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의 단기기억상실증

소한마리-화절령- 2007. 10. 1. 14:03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의 단기기억상실증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산 100번지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지난 1987년 이곳에 있던 서대문형무소(당시의 정식명칭은 서울구치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뒤 광복이후 지어진 옥사(獄舍) 일부를 철거하고 보존가치가 높은 일제 총독부 시절의 옛 옥사와 보안과 건물, 사형장 등을 근대역사유물로 보존키로 하고 붙인 이름이다. 그즈음 일어난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열풍에 따라 식민지배의 아픔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옛 총독부 건물, 이후에는 신생 대한민국정부의 중앙청으로 쓰이던 곳이 철거된 뒤, 전국 곳곳에서 일제와 군사독재 시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유물들이 멸실되는 비역사적인 움직임이 만연하던 때였다. 당국자들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멀리는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 즉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강요된 개항 이후 우리나라 근대 역사가 겪은 발자취를 간직한 역사적 증거물을 보존하게 된 일을 충분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랄 수 있는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의 시기였던 1980년 여름부터 다음해 봄까지 바로 그 서대문 구치소에서 지냈던 나는 오랫동안 벼르다가 작년(2006년) 10월과 올해 4월 두 차례 그곳을 다녀왔다. 이중삼중의 결박을 당한 채 죄수호송용 차량만 타고 드나들던 곳이라 처음 찾아갈 때에는 길이 몹시 낯설다고 생각했다. 막상 지하철과 버스 등 사통팔달의 편리한 교통편의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벼르기만 한 몇 년간의 세월이 다소 멋쩍기까지 하였다.

 

1980년 7월말인가 8월초인가부터 이듬해 3월 5일까지 만7개월 남짓한 기간 머물던 곳이다. 그해 80년 4월 사북노동항쟁과 5월 15일까지 경향각지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일당의 퇴진과 민주화를 외치던 청년학생들의 시위. 곧 이은 5월 광주의 피바람을 겪으며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열한 시기에 수백 명의 의로운 청년, 학생들과 지식인 등 이 나라의 양심을 대표하는 인사들과 함께 하면서 보낸 죽도록 잊지 못할 기억들.

 

계엄해제, 삼청교육철폐 등을 부르짖는 청년학생들에게 가해진 무차별 폭력사건인 이른바 81년 1월의 똥물사건의 보복으로 끌려간 보안과 지하실과 전형적인 판옵티콘(Pan opticon)- 一望監視구조의 獄舍, 사형장 등을 둘러보며 곡절 많은 현대사를 거쳐 이만큼이나마 자유와 민주주의를 성취해 낸 데 한몫했다는 뿌듯한 자부심도 얼마간 느껴보고 싶었다. 보존된 옥사 이곳저곳에서 유관순, 강우규, 안창호 등 이곳을 거쳐 조국광복의 영령으로 승화한 분들의 자취를 희미하게나마 재현하려는 장치들이 나름대로 잘 갖추어졌다. 불편한 기억은 지우기 좋아하는 비역사적 풍토에서 그나마 아픈 역사의 자취를 보존하려는 관계자들의 나름의 성의와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서대문 형무소의 기억은 마치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1945년에 머물러 있고 해방 이후 더러운 기득권을 지키려는 신구(新舊) 매판세력(買辦勢力)의 분단고착독재(分斷固着獨裁)에 항거하여 이만큼이나마 민주주의를 이루어 내기까지 겪은 자주평화(自主平和) 민주세력(民主勢力)이 감내한 투쟁과 희생의 기록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식민지잔존세력과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세력 간의 피나는 대립항쟁과정에서 명멸해간 해방공간의 수많은 애국자들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봉암, 조용수를 비롯한 애국열사들. 세계사법사상 유례없는 사법살인으로 기록된 1975년 4월 9일 새벽의 도예종, 이수병, 여정남 등 8인의 인혁당 날조 희생자들. 이들과 함께한 민청학련 등 일련의 저항운동과정에서 신산의 고통을 감내한 지학순, 김대중, 유인태, 장영달, 김지하, 문규현 등등 이루 열거하기에도 숨 가쁜 민주인사들의 피와 땀.


그뿐인가. 민주적 가치의 형식적 허울마저 주저 없이 벗어던지고 식민잔존세력의 충실한 후예로서 新매판기득권층의 이익을 수호하러 나선 전두환 일당에 목숨 걸고 저항한 80년 4월의 사북탄광노동투사들. 마침내 이 나라 자주 민주운동의 일대전환을 불러온 5월 광주항쟁의 횃불을 이으려는 수백 수천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과 종교인, 지식인, 정치인 등 민중들의 피맺힌 투쟁의 자취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곳. 전두환 일당의 정치범들에 대한 삼청교육 강요에 맞서 계엄철폐와 민주헌정회복, 삼청교육철폐 등을 외치며 싸우다가 극악한 고문탄압이 자행된 81년 1월의 ‘똥물사건’을 필두로 80년대 내내 이어진 청년학생들의 옥중민주화투쟁의 숨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곳이 바로 서대문 형무소 아닌가?


역사유적지로 지정되어 문을 연지 10여 년이 되도록 이러한 역사적 기억상실을 지적하거나 수정되지 않은 일이 다소 놀랍기까지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곳이 명실상부한 우리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역사유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관련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장을 새롭게 꾸며야 할 것이다. 아직 당사자들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금 해방 이후의 관련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가칭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자료복원기구’를 관련당사자들과 학자 등으로 구성할 것을 공식적으로 촉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