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현대정치사 2. 박정희 독재 시기의 부천 지역 정치②
3공화국의 등장
군사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정권을 차지한 박정희와 군부는 3년 가까운 군정기를 끝내고 제5차 헌법개정을 통해 민정으로 복귀했다. 61년 5.16 쿠데타 직후 제시한 정치 일정에서 조속한 민정 이양을 약속한 박정희는 여러 차례 민정 복귀와 일선 후퇴 약속을 번복하며 민정 이양 후에도 정권을 차지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초법적 기구를 통한 통치가 3년 가까이 계속되자 여론의 반발과 미국 정부의 압력을 견디기 어려웠다.
1962년 12월 17일 최초의 국민투표를 거쳐 5차 헌법개정안, 제3공화국 헌법이 통과되어 12월 26일 공포되어 발효되었다. 이 헌법에 기하여 이듬해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는 46.64%를 얻어 45.09%를 획득한 민정당(民政黨)의 윤보선 후보에게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경찰과 행정관청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이긴 것이다.
이어서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총선거에서는 총 175석 중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지역구 88석 전국구 22석 등 총 110석을 얻었고 야당인 민정당은 지역구 27석 전국구 14석 등 모두 41석, 민주당은 지역구 9석, 전국구 5석으로 총 14석, 자유민주당은 지역구 6석 전국구 3석으로 총 9석, 국민의 당은 지역구 2석을 차지하였다.
당시까지 통용되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 도시지역은 야당 우세, 농촌 등 비도시 지역은 여당 우세라는 현상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농촌 비도시 지역인 경기도 제13 지역구였던 부천군 시흥군 옹진군은 공화당이 우세한 지역이었다. 공화당 후보 옥조남(玉朝南, 1918~1997)은 이북 출신의 구 신흥대학교, 현재의 경희대학교 교수였던 사람으로 군사정권의 법률 자문역을 맡았던 공로로 낙점되어 당선되었다. 그의 행적이 두드러진 것은 없고 한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뒤 더 이상 공천을 받지 못했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이 다시 격돌하였다. 그러나 군정 3년과 민선 4년 등 7년에 걸친 집권기간 동안 행정력을 장악한 박정희와 공화당의 조직적 부정선거로 4년 전과는 선거의 양상이 달라졌다. 4년 전에는 2% 미만의 차이로 박정희가 간신히 이긴 데 비해 67년 선거에서는 10% 이상 차이를 벌이며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전 행정력 경찰력을 동원한 관권과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는 금권과 야당 인사에 대한 노골적인 사찰과 탄압으로 손발이 묶인 야당 신민당과 윤보선 후보는 서울과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서 신승(辛勝)하였을 뿐 거의 모든 지역에서 표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6.8 부정선거
곧이어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은 한달 전의 대통령 선거 때보다 훨씬 적은 득표로 의석수도 대폭 줄어들었다. 이 선거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3.15 선거에 버금가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선거였다. 우리 정치사에서 악명높은 6.8 부정선거로 알려진 선거였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헌법을 개정하려면 1차 관문으로 재적 국회 의석의 2/3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 1917년생으로 만 50세였던 박정희가 재선으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7대 국회에서 헌법을 개정하여 3선 제한 규정을 바꿀 것이라는 전망은 당시의 식자들에게 상식에 속했다. 따라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부패를 동원하여 개헌선인 2/3인 116석 이상을 확보하려고 총력을 다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해 실시된 총선거에 박정희와 공화당 정권은 전 경찰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막걸리 고무신 매표 등 모든 부정선거 수법을 자행한 것이다. 63년의 6대 총선거에서는 야당이 분열된 상태에서도 65석을 획득한 데 비해 67년의 총선거에서는 야당 통합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으로 대오를 정비하였음에도 46석(대중당 1석 포함)밖에 얻지 못한 것이다. 공화당은 개헌선을 훌쩍 넘긴 129석을 얻은 것이다.
신민당은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국회 개원을 거부하며 강경한 장외투쟁을 시작하였다. 우리 헌정 사상 가장 장기간 등원거부와 함께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캠페인을 전개하여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였다.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과 공화당조차 ‘지나치게 균형이 깨진 선거’라거나 ‘혼탁한 선거’였다고 마지못해 자인할 정도로 부정부패가 판을 친 선거였다.
6월 13일 전국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시위가 격화되어 서울 시내 11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는 등 시민들의 항의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21개 고등학교에까지 시위가 번졌다.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7월 1일 신민당은 당사 옥상에서 민권대회를 열었다, 7월 10일에는 공화당 단독으로 7대 국회 개원식을 열었으나 복수정당제를 명시한 헌법정신을 위반했다는 안팎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9월 25일, 공화당은 전국구 당선자로 선거 직전 내무부 장관이었던 양찬우(楊燦宇:1926~2011, 육사 3기)를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제명하고 부정부패의 정도가 심한 4명, 10월 3일 또 4명은 제명하는 등 성난 민심을 모면하려 하였다. 이들을 포함하여 공화당에서 제명된 13명의 의원이 10월 5일, 이 날자를 딴 ‘10.5 구락부’를 급조하여 국회 교섭단체로 등록하였다. 뻔한 눈속임으로 복수 정당 논란을 피하려 한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정우회(政友會)’로 이름을 바꾸어 공화당의 위성 정당 노릇을 하게 된다. 6개월가량의 지루한 장외투쟁과 안팎의 교섭 끝에 11월 20일 신민당은 공화당 대표와 ‘부정선거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강제수사권을 주고, 정치 사찰을 금지하는 입법 등에 합의하고 11월 29일, 174일 만에 국회에 등원하였다.
