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책이 만든 나의 삶 1
김봉남, 앙드레 김
99년인가 갓 출범한 국민의 정부, 해방이후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로 탄생한 정부를 흔들고자 수구언론과 정당이 합작으로 만든 이른바 ‘옷로비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특검과 국회청문회까지 여는 등 난리부르스를 떨었다 그렇게 국민의 혈세를 들여서 밝혀진 것은 증인으로 출석한 국내 최고의 의상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밖에 없다는 笑劇으로 끝났다.
숱한 언론과 검찰, 특검, 국회청문회까지 나서서 난리를 떤 코미디를 보며 내 기억은 69년 정월을 향해 단숨에 돌아갔다. 68년까지 함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 부모님과 우리 6남매가 남부여대하여 인근(인근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부모님과 우리 6남매 모두가 세간살이를 이고지고 걷기도 하다가 기차도 타다가 다시 걸어걸어 가는 이사였기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땀을 흘려야 했던, 1.4후퇴를 연상케 하는 ‘고난의 행군’을 방불케하는 행사였을 게다) 사북으로 이사한 첫해 정월이었다.
아마 부모님께서 무슨 일인가 두분 모두 본래 고향인 문경에 며칠간 다녀와야 하셨던가보다. 그때 세 살 위인 형님이 중학교 3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집에 있었고 열세 살인 나를 비롯하여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먼 길을 다녀오시기가 안쓰러우셨던 때문인지 형님과 나에게 다녀올 때 선물로 무얼 갖다 주랴 하고 물으셨는데 형님은 하모니카를 나는 책을 원하였다. 그때 사다주신 책이 69년 1월호 ‘학원’이었다. 아마 영주역이나 제천역쯤의 홍익회매점에서 사오셨을, 빳빳한 표지의 ‘學園’ 에는 내가 읽고 싶은 온갖 이야기가 있었다. 그중에는 그때에도 신문지상과 대한뉴스 등에 심심찮게 보도되던 앙드레 김이 ‘김봉남’이라는 본명으로 경기도 양평의 농촌에서 복식(의상)디자이너라는 하이칼라한 직업을 선택하는데 부모님의 너그러운 태도 등이 어떻게 힘이 되었는지 등을 아직은 젊은이다운 필치로 서술하였다. 미모의 귀족 처녀 록산느를 사모하는, 검술은 뛰어나지만 별 볼일 없는 외모로 인해 끝내 실연하고 마는 비운의 검객 ‘시라노 드 벨 쥬락’의 비애(?). 어느 고등학교에 전학 온 친구가 첫 인사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보지도 않고 낭독하며 기선을 제압하는 이야기 등등 흥미진진한 기억이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살아있다. 표지에 버풀이 날 때까지 보고 또 보아 몇 년 동안은 내용을 달달 외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68년, 그러니까 그해 2월 함백국민학교를 졸업만 하고 당분간 집에서 쉬려고(?) 하는 그 시기에 1.21사태 즉 북한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과 세계최강대국 미국의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함흥 근해에서 북한해군에 나포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곧이어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고 4월에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으며 9월에는 도민증이 폐지되고 주민등록증이 일제히 발급되었다. 아직은 철이 덜 든 소년기여서 군대와 관련된 것에는 본능적인 호의와 호기심을 지닌 터여서 십리는 떨어진 함백광업소 새골사택 광장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함백광업소 직장예비군중대 창설식에 달려가 구경하기도 했다. 꼴도 보기 싫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처지여서 남는 것은 시간밖에 없었으니까.(꼴도 보기 싫은 것은 초등학교가 아니라 모든 학교였다. 따라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은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이를테면 자의반 타의반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먹고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릴없이 놀기도 심심하고 이 무렵 기울어 가는 함백탄광을 벗어나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 탄광촌 사북으로 이직, 이주를 위해 분주하여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부모님의 짐을 덜고 생계를 보테고자 형님과 함께 신문배달 노릇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하여 밥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던 신문을 매일같이 남 먼저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배달부들에게 다른 모든 신문을 얻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나라밖도 들끓고 있었다. 대륙중공의 문화혁명을 지지 확산하려는 학생혁명이 서유럽 전역을 뜨겁게 불사르고 있었다. ‘콩방디’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나중에 유신말기인 78, 79년 무렵 감옥살이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월남전을 반대하는 미국과 유럽각국 학생들의 스튜던트 파워. 그 몇 해 전 소니 리스튼을 물리치고 헤비급 챔피언에 올라 숱한 사람들이 열광하던 시인복서(?) 케시어스 클레이가 어느 날 ‘무하마드 알리’라는 미개한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러더니 월남전에 항의하여 병역을 거부한 때문에 챔피언을 박탈당했다는 것도 68년이 남긴 에피소드였다. 사실 그때는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 아랑 드롱이 ‘골리스트(드골추종자)’여서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도 했지만 구국의 영웅인 박정희와 유사한 이미지의 드골을 물러나게 만든 학생혁명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실은 박정희가 드골의 이미지를 차용(이라기보다 도용이지만)한 것이고 육군 장성 출신이라는 것만 비슷할 뿐 정치에 입문한 과정이나 결말에서는 드골의 지도자다운 군더더기 없는 처신과는 너무나 판이한 박정희였지만. 12년 뒤 박정희의 정치적 계승자인 전두환 역시 가당치도 않게 드골의 이미지를 도용하여 자신의 반란정권을 제 5공화국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케시어스 클레이가 병역을 거부해서 미국정부로부터 처벌받는 것은 그렇다 쳐도 왜 미국챔피언도 아닌 세계챔피언을 박탈당해야 하는지는 납득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만 해도 군사혁명 직후 박정희가 원수계급장을 받고 하야하려 했으나 미국국회가 우리나라 군대에 원수계급을 인정하지 않아 무산되었다는 어른들의 술집 뒷담화가 터무니없는 항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정도의 상식은 내게 있었다. 아니 우리나라 군인계급 정하는 걸 왜 다른 나라 국회가 되느니 마느니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런 내 상식은 민족적 자주의식이 초보적으로나마 발동된 측면이 있었을 게다. 그 이상으로 세계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정의로운 나라 미국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라는 뒷심이 컸을 터이다.
