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처럼

동일방직 관련 글 3편

소한마리-화절령- 2007. 4. 24. 13:28
 

1. 동일방직 노동조합 약사


동일방직(인천 동구 만석동 37번지)은 일제시대 도오요방적(동양방적) 인천공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5대 방적업체인 동양방적이 조선의 연소자나 부녀자를 값싼 노동력으로 쓰기 위해 1934년 10월 1일부터 동양방적 조업을 시작했다. 일제시대 사실주의 작가인 강경애의「인간문제」는 동양방적 노동자들과 인천부두를 배경으로 하여 일제시대 동양방적의 근무조건과 노무관리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우선 남직공이 갖다 주는 초벌 삶은 고치를 펄펄 끓는 가마 속에 들어붓고 조그만 비로 돌아가며 꾹꾹 누른다. 그러니 실끝이 모두 비에 묻어 나왔다. 처음에 나쁜 실 끝은 비로 끌어내어 가마 좌우에 꽂힌 못에 걸어 놓고 나서 다시 비를 넣어 실 끝을 끌어올리었다. 이번에는 약간의 누런색을 띤 정한 실 끝이었다. 간ㄴ난이는 실 끝을 왼손에 걸어 쥐고 나서 바른 손으로 실 끝을 하나씩 글어 사기 바늘에 붙였다. 그러자 실이 술술 풀려 올라간다.” - 강경애 《인간문제》242쪽 - 


해방이후 미군정청에 귀속되어 동양방적공사(후에 명칭이 제일방적공사로 바뀜)에 흡수됐다가 1948년 제일방적공사에서 분리돼 동양방적공사로 바꾸었고 공장장이었던 서정익이 초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55년 8월5일 이승만 정권의 귀속면방업체 민영화 방침에 따라 이사장 서정익이 동양방적공사를 인수해 동양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고 66년 1월 회사명을 동일방직주식회사로 변경한다.


동일방직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더불어 급성장했다. 60년대 후반 수출순위에서 수위에 들어왔으며 69년에는 안양공장을 건설하고 서정익이 수출 철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정희의 초기 경제개발계획이 섬유, 고무 등 주로 나이 어린 여성노동력을 값싸게 이용하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집중됐던 현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동양방직은「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의 핵심노조로 1946년 메이데이 집회에 900명이 참가할 정도였으며, 인근 사업장에 파업을 선동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메이데이 집회 참가를 기점으로 동양방적 노조는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회사는 메이데이 휴무대신 5월5일 대체근무를 하라는 것이 발단이었는데, 노동조합이 전평에서 탈퇴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조위원장을 해고위원장과 간부들을 해고하고, 농성주동자들을 경찰에 넘기면서 ‘대한노총 가입을 강권’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들의 격렬한 항의농성에 전평의 요청으로 미군정청 노동국, 동양방직 그리고 전평이 협상을 하여 합의에 이르는데 회사측이 이 합의를 파기해, 미군정청 노동국 보좌관도 ‘격분해’ 전평 문은종을 대동하여 동양방적 공장에 급행하기도 했다.


어쨌든 1946년도에 대한노총 산하로 들어가 초대위원장에 채경석을 선출한 것을 보면 노조 핵심 간부들을 제거하고 전평을 탈퇴시키기 위한 회사측의 공작은 그해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노총이 산업별노조 체계인 한국노총으로 바뀌어「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로 편재돼 있을 시절, 섬유노조가 69년 전국 18개 면방직업체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준법투쟁, 파업 투쟁을 벌인다. 이때 동일방직 지부는 파업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런데도 회사측은 ‘공격적직장폐쇄)’을 단행했고 노동조합은 방직업체의 사주에 의해 움직였다고 한다.



2.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연봉


공부를 너무 하고 싶어 나이 열일곱에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 왔고, 거기서 또 공부할 길이 안보여 인천에 살고 있는 언니한테 왔다. 12시간 막교대로 속눈썹에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도록 일하고 추운겨울 작업장 솜뭉치를 덮고 자면서도 학교에 가고 싶었다.


편지를 부치기 위해 동일방직 앞을 지날 때면 ‘아! 좋다. 여긴 대학교인가보다.’ 생각했는데, 대학교일줄 알았던 그곳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고 평생의 한을 남긴 동일방직이었다.


