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현대정치사 2. 박정희 독재 시기의 부천 지역 정치①
사회갈등과 정치
어떤 사회나 집단이든 갈등이 없는 곳은 없다. 갈등의 종류와 규모,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해당 사회 또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구체적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이거나 가치와 의견의 차이를 놓고 다투거나 간에 갈등이 없는 집단은 상상할 수 없다. 갈등을 해결하거나 해소하기 위해 정치와 권력이 작동하도록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 즉 구체적 이익이나 이해관계나 가치와 의견 차이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보고 접근하는가에 따라 정치 권력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과거 사회과학이 발달하기 전, 나라의 주권이 왕 한 사람에게 있다고 여겨지던 시대에는 왕을 제외한 나머지 신민(臣民)들은 모두 왕의 명령에 오로지 복종하는 것이 선이고 이에 따르지 않거나 저항하는 것은 악이거나 죄라고 보았다. 주어진 질서에 반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죄악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갈등은 나쁜 것이고 사회의 질서를 헤치는 죄라고 인식되었다. 그에 비해 근대 시민혁명 이후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놓고 토론하고 다투는 것이 사회가 발달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갈등은 그 자체로 악이거나 잘못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를 사회발전의 요소, 또는 동력으로 보는 관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4.19 민주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민주당 정부가 채 1년도 못가 박정희 일당의 군사 쿠테타로 무너지고 2년 반 동안 군사반란 정권이 헌정을 파괴하고 국정을 휘둘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민주 정부를 붕괴시킨 박정희 일당의 명분은 과도한 민주주의로 데모가 창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져 존립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갈등을 악이나 죄로 보는 관점을 가진 이들이 권력을 찬탈한 것이다.
오랜 왕정과 식민지, 그리고 독재정권의 탄압에 싸우던 이 나라가 수많은 난관을 뚫고 맞이한 민주 정부 아래 비로소 마음 놓고 온갖 의견, 사상이 꽃피는 시대를 열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1960년 4월부터 1961년 5월까지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박정희 일당은 이전부터 군사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60년 8월 장면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 아래 부당하게 탄압당한 노동운동과 평화통일 운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열망이 분출되었다. 독재정권의 억압으로 국민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을 정상이라고 본 기득권 세력과 제국주의 일본군의 억압적 질서가 내면화된 일부 정치군인들의 정신세계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사태 전개였을 것이다. 박정희 일당은 장면 정부 출범 3개월만인 11월 무렵부터 쿠데타 모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쿠데타를 결행할 만한 세력을 채 결집하지 못했고, 시기적으로 쿠데타 후 민심을 현혹하기 어렵다고 보아 실행하지 못했다.
식민사관과 당파싸움
그러다 61년 봄이 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남북 평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되었다. 교원노조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발걸음이 활발해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집권당이 된 민주당이 당내 주도권 다툼 끝에 당이 갈리게 되었다.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신파(新派)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과 유진산을 중심으로 한 구파(舊派)가 신민당(新民黨)을 만들어 분당한 것이다. 이 또한 낡은 관점으로 보면 당파싸움을 연상케 하는 권력다툼으로 사회적 혼란일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사색당쟁(四色黨爭) 혹은 당파싸움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일제가 남긴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지만 이 점은 추후 다른 기회에 논의하기 하고 여기서는 일단 생략한다.
정치적 이해와 가치가 다른 집단이 당파를 달리하여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다투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폭력으로 다투는 것이 아닌 한, 헌법과 법률이 금하지 않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말과 글로 다투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치르는 비용인 것이다. 이것을 반민주적인 일제 식민지 군대에서 배우고 익힌 사고방식으로 재단하여 총칼로 짓밟아 헌정질서를 무단으로 파괴한 것이 바로 박정희 일당의 5.16 군사쿠데타인 것이다.
비상계엄과 헌정중단
박정희 일당의 쿠데타는 법적으로는 비상계엄령의 형태를 띠고 있다. 비상계엄은 정상적인 행정 사법체계로는 나라와 사회가 처한 위기를 대처하기 어려울 때에 응급처방의 성격을 띠는 ‘비상(非常)한’ 상황에 취하는 예외적인 조치이다. 우리가 잘 아는 제1차대전 이후 독일 왕정이 무너지고 세운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규정한 긴급조치가 있다. 1918년부터 히틀러가 집권하고 이른바 수권법(授權法), 또는 전권위임법(全權委任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질 때까지 15년 동안 무려 250여 차례나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다. 이때의 긴급조치, 비상조치는 정부가 국회의 법률 제정을 기다리지 않고 법률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으로 정치적 위기만 아니라 경제적 위기 등 일견 사소해 보이는 사태까지 임시방편의 땜질식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 자체로 국회의 입법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으로 극히 비정상적인 행위이고 이러한 비상조치 남발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약화시켜 히틀러의 등장을 초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이때의 비상조치는 국회의 권한을 사실상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국회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제한하지는 않았다. 이는 유럽 주요 국가의 비상조치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도 남북전쟁을 수행한 링컨 대통령이 가장 많은 비상대권을 발동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고 이 때문에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 경우도 국회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비상조치가 남용되고 있었을 뿐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점은 우리나라의 비상계엄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국적 규모의 비상계엄이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6.25 동란이 발생한 때이다.