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현대정치사

부천 현대정치사 7, 박정희 독재시기의 부천지역 정치3

소한마리-화절령- 2025. 2. 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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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민신문≫ [연재] ‘야도(野都)’ 부천의 현대정치사(7)

3선 개헌과 유신쿠데타 박정희와 공화당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19를 촉발한 3.15 선거를 능가하는 부정선거로 개헌선을 넘는 압도적 의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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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지역 현대 정치사-

박정희 독재시기의 부천 정치 3

 

3선개헌과 유신쿠데타

박정희와 공화당은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19를 촉발한 3.15 선거를 능가하는 부정선거로 개헌선을 넘는 압도적 의석을 확보하였다. 장기 집권을 저지하려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와 공화당 정권은 사람들의 예상을 배반하지 않고 기어코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중과부적으로 3선 개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신민당과 재야 시민사회는 전열을 정비하여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이하였다.

그때까지 야당 신민당을 장악하고 주도하던 윤보선, 유진오, 유진산 등 구세대의 리더십이 한계에 달하여 공화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40대 기수론으로 71년 대통령 선거판을 뜨겁게 달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 젊은 지도자들의 피 말리는 경선 끝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김대중이었다. 가장 약체로 평가되던 김대중의 후보 선출은 박정희의 낙승으로 끝날 것 같았던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으로 이어졌다. 비록 김대중의 낙선으로 아쉬운 한숨을 쉬게 되었으나 집권당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민의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선거이기도 했다.

19714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는 득표율 53.19%로 총 6,342,828표를 획득하여 45.25%로 총 5,395,900표를 얻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3선을 이루었다. 이 선거는 박정희와 공화당이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의 주된 갈등요인이 된 호남 차별을 노골화한 나쁜 선거이기도 하다. 지역감정은 어느 사회든 얼마간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전까지 지역감정이 선거와 정치영역에서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등장으로 긴장한 공화당과 박정희는 호남을 고립, 배제하고 나머지 지역의 표를 결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3선 장기독재 이상의 부정적 영향을 우리 사회에 남겼다.

이 선거에서 콧수염으로 유명한 단골 대통령 후보 진복기가 정의당 후보로 나와 총 122,914표를 얻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을 누르고 3위를 기록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혁신 계열인 통일사회당의 김철 후보는 선거 도중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중도사퇴하였다.

 

장기 집권 플랜으로 가는 길목

곧 이은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525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지난 7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의석이 늘어나 총 204석을 선출하였다. 153석의 지역구와 51석의 전국구 의원을 선출했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국구 27석을 포함하여 113, 신민당은 전국구 24석을 포함하여 89, 구 민주당 계열의 국민당과 민중당이 각각 지역구 1석씩을 획득하였다. 이 선거는 3선을 달성한 박정희와 공화당이 6.8선거에서와 같은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제한 때문에 신민당 등 야당이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선을 저지하는 게 목표였던 신민당으로서는 성공적인 선거 결과였다. 또한 득표율 미달로 지역구와 전국구 의석 획득에는 실패한 통일사회당 등 야당 계열 정당의 총 득표율이 51%로 집권당인 공화당의 득표율을 넘어선 것으로 실질적인 민심의 향배를 알 수 있는 선거였다. 이는 정상적인 선거로는 순조로운 집권 연장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 박정희와 공화당으로 하여금 다른 정치적 계산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강력한 계기였다는 평가가 있다. 결국 박정희와 공화당이 장기집권을 위한 새로운 플랜을 짜는 길목이 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부천군은 옹진군과 함께 경기도 제16선거구가 되어 공화당은 기존의 오학진이 나왔고 신민당에서는 지난 7대 총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왔던 안동선 후보가 재차 등장하여 접전을 벌였다. 국민당의 박영규(朴榮奎), 통일사회당의 장석규(張錫圭) 등 모두 4명의 후보가 경쟁한 부천 옹진 지역구 선거에서 30,742표로 54.21%를 획득한 오학진 후보가 24,807표로 43.74%를 획득한 안동선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국민당의 박영규 후보와 통일사회당의 장석규 후보는 각각 1% 안팎의 득표로 낙선하였다.