그런 최연봉이 몇 년 전 ‘야, 우리 애들도 모르는데 나 지금 고등학교 다닌다.’라고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대학생이다. 평생소원이었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연봉에게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쉰셋 나이에 30년 전 똥물 뒤집어쓰고 쫓겨난 동일방직을 상대로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하기야 쉰을 넘었으면 뭐하랴. 이미 할머니가 된 동일방직 노동자들에게는 막내 뻘이고 여전히 그들에게 최연봉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총무인 것을. 생전 화 한번 안낼 것 같이 후덕하게 생긴 그의 얼굴에서는 ‘투사 최연봉’의 모습이 그려지질 않는다.


2005년 3월, 30년전 20대 ‘공순이들’이 아니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에 하얀 서리가 앉은 어머니, 할머니들이 만석동 동일방직 정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을 동일방직은 막지 못했다. 그때 사람들은 최연봉을 공장장실 문 앞에 세웠다.


“내가 그때 맨 날 이안에 불려 들어가서는…” 동료들 앞에서 멋쩍게 웃으며 말하던 그가 동일방직 관리자를 보더니 갑자기 부화가 치밀었나 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어. 뭘 잘못했다고 지하실에 불러다 형광등 깨서 협박하고…” 울컥하면서 목청이 높아진다. 그해 여름에는 서울 대치동 동일방직 본사 앞에서 한여름 땡볕에 ‘할머니들’이 노숙을 하고, 건물 안에서 회사 임원들과 마주 앉은 최연봉은 똑같은 항의를 한다.


“우리도 그때 피해를 많이 봤어요. 군사정권에 압력도 많이 받고…” 말꼬리를 흐리는 사람은 동일방직의 사장인지 고위급 임원인지 모르겠다.1)


최연봉은 동일방직이 한창 탄압받을 때 가장 많이 부장, 과장 담임한테 가장 많이 불려가 협박당했던 사람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졌기에 그 시련, 그 고통을 겪어야만 했냐고.”


동일방직 투쟁이 정리된 이후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면서 부평1동 성당을 들어 설 때 성모마리아 상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최연봉은 눈물이 복받쳤다고 한다. 동일방직에서 겪은 일들이 한으로 밀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방직에서의 투쟁과 탄압을 이야기할 때도 깔깔대며 이야기했던 최연봉이 처음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가 통째로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으로 전환된 후 인노련 회원으로 있으면서 공장을 다녔다. 이미 결혼한 뒤였지만 여전히 노동자였다. 그리고 87년 3월에 동일방직 출신인 정명자와 함께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를 재건했다. 노동자대투쟁이 터지고 인노협이 만들어지고 3년 동안 지속된 폭발적인 노동자투쟁 고양기에 그의 손의 거쳐 결성된 노동조합이 한해 60여개에 달했다.


이렇듯 노동운동 혹은 사회운동의 끈을 놓지 못하는 가장 밑바탕에는 동일방직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 위원장과 학생이라는 신분 외에도 녹색환경운동 이사에 그가 살고 있는 인천 남구 자원봉사센타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어디 최연봉 뿐이겠는가. 그의 말에 따르면 동일방직 출신들이 모두들 다들 제 역할하면서 살고,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다고 한다. 그 때마다 동일방직이 한이고 상처이면서 동시에 든든한 빽이고 힘이다.


“마음 깊은 곳에 그런 게 있어. 우리는 굉장한 친구들이 있다. 그것도 많이 있다. 우리는 해고되고 산업선교회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속속들이 다 알아. 감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친구들. 만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은. 또 살면서 동일방직이 아픈 과거지만 그 과거가 굉장한 보증수표이기도 해. 어디 가서든 동일방직 출신이라고 하면 인정해주는 분위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직을 원한다며 집회도 하고 농성도 할 수 있는 원동력일 것이다. 또 있다. 최연봉 그리고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싸울 수 있던 힘, 그것은 ‘나도 사람이라’는 의식이었다.


대학교인줄 알았다던 동일방직은 12시간 막교대 솜 공장에서 일할 때보다 몸무게가 8킬로나 빠질 정도로 힘든 공장이었다. 최연봉은 입사한 후 얼마 안돼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왜? 한문공부를 한다고 해서. 공부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동일방직에서 매일 부장한테, 담임한테, 반장, 조장한테 불려 다닌다. 조장이든 뭐든 원하는거 다시켜 줄께 산선만 나가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이었다.   