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정부와 국회가 부산에서 활동을 개시한 ‘진짜’ 비상사태였다. 독재의 원조 이승만은 실제 비상상황인 전쟁 중에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면서 당연하게 국회의 활동 정지는 상정(想定)도 하지 않았다. 전쟁 중인 1952년 자신의 재집권을 위한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즉 발췌개헌을 통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친위쿠데타 상황에서 야당 국회의원을 공산당으로 몰아 체포를 시도하는 등 폭력을 일삼고자 부산과 경남 일대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도 국회의 활동 정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비상계엄, 비상조치의 원래 기능이 국회를 우회(迂廻)하는 ‘예외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와 의미를 지닌 비상조치의 규범을 무시하고 박정희가 저지른 국회 해산과 정치활동을 금지한 반헌법적인 계엄 포고령이 오늘날 마치 ‘정상적’인 계엄령의 모범인 것처럼 회자(膾炙)되는 것은 무지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일당은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이를 근거로 무소불위의 3권을 장악하고 행사하였는데 이는 왕조 시대에도 보기 드문 권력 집중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공산당이 설치한 소련의 입법과 행정을 총괄하는 ‘노병 소비에트’, 즉 ‘노병평의회(勞兵評議會)’ 외에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과잉대표와 대의 민주정치
박정희 일당의 군사쿠데타는 멀리는 갑오농민전쟁, 가깝게는 3.1독립투쟁과 4.19민주혁명의 기나긴 고난의 투쟁 끝에 이 나라 시민들이 막 탄생시킨 실질적인 민주정치와 지방자치의 싹을 짓밟은 사태였다. 이승만 정권이 비록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긴 했으나 6.25 동란 중에도 중단시키지 않은 지방자치가 4.19 민주혁명으로 다시 꽃피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군사정권의 포고령은 민의원과 참의원 등 국회 양원과 모든 선출직 지방정치를 말살하였다. 이후의 한국 정치는 대의제를 혐오하고 억제하려는 군사적 사고에 젖은 박정희가 주도하는 정치체제를 채택하여 국회의 규모와 권능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1948년 제헌국회 당시 인구는 2천만이었고 국회 의석은 200석이었다. 인구의 증가와 국민의 정치 참여가 높아지는 추세와 함께 의석수도 조금씩 증가하여 1961년 8월 총선거에서는 민의원 233석, 참의원 58석으로 모두 291석을 선출하였다. 그런데 2년 7개월간의 군정 끝에 실시된 1963년 12월 17일 6대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146석, 전국구 30석으로 총 176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6.25 동란을 겪고도 인구가 2천5백만 명으로 증가하고 시민들의 정치 참여 욕구도 크게 증폭된 시기에 국회를 약화시키고 시민사회 형성을 막기 위해 의석을 대폭 감축한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 각급 의회가 갈등조정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의 하나로 과잉대표를 꼽는다. 늘어나는 복지 수요 등으로 행정부의 권한과 재정은 비대해지고 그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 참여 욕구도 증대하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각급 의회의 규모와 적은 권한으로 효과적인 집행부 견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갈등을 사회발전의 에너지로 삼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다. 각급 의회 의원 1인이 너무 많은 인구와 이해관계를 대표해야하기 때문에 항상 과부하가 걸려 갈등 조정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대의기구인 각급 의회의 축소는 행정부의 독주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발상으로 보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중앙정보부라는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경찰 기구를 설치하여 무시로 야당과 시민사회를 감사하고 탄압하기 일쑤였다. 정상적인 여론 형성을 방해하고 그나마 축소된 국회를 회유하고 탄압하여 독재자의 입맛에 따라 조정하는 흑막정치를 연출한 것이다. 국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와 함께 불법적인 감시기구를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설치하고 악용한 것이다.
지역 정치, 풀뿌리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정권
게다가 지방자치의 폐지는 국회가 살피지 못하는 시민들의 실제 삶을 규정하는 실질적인 정부 기구인 지방자치 단체를 오로지 대통령과 행정부의 독주에 내맡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61년 12월 새로운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광역 단체와 시(市)와 읍(邑), 면(面) 의회 선거를 4년마다 실시하였으나 서울시장과 도지사 등 광역 단체장 임명권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이승만 정권의 형식적인 지방자치를 보완하여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까지 선출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 1960년 12월 12일 각 시도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일주일 뒤인 12월 19일에 시읍면 의회 선거, 12월 26일에 시읍면장 선거, 12월 29일에 서울특별시장과 9개 도지사 선거 등 4가지 선거를 각각 날자를 달리하여 실시하였다. 서울특별시장과 9개 도지사 등 총 10개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민주당의 김상돈이 당선되는 등 민주당은 모두 6곳을 차지하고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간 신민당은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3곳, 제주도지사는 무소속이 당선되었다. 이들은 모두 취임 선서는 하였으나 제대로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풀뿌리민주주의의 싹도 틔워보지 못한 것이다. 공화국을 표방하고 정부가 출범한 1948년 이래 아직까지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우리나라 지역 정치사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 원인인 것이다. 부천 시민의 피땀 어린 발자취가 담긴 지역정치사도 그 실질적 내용을 채우기 위해 기나긴 군사독재 시기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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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황인오(가톨릭대 국사학과 2년 수료, 연세대 사학과 졸업). 현재 우보만리연구소 대표,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 사북민주항쟁동지회 회장
전(前) 가톨릭광산노동상담소 소장, 부천시민연합 공동대표, 80년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민주통합당 오정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 민주통합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더불어민주당 부천병 지역위원회 수석 부위원장 역임.
[부천시민신문] [연재] `야도(野都)` 부천의 현대정치사(5) - https://m.bucheon21.com/76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