 

헌정 유린 유신 쿠데타

197171일 개원한 8대 국회는 13개월이 조금 지나 박정희의 친위쿠데타인 이른바 유신쿠데타 선포로 해산당한다. 19721017일 헌법에도 없는 국회해산이라는 위헌적인 불법 군사반란으로 종신 집권을 획책한 박정희 일당의 폭거로 정치가 실종되고 국민의 헌법적 권리는 박탈되었다. 한반도를 불법 침략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흠모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왜곡된 근대화론과 개인적 야망이 결합된 친위쿠데타인 유신(維新)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자마자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하여 야당 신민당에서도 박정희의 장기 집권 획책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던 조윤형, 이종남, 조연하, 김녹영, 김경인, 최형우,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나석호, 류갑종, 김한수, 김상현 등 국회의원들을 불법 체포한 뒤 고문 가혹행위를 가했다. 국민의 정당한 투표로 선출된 일국의 국회의원들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여 헌병대의 침대 각목 등으로 온갖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이들은 유신 쿠데타를 통해 출범할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조한다는 각서에 강제로 날인한 뒤 석방되었다.

 

헌법이 위임이 없는 불법 계엄포고령으로 설치된 비상각료회의가 입법부를 대체하여 성안한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뒤, 같은 해 12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2,359명을 선출했다. 1223일 이 대의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 선거 투표를 진행했다. 이에 앞서 1218일부터 22일까지 대통령 후보 등록을 받았는데, 박정희가 유일한 후보였다. 노골적으로 김일성을 따라 할 수는 없었던지 찬반 투표가 아니라, 백지에 지지하는 한 명뿐인 후보의 이름을 적어 내는 방식을 채택했다. 따라서 재적 대의원의 과반이 투표에 불참하거나 한글도 쓸 줄 모르는 대의원이 없는 이상 박정희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다. 당시 대의원 중 한 명이었던 송모씨의 회고에 따르면 선거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대의원들의 글씨체를 조사했고, 투표장은 비밀 투표가 전혀 지켜지지 않는 반공개적인 완전 감시 분위기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2,357, 무효 2표로 99.92%의 득표율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당선이 보장되는 간접 선거마저 거추장스럽게 여긴 박정희의 뜻에 따라 임기가 6년으로 연장된 첫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직선제로 해야만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던 이승만에 의해 1952년 친위쿠데타로 헌법을 개정한 뒤 꼭 20년 만인 1972년에 박정희는 직선제로는 집권을 연장할 수 없어져서 간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의 대통령 직접 선출권을 박탈한 것이다. 20년 만에 역사의 전변이 일어난 것은 나름대로 군주민수(君舟民水), 국민이 바다라면 군주, 권력자는 바다를 떠다니는 배라는 사실, 배를 순항시킬 수도 있고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역사의 전진이라고 볼 수도 있는 사태이다.

 

나눠먹기 선거와 임명제 국회의원

이어서 1973227일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유신헌법에 따라 임기 6년의 총 219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데 그중 1/373석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접적으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146석의 지역구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어 하나의 선거구에서 일률적으로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공화당과 신민당 등 거대정당의 안정적 의석 확보를 보장하는 것이다. 공화당은 집권 여당이긴 하나 유정회와 권력을 나눠야 하는 반쪽 여당으로 전락하였고,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선거로 정권을 바꿀 수 없으니 당내의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국회 의석은 보장되는 것을 당근이랍시고 던져 준 것이다.