“산업선교회 다니는 거 알고 막 탄압이 시작되는데 조화순 목사님께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어. 조화순 목사님이 하느님은 하느님 자녀로서 평등한 권리를 준 평등한 인간이다 이야기하시다가 속상하시니까 막 열 내시는거야. ‘야! 그 사람도 똥 누고 너도 똥 누고 그래. 다 똑같은 인간이야.’ 굉장히 충격이었어. 권리의식의 시발점이었어. 그 다음부터는 과장이 불러서 야단을 해도, 부장이 불러서 야단을 해도 속으로 ‘야 너도 똥 누고 나도 똥 눠! 할려면 해 봐라!’ 대꾸도 안하고 몇 시간이고 듣는 거야. 하다하다 지쳐서 우리 담임이 어디서 이딴 게 굴러 들어와서 속을 썩이냐고. 속으로 ‘어디서 굴러 들어오기는 야 우리 엄마는 나 이쁘다고 그러는데.’ 뭐라 그럴까 나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까 권리의식이라는 거 이런 게 생긴 거야. 나도 사람이라는 의식을 깨우친 거지.”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는 것. 여자든 남자든, 장애든 비장애든, 학벌이 높건 낮건 모두들 부모에게는 소중한 자식들이다.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한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 그것이 할머니가 다 된 그들이 지금도 싸우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은 부당하게 해고되는 일이 없나? 여전히 벌어지는 일인데 선행이 악을 몰아낸다고 언젠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했으면 말로만 명예회복이 아니라 복직을 시키라는 거지. 그래야 그런 일이 반복되질 않을 거 아냐.”



 3. “우리는 아무도 스스로 옷을 벗지 않았다”…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단결의 근원은?


동일방직투쟁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의문이 들었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에 적잖이 관여했지만 그토록 잔혹한 탄압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완강히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전국 최초로 여성을 지부장으로 당선시킨 1972년 5월10일 이후 적어도 1년 반 동안은 쉽진 않았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매달 월급에서 공제되는 조합비를 ‘세금’정도로 인식했던 것에서 ‘아! 노동조합이 이런 거구나!’를 느끼는 기간이었을 게다.


그런데 이른바 나체시위가 벌어진 76년부터 78년 똥물사건, 124명 해고, 그리고 해고이후에도 이어진 노동자들의 투쟁…. 80년까지만 잡아도 무려 5년이었다. 5년이라는 세월동안 “저녁에 잠들 때마다 차라리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할 정도로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처지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완강한 저항을 했다.


그 정도 강도의 탄압에 조합원들은 커녕 간부들도 6개월, 아니 한달도 버티기도 어렵다. 탄압 속에서 단련된다는 것은 책속의 이야기이고 현실 속에서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단결력의 근원은 어디서 왔을까?


입사 후 1년도 안돼서 똥물사건을 겪고 해고된 김용자는 주저 없이 ‘애정’이라고 했다. “내가 입사 1년이 안됐는데 알면 뭘 알고, 의식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니? 우리(조합원들) 그때 해고 안 될 수 있었어. 근데 간부들은 해고되는데 우리만 들어가서 일할 수 없었어. 조합원들이 우리 간부들조차 지켜 주지 못하면서 무슨 노동운동이야. 모두들 해고되더라도 간부들만 남겨둘 수 없다는 애정이랄까, 의리랄까 그게 버티는 힘이었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처절한 투쟁의 와중에, 무의식중에도 발휘되는 너무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애정과 신뢰가 이들에게 있었다. 나체시위가 벌어진 7월25일을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에 실린 석정남과 김순분의 증언을 토대로 간략히 재구성 해봤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가 아니고 폭력을 휘두르는 너희들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8시간 근무를 한 후 16시간씩 농성을 했다. 무슨 놈의 법이 그따위로 생겨먹었는지 파업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비들은 부모와 동료들이 전해주는 우유와 빵, 얼음까지도 짓뭉개 버렸고, 화장실 문도 잠가버렸다. 회사는 밤이면 농성 장소에 너무 밝은 백열등을 매달아 놓고 켰다 껐다를 반복하여 정신을 못차리게 했다. 농성자들은 34도를 넘는 더위로 인한 갈증과 배고픔으로 널부러졌다. 게다가 작업을 하면서 농성을 했으니 오죽했으랴. 현장과 노조에서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3일째 되던 날, 에라 모르겠다. 법이고 개나발이고 우리가 살고 봐야지.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과연 그날로 경찰이 들이닥쳤다.  


