주석가들은 ‘대립과 통일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 했다. 항려는 여필종부니 삼종지도니 하는 일방향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 서로의 의미가 되는 쌍방향의 관계다. 맞수가 되어 함께 노는 부부 16세기 조선의 부부 미암과 덕봉도 경쟁과 협동을 반복하며 자신을 이루고 상대를 이루도록 하는 그런 사이였다. 담양의 송덕봉(1521~1578)과 해남의 유미암(1513~1577)은 1536년(중종 31)에 혼인하여 40여 년을 부부로 살았는데, 함께 지낸 날보다 떨어져 보낸 세월이 더 길었다.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된 남편의 20년 유배 생활로 그랬고, 해배 후의 10여 년도 담양과 서울로 떨어져 지낸 날이 많았다. 떨어져 살 때는 편지나 시문(詩文)으로 서로의 일상과 감정을 나누었고, 함께 지낼 때는 지난 밤 꿈 이야기와 장기(將棋)로 하루를 시작했다.
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나 맛난 것을 먹으니 얼마나 즐거우냐며 서로 축하하기란 쉬운 듯하지만 사실 그 실천은 쉽지가 않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표현에 소홀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다. 한편 그들은 시(詩)를 주고받거나 장기를 두면서 힘을 겨루곤 한다. “부인은 백인걸 공이 장기 둘 때 궁(宮)을 먼저 단속한다는 말을 전해 듣더니 바로 실행했다. 이때 나는 차(車)를 먼저 떼고 두었으나 이기지 못해 포(包)만 떼었다.” 미암을 이기려는 덕봉의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일상의 행복을 함께 나누는 부부 송덕봉은 박하게 베풀면서 두텁게 바라지는 않지만 합당한 요구는 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화가 잔뜩 난 덕봉이 남편에게 착석문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띄운다. 함께 보낸 시에서 “화락함이 세상에 둘도 없다 자랑치만 말고 나를 생각해 꼭 착석문을 읽어보라”고 한다. 친정아버지의 묘에 비석을 세우는데 남의 일 보듯 하는 남편의 행위를 따지는 내용이다. 그녀는 비석을 세워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해 홀로 근심하며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하나같이 곤궁하여 생계마저 어려운 다른 오누이들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친정 형제끼리 알아서 하라는 남편의 말에 분통을 터트렸다. 따지는 김에 덕봉은 내 아버지 상(喪)에 사위로서 상주 노릇 제대로 했냐, 나는 시어머니 장사와 제사에 유배 중인 당신 몫까지 마음과 힘을 다해 모신 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겨우 사오십 말의 쌀이면 족할 것을, “이래서야 지음(知音)으로 평생을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요?” 서운함에서 시작된 글은 거의 협박조로 치닫는다. 이 부부가 사는 법을 미루어 보건대, 아내 덕봉의 소원은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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