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온 '친북좌파'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이명박 씨가 올해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친북좌파 대 보수우파’의 대결로 규정하였다고 해서 논란이 뜨거워질 전망이다. 해묵은 색깔론에 기대어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낡은 수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친일매국잔당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미 점령군에 기대어 자신들의 지배권을 재구축하는 결정적 빌미로 이용된 반공 색깔론의 계보에 충실한 나름의 일관성(?)있는 태도랄 수 있다. 곡조가 바뀌지도 않은 노래를 60년이 넘도록 불러대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지 그 끈기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한때 자주와 민주, 그리고 노동해방을 외치며 이 나라의 최좌익을 자처하던 이재오, 박계동, 차명진 의원 등 구 운동권 출신 고위급 핵심참모들은 이러한 이명박 씨의 구태의연한 색깔론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언명했다는 것도 역시 자칭 한국 보수우익의 전통에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색깔론은 2004년 말 같은 한나라당 주성영의원이 제기한 국회내 노동당원 주장을 야기된 논란으로 정국을 뜨겁게 달구며 정점을 이루었었다. 국민의 의식변화가 어느 정도인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공세로 정치적 패배를 맞보아야 했던 한나라당으로서는 이 사건으로 더 이상 색깔론 공세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내부적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대도 아직 이런 색깔론을 제기하는 데는 참여정부에 대한 일부의 실망과 50, 60대 유권자들의 수구적 반공대결의식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극히 실용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한나라당 새 대북정책을 주도한 색깔론의 원조인 정형근 의원조차 달걀을 맞아야할 정도로 변화를 거부하는 일부 수구세력의 표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수구세력의 퇴행적 사고 못지않게 수구세력의 색깔론을 부추기는 것은 정작 색깔론의 대상인 이른바 진보개혁진영이다. 이미 지난 80년 5월을 겪으면서 민주화세력의 상당수는 한국전쟁 이래의 금기를 깨고 스스로 좌파적 의식과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다만 군사독재의 가혹한 탄압을 물리치며 투쟁의 끈을 조여야 하는 상황을 이유로 공안기관의 ‘용공조작’을 규탄하며 국민정서에 부합하려 했던 것이다. 이같은 노력은 나름대로 정당한 측면이 있다. 친일매판 언론을 앞세워 외세와 결탁하여 단정수립이래 강고한 지배동맹을 구축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급박한 현실 속에서 불가피한 전술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87년 이후에는 좀 다른 대응이 필요했다. 친일매판 계승세력에 규정해 놓은 금기를 하나씩 깨뜨리며 실질적 민주화를 확보해가는 道程에서 공안기관이 멋대로 갖다 붙이는 ‘용공친북좌파’라는 딱지를 더 이상 금기어가 되지 않도록 용공조작이라고 대응하기만 할 것은 아니었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과감히 용공친북좌파임을 부인하지 말고 사상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쟁취하는 싸움에 나설 일이었다. 이를 통해 여론도 점차 금기를 벗어나 하나의 일상적 용어로 자리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적 통일과 진보적 개혁을 목표로 삼는 정치세력이 친북좌파가 아니란 말인가. 친북이 반드시 김일성, 김정일의 사이비 사회주의 세습왕조를 지지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다양한 편차가 있겠지만 한반도 북부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권과 친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공존과 재통일을 위한 교류협력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꾀하는 정의로운 경제제도 확립과 고용안정과 복지제도 기타 사회정책의 상당수가 우파적 사고의 산물은 아니지 않는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 세력균형의 실태에 따라 경계가 불확실한 것이지만 한국사회의 진보개혁세력 상당수가 우파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현실적으로 당장의 한 표가 아쉬운 정당으로서는 애매한 중도의 간판으로 뭉뚱그릴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실재로 중도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많을 테지만. ‘친북좌파’적 공세를 끊고 실질적 사상의 자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의 예봉은 민주노동당 등 일부 진보정당과 비정당권인 여타 진보개혁 진영이 이를 과감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교양이고 교양인이라면 타자의 고통을 즐기는 것은 정신병적 치료가 필요한 가학성변태성욕자이다. 어린아이들이 욕설을 배워 쓸 때 부모나 양육자가 민감한 반응을 하면 아이들은 그걸 더 즐기는 경향이 있다. 많은 유아전문가들의 일치된 최선의 처방은 의도적으로 아이의 욕설에 무반응 하는 것이라고 한다. 철지난 ‘친북좌파’ 공세에 과잉반응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저들의 가학적 성욕을 부추기는 것이다.
틈만 나면 색깔론을 꺼내는 이들은 치료가 필요한 가학성변태성욕자(sadist)이거나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확보하는 데 아무런 기여한 바도 없는 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네바다이 하는 현실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의 하나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무엇인지 애써 외면하는 자들과 더불어 핏대를 올리며 대거리 할 필요가 없다. 신들이 내린 복수의 굴레에서 시지프스가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들의 유치한 심리전에 번번이 말려들어 역량을 소모하지 말아야한다. 철없는 어린아이 대하듯 무시하거나 정면대응으로 더 이상 그 같은 소모적 공세가 무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진보개혁진영 스스로의 정체성에 맞갖은 명실상부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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