시퍼런 옷을 입고 야구방망이 같은 것을 꽁무니에 찬 경찰이 출동했다. 너무나 무서웠다. 생전 처음보는 마치 괴물같은 전투경찰들이었다. ‘경찰이 왔다’는 소리와 함께 조합원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한덩어리로 뭉쳐졌다. 경찰들과 회사 남자들에 의한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들어오고 있었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포위망이 좁혀 올수록 조합원들은 더욱 단단히 뭉쳤다. 


그때였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엔 경찰 아니라 그 누구도 남자들은 손을 못댄데” 하는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동일방직 여성 조합원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옷을 벗었다.


그러나 간부들은 아무도 자기 손으로 옷을 벗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간부들을 먼저 살려놓고 보자고 생각한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기 전에 옆에 있는 간부들 옷부터 벗겨줬다. 800여명 중 끌려가기 싫은 사람은 거의 옷을 벗었다. 한 500명은 벗었을 것이다. 난리통에 브래지어 끈이 끊어지고 팬티까지 벗겨져 완전 나체가 되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뭐가 끊어졌는지 내려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잠시 후 조합원들이 악을 쓰며 부르는 노래소리 사이로 회사 간부들과 쑥떡쑥떡하던 경관이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입니다. … 사람을 죽인 사람이 옷을 벗고 있다고 해서 못잡아 가지 않습니다. 또 인원 수가 많다고 해서 못잡아 가지도 않습니다. 백 명도 좋고 천 명도 좋고 나의 직권으로 다 잡아갈 수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즉결에 넘어가 전과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론 집안 후손에 까지 장래를 망치는 결과가 되는 전과자라는 빨간줄이 그어집니다.” 조합원들의 울음소리와 야유 속에서도 그는 협박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 무조건 다 잡아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주동자만 내 놓으세요. 주동자만 내놓으면 여러분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에~ 대의원들 나오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입니다


그때였다. 벗고 있던 조합원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주동자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입니다.”


경찰간부는 5분 간격으로 세 번을 더 경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회사 간부가 대의원들을 지목해 주는대로 경찰과 남자직원들이 조합원들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찰떡처럼 한 덩어리가 된 대열을 허물어 내느라고 난장판이 되었다. 조직부장 김순분은 네명에 의해 떼어져 잔디밭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미 그의 몸도 완전 나체가 돼 있는 상태였다. 간부들을 실은 닭장차에 바퀴 앞에 조합원들은 알몸뚱이로 드러누웠으나 소용없었다. 닭장차 안에는 반나가 아닌 대부분 알몸뚱이가 된 상집간부, 대의원들과 격렬히 저항하는 조합원들이 태워졌다. 더운 날씨에 며칠간 갈아입지 못한 팬티와 브래지어들은 꼬질꼬질 더러웠고 시도 때도 못가리는 생리현상으로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72명이 닭장차 두 대에 실려 끌려갔고 조합원들 200여명이 차에 매달리거나 뛰어서 동부서로 따라갔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이때뿐만 아니라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을 때에도 주동자가 누군지를 추궁하면 모두다 자신이 주동자라고 말해 “빨갱이도 지독한 빨갱이들이다”고 경찰이 혀를 차기도 했다.


“내가 옷을 벗다니! 그것도 많은 남자들 앞에서!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끔찍하면서도 놀라울 뿐이다. 부끄러운 걸 따지자면 벗은 우리보다도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그 놈들의 몫이어야 한다. 그렇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들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순분의 말이다.


결코 그날은 잊을 수 없습니다.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날은 사랑으로 결집된


우리 모두의 날이었습니다.


생명의 날이었습니다.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모르고 노예처럼 사느니보다는


알면서 고민하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자고


나를 각성시킨 그날입니다.


- 나체시위 후 정명자가 쓴 시 ‘그 날’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