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순신불사와 좌파정권 종식?

소한마리-화절령- 2007. 11. 8. 09:53

순신불사(舜臣不死)’와 좌파정권 종식?



‘尙有十二 舜臣不死’, ‘ 아직 배가 열두 척이나 남았고 (이)순신은 죽지 않았으니’ 왜적을 물리칠 수 있나이다. 비열한 권력투쟁의 희생물로 실각했던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면서 조정에 올린 장계의 한 대목이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극적인 위기와 극복의 드라마를 연출한 이 충무공의 숱한 일화 가운데 왜적격퇴의 결연한 의지와 비장미 넘치는 유명한 대목이다. 외세극복과 민족자주 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 대목이 요즘 들어 갑자기 주목받고 있다.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대통령선거에서 친일매판독재의 맥을 계승하는 극우보수진영의 대표선수로 나섰다가 모두 낙선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작년 이맘때 한 대학특강에서 바로 이 대목 ‘순신불사(舜臣不死)’를 인용하며 대권 3수를 위한 정계복귀를 강력하게 암시했다는 것이다.


2002년 12월 대선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해 놓고 이를 번복한 것에 대해서는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결정적 흠결이나 비난거리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문제는 우리나라 정치세력 가운데 가장 외세의존적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이회창 씨가 외세극복과 민족자주의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 충무공을 들먹이며 정계복귀의 레토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충무공이야말로 해방 60년이 넘도록 민족분단을 극복하지 못할뿐더러 친일매판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후손들의 무기력한 행태에 누구보다 못마땅해 할 것이다. 친일매판세력을 청산하기는커녕 여전히 그 계승자들이 이 나라의 주류- 이른바 메인스트림을 이루며 외세의존적인 사회구조의 개편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세력의 대표선수가 충무공 당신의 말씀을 멋대로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막 분단의 고통을 치유하고 민족공동체의 복원을 본격화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대미․ 대일 종속적 정치․ 경제구조를 온존 강화하려는 이들이 ‘순신불사(舜臣不死)’를 인용하며 전율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에 70이 넘은 노인이 전율을 느끼며 심신을 단련하는 것까지야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하필 충무공을 끌어들이는 것은 개탄할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1876년, 일본의 강요로 맺은 강화도 조약이래 130년간 지속된 민족사의 시련, 이땅을 무대로 벌어진 열강의 간섭과 분탕질로 인한 갑오농민전쟁의 좌절과 청일, 러일전쟁. 일제에 의한 국권강탈. 미국주도의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매판독재 등등. 피고름으로 점철된 민족사의 고난을 자력으로 극복하려는 민족구성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두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하나씩 구체적 결실로 다가오려는 중이다.


이회창씨는 민족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이러한 노력을 ‘좌파정권 종식’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저지할 것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좌파인들 어떻다는 말인가. 프랑스 대혁명 이래 정치세력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틀로서 좌파, 우파의 개념으로 보자면 좌파이기보다는 오른쪽으로 기운 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이다. 다만 지난 60여 년 동안 허울뿐인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극우매판 독재세력들이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는 강력한 사상탄압으로 인해 생긴 착시현상으로 김대중, 노무현정부가 어느 정도는 좌파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극우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과 정치적 관점을 조금만 달리해도 좌파로 몰아 탄압해 버릇하다보니 이제는 실제로 웬만하면 다 삐딱한 좌파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 한들 좌파가 어떻다는 말인가.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등의 식상한 비유는 제쳐 놓고 우편향으로 기운 우리 사회의 평형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진짜 좌파정부가 출현해야 하는 시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유사(類似)좌파 또는 의사(擬似)좌파라고 한다면 이회창씨가 적절히 언급한 것처럼 천민자본주의의 전시장이 되어버린 이 나라 경제사회에 어둡게 드리우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로 인한 사회분열을 치유하고 진정한 공화(共和)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제는 진짜 좌파정부가 들어서야 할 때이다.


좌파정부라고 해도 전략적 관점에서 민족의 자주적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된다면 한미동맹을 강화할 수도 있고 해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좌파정부도 진정한 공화(共和)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수호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일본과 중국 등 주변열강과 관계를 강화할 수도 있고 거리를 둘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야만 되는 것일까.


다른 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우파세력은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자주를 강조하는 반면 좌파는 상대적으로 국제주의적 경향을 띤다. 어찌 보면 역할분담과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진보좌파진영은 상호 대등한 국제협력, 이를테면 민중적 세계화를 위해서 투쟁해야 할 과제를 감당하는 동시에 자칭 이 나라 우파가 내팽개친 외세배격 민족자주의 과업까지 수행해야하는 과중한 짐을 지고 있다. 이회창씨가 가장 민족자주정신을 상징하는 이 충무공의 말씀을 인용하며 내세운 것이 민족공동체 복원을 저지하기 위한  ‘좌파정권 종식’이라는 것이다. 이 민족사의 비극이자 희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역사의 희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이 나라에 진정한 좌파정부가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민주진보 개혁세력의 대동단결이 절실한 때이다.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자주를 수호하려는 충무공의 말씀이 외세종속 매판세력의 레토릭으로 희롱당하지 않도록 민주정부를 연장하여 올바른 과거청산과 천민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회창씨의 정도를 벗어난 대권3수를 위한 ‘순신불사(舜臣不死)’와 좌파정권종식이라는 철지난 구호는 역설적으로 민주진보 개혁세력의 각성과 분발을 깨우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