새벽 날치기 3선 개헌
6.8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확보한 박정희와 공화당은 68년부터 3선 금지를 고치기 위한 군불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박정희가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후계자가 될 것을 기대하던 김종필을 지지하는 공화당 내 그룹이 일정하게 존재하였으나 중앙정보부 등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한편으로는 강압으로 한편으로는 회유로 굴복시킨다.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김신조 등 북한 121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과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삼척 울진 무장공비’ 출현 등으로 발생한 안보 위기를 정치 일정에 적극 활용한다. 5월에는 공화당 주류로 김종필 계인 김용태, 최형두를 부정부패 혐의로 제명하고 이를 책임지고 김종필이 공화당 의장과 국회의원직 등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69년 4월에는 신민당이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박정희는 공화당에 불신임안을 부결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4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152명(공화당 100명, 신민당 41명, 정우회 11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찬성 89명, 반대 53명,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다. 이른바 ‘4.8 항명사건’이었다. 이에 격분한 공화당 총재 박정희는 ‘1주일 내에 이번 항명을 주동한 분자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4월 15일 3선 개헌 추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김종필 계열의 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 등 5명이 제명되었다. 이어서 당 중앙위원 등 100여 명을 출당 조치하는 등 3선 개헌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인사들을 정리하는 등 전열을 정비한 박정희와 공화당은 마침내 3선 개헌에 나서게 된다.
6월 들어 대학가의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시작되는 등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대 투쟁이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7월 25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며 3선 개헌 표결로 국민의 신임을 묻겠다고 장기 집권 의지를 밝혔다. 박정희의 특별담화 50일 후인 9월 14일 새벽 2시 야당 의원들을 따돌리고 국회 제3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 개정안 등을 기습 가결하였다.
신민당의 전열 정비
공화당의 기습적인 새벽 개헌안 날치기와 절대적인 숫적 열세로 박정희의 장기 집권 기도에 맞닥뜨린 신민당도 전열을 정비하고 다가올 선거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이미 신민당은 성낙현 등 3선 개헌에 찬성하여 당을 배신한 3명을 응징하기 위하여 9월 7일 당을 해산한 바 있었다. 당시 국회법에 따르면 무소속 출마는 허용되지 않았고, 국회의원이 소속 당을 탈당하면 의원직을 자동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소속 당이 해산해도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소속 당에서 제명하면 국회의원직은 유지되었다. 공화당과 중앙정보부의 회유에 넘어가 당을 배반한 성낙현 등 3명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9월 7일 성낙현 등 3명만 남기고 소속 국회의원 전원을 제명하고 당을 해산한 것이다.
공화당의 개헌안 기습 통과 후인 9월 20일 신민당을 재창당하고 이듬해인 1970년 1월에는 재야인사 200여명이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윤길중 등 옛 진보당 등 혁신계 인사의 영입, 김구 선생을 잇는 한국독립당과 합당 등 당세를 확장하며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전선을 구축하였다.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으로 당내 기운을 일신하고 윤보선, 유진오, 유진산 등 구세대를 후퇴시키고 세대교체를 시동하는 등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 40대 기수 3파전으로 이루어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결선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3명 중 가장 열세로 보였던 김대중이 후보직을 거머쥐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하며 야당과 시민사회는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집권 세력과의 일전에서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부천 지역 정치와 선거
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천이 속한 경기도 제13 지역구에서 당선된 사람은 오학진(吳學鎭:1928~2011)이다. 오학진은 평안남도 출신의 김종필과 동기인 육사 8기의 군인으로 33 예비사단 작전 참모로 있으면서 5.16 쿠데타에 가담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63년 선거에서 전국구로 당선된 바 있다. 옥조남의 뒤를 이어 경기도 제13 지역구에 공천을 받은 오학진은 6.8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된다. 오학진은 2년 뒤인 69년 이른바 3선 개헌 당시 야당인 신민당을 따돌리고 날치기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공화당의 날치기작전에 적극 가담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거수기로 맹종한 공로로 연거푸 국회의원이 되어 유신 국회인 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4선을 기록한다. 2011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오학진은 이른바 ‘애국시민모임’이라는 보수 정치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행적을 보이고 있다.
특기할 것은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제13지역구에서 부천을 연고로 하는 32세의 안동선 씨가 민주당 소속으로 처음 출마하여 2.000표를 약간 상회하는 득표를 하여 6명의 출마자 가운데 4위로 낙선하였다. 2위로 낙선한 신민당의 박제환 후보와 함께 현재의 부천을 연고로 하는 출마자가 2명이나 나왔다는 점은 1973년 부천의 시 승격과 함께 본격적인 지역 정치의 단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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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야도(野都)’ 부천의 현대정치사(6):부천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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