 

6년 임기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이 선거에서 전국을 73개 선거구로 나누어 공화당과 신민당 두 당이 사이좋게 한 석씩 나누는 광경이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에서 73개 선거구에 73명이 당선된 공화당은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당선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한 선거구에 정당별로 두 명까지 공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과 신민당은 선거구에 따라 1~2명씩 공천했다. 선거 결과 공화당은 서울6, 충남7, 전북3, 전북4 선거구에서 당선자가 없었고, 경기7, 충북2, 경북9, 경남3 선거구에선 한 선거구에 공천한 후보 두 명이 모두 당선되어 결과적으로 당선자 수가 선거구 수와 같아졌다. 신민당은 서울 8개 선거구에서 8명이 당선되었으나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된 것이 아니고, 서울 5선거구(서대문구)에선 당선자가 없었고 서울6 선거구(마포, 용산)에 공천한 후보 두 명이 모두 당선되었다. 신민당의 경우 민주통일당으로 야당 지지표가 분산되기도 하고, 무소속 출마가 허용된 때문에 득표력 있는 무소속 후보에게 의석을 빼앗기기도 하여 확보한 의석은 52석에 그쳤다. 양일동의 민주통일당이 2석을 얻고 무소속이 19석을 차지하였다. 무소속 당선자 중에는 김재광, 이용희, 손주항, 진의종 등 정치사에 나름대로 이름을 남긴 유력한 인사들이 다수 이름을 올렸다.

 

이 선거에서 등장한 간선 국회의원 73명은 임기가 3년으로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관선 국회의원이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6년 동안 재직하는 중간에 다시 임명을 받아야 하는 이들 관선 국회의원들은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친위대가 되어 법안과 예산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돌격대 역할을 전담하게 되었다. 2024123일 밤, 윤석렬 대통령이 뜬금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하고 무력화하려고 했다. 위헌적인 비상계엄 발동의 주요 사유로 꼽은 국회의 일방적인 예산 처리는 실제로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여당에 의해 무시로 일어났던 풍경임을 상기하면 비상계엄령은 몇 번이나 발동되어야 했을까. 법안이나 예산안의 일방적 처리를 당한 쪽은 계엄령 발동 권한이 없는 야당이었으니 상관없다고 할 것인가.

 

이택돈과 안동선

부천군은 옹진군과 함께 다시 시흥군을 합하여 경기도 제6선거구가 되었다. 공화당은 오학진이 다시 출마하였고 신민당은 법관 출신으로 현재의 안산시가 된 시흥군 수암면을 연고로 하는 이택돈(1935~2012)이 출마하였다. 신민당 후보에서 배제된 안동선은 양일동의 민주통일당 후보로 세 번째 출마하였다. 결과는 49,646표로 총 38.07%를 획득한 신민당의 이택돈이 1, 49,209표로 총 37.73%를 획득한 공화당의 오학진이 2위로 동반 당선되었다. 안동선은 22,394표로 총 17.17%를 획득하여 제3당 후보로는 선전했으나 또다시 낙선하였다. 김낙진(金洛津), 김봉기(金奉基) 등 두 명의 무소속 후보는 각각 3% 가량의 득표로 낙선하였다.

이 선거에서 1위로 당선된 부천 옹진 시흥의 이택돈 의원은 초선 시절에는 야당 의원으로서 큰 흠결 없이 활동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44월 신민당 총재이던 유진산 사망 이후 열린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김영삼을 지지하여 당 대변인에 발탁되었다. 197512월 관제 데모 발언으로 김옥선 의원을 제명하려는 공화당과 유정회의 공세를 지칭하는 이른바 김옥선 파동과정에서 김영삼이 보인 애매한 태도에 반발하여 김영삼과 결별하고 비주류가 되었다. 1976년 열린 전당대회, 중앙정보부의 공작이 개입하여 용팔이 등 조직폭력배들이 동원된 각목(角木)대회 또는 반당(半黨)대회에서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을 지지하였다가 795월에는 반 유신투쟁 기치를 선명하게 올린 김영삼을 지지하는 등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이택돈은 4선을 지냈으나 79년부터는 지역구가 갈라져 더 이상 부천지역을 대표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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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황인오(가톨릭대 국사학과 2년 수료, 연세대 사학과 졸업). 현재 우보만리연구소 대표,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 사북민주항쟁동지회 회장

() 가톨릭광산노동상담소 소장, 부천시민연합 공동대표, 80년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민주통합당 오정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 민주통합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더불어민주당 부천병지역위원회 수석 부위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