그때 나는 중앙일보를 돌리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8월 하순이었다. 이미 그 해 봄부터 프라하의 봄에 관한 흥미진진한 기사가 외신면에 때로는 1면에 단골로 실리고 있었다. 77선언, 두브체크서기장, 스보보다 대통령, 후사크 서기, 자토벡과 코시긴, 브레즈네프, 그로미코 등의 동정이 거의 날마다 알려지고 있었다. 내가 신문을 접하기 훨씬 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날 무렵 일어난 헝가리와 폴란드사태를 신문으로나마 목격하지 못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던 중이었다.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세계사의 드라마를 내 오감으로 인지했을 것이고 기껏 역사로만 읽고 듣는 것과 엄청나게 달랐을 것이라는 아쉬움. 이 모오든 아쉬움을 단꺼번에 날리는 숨막히는 기사가 중앙일보를 비롯한 모오든 신문에 시꺼먼 헤드라인으로 박혀있는 것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소련지도부가 바르샤바 조약군을 앞세워 탱크를 몰고 프라하로 진입한 것이다.
하벨과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군 장교로 복무하던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영웅, 인간기관차 자토벡은 물론 수많은 프라하 시민 학생들이 소련군에 저항을 시도하였지만 아시다시피 모두 무위로 끝나게 된다. 사실 80년 5월의 한국민중, 그보다 60년 4월의 우리 청년학생들이 보여준 것같은 저항 따위는 없기도 했다. 소련이 지휘하는 바르샤바군의 보도통제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부다페스트와 바르샤바는 어땠는지 몰라도 68년의 프라하는 그렇게 치열해 보이지는 않았다. 몇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60년 마산과 서울의 청년학생들과 80년 5월 이 땅을 피로 물들게 했던 가열 찬 항쟁을 보도하는 기사는 없었다.
어쨌든 노보트니를 쫓아낸 두브체크 공산당 서기장과 군부출신의 스보보다(체코어로 ‘자유’라는 뜻이라고 그때 신문에는 보도되었다.)대통령, 하벨을 필두로 한 77그룹의 젊은 지식인들과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의 투쟁은 그렇게 좌절되었다.(‘체코’라고 줄여 쓰고 싶지만 벨벳혁명이후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였으므로 체코라고만 쓸 수는 없게 되었다.) 그 뒤로 가을 내내 중앙일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각종 문학과 문화 등을 시리즈로 내보내어 체코민중의 좌절에 대한 연대성을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보편적 세계인의 양식과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고 함께하려는 우리언론의 드높은 교양정신과 지성을 보여 준 것이다, 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 뒤의 이 신문의 행적으로나 이러한 보도에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은 공화당정권의 성격으로나 하나같이 비슷한 보도를 내보낸 모오든 신문 방송을 살펴 볼 때 이 모오든 것은 빨갱이들의 과오를 드러냄으로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 뒤지고 있던 부일매국잔당 세력의 숨통을 열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깡패들 사시미 휘두르듯’ 때만 되면 휘둘러대는 반공놀음이 무시로 벌어지던 때이기도 하였다.
그때 아마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무렵이었을 앙드레김-김봉남-과 몇몇 명사들이 남긴 아마 젊은 날 인생의 전환을 이룬 터닝포인트 비슷한 글을 보면서 열 세 살의 백수가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파란 꿈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72년 열일곱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 사북탄광의 소년광부로 취직한 뒤 나름의 우여곡절을 겪고 80년 4월을 맞이하였다. 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흥분하여 동분서주. 몇 가지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노동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북과 탄광노동에 나를 뿌리박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사회민주화의 길로 접어들었던 자취에서 그때마다 읽었던 신문과 책들은 중요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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