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 이제는 말해야 한다
1992년 중부지역당 사건 황인오씨 특별기고
황씨는 당시 남파공작원에 포섭돼 노동당에 가입, 북한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내려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한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돼 무기징역이 확정됐다가 1998년 사면조치에 의해 석방됐다.
황씨는 2001년 가톨릭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후 2003년 연세대 사학과로 편입, 지난 8월 졸업했다.
황씨는 민족의 평화적 재통일을 위해 북한의 민주적 변화가 시급한 문제임을 인식해 오다 11월2일 유럽연합이 유엔에 제출한 북한인권 특별결의안에 관한 KBS 시사토론을 보면서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토론자들의 발언에 실망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북한 인권 결의안은 17일(현지시간) 사상 처음으로 유엔 총회에서 통과됐다. 우리 정부는 당초 방침대로 기권했다.
황씨는 현재 남한사회에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새터민(탈북자)들의 자립을 지원 상담하는 기관(가칭 새터민자립지원센터)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기고 전문(全文)을 싣는다. 2005년11월29일
유엔 총회 북한 인권 결의안 통과
최근 유럽연합이 유엔 총회에 북한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특별결의문을 제출하여 사상 처음으로 통과됐다. 한국은 당초 방침대로 기권했다. 그 동안 우리 정부는 북한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을 배제하고 분단구조를 해소할 수 없는 현실에서 언제든 깨어지기 쉬운 남북관계를 제도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여 이 문제에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실질적인 경제지원으로 북한의 체제 개방을 유도하는 조용한 방법이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 정부의 사려 깊은 접근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본다. 사실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 당국의 유연성을 높여 체제 붕괴의 두려움 때문에 쇄국의 울타리로 후퇴하려는 유혹을 억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서발 막대를 휘둘러봐도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나라 하나 찾을 수 없는 냉혹한 국제현실 한 가운데 있는 북한 당국에게, ‘햇볕’을 거두지 않고 있는 남한만한 버팀목이 없을 터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정부까지 나서서 자신들의 약점을 건드린다면 얼마나 심한 좌절을 느낄까.
그런데 최근 현대아산과의 다툼에서 북한이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여 준 것은 ‘퍼주기’라는 남한 사회 일부의 비판 여론이 확산되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상식적인 드잡이 기질이 충분히 교정된 것은 아니지만 북한도 이제는 내외의 여론, 특히 남한 사회의 여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름대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문명사회가 일반적으로 요청하는 보편적 인권과 합리적 교역 원칙 등을 북한 측에 인지시키고 이를 내면화하는 훈련 과정을 본격화할 계기를 맞은 것이다.
북한 인권 문제의 심각성
북한의 인권 문제는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공개처형을 비롯한 반인도적인 고문과 구금 등 북한 주민의 인권이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일부 왜곡과 과장이 있더라도 군사독재 시절 우리가 체험한 것처럼 유언비어의 난무 자체가 가혹한 통제와 억압의 산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한사회는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진보, 민주세력의 반독재 투쟁 끝에 자유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값진 경험을 가진 우리가 북한 동포들이 대를 이은 일가독재(一家獨裁) 치하에서 물질적인 궁핍과 함께 기본적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이 사태를 ‘현실적 접근’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하는 동안 우리는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치 못한 방관자가 될 뿐이다.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한 장준하의 언명은 이제 유통기간이 지난 정치적 수사다. ‘통일’ 그 자체보다는 ‘어떤 통일인가’가 더 중요하다. 민족의 정신적 물질적 삶이 향상되거나 최소한 악화되지는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통일은 모든 남북 주민들이 열망하고 추구할만한 것이 된다. 적어도 남한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인권을 누리는, 다시 말해 북한 동포의 구체적 삶의 조건에 의미 있는 변화와 발전을 확인하지 못한다면 통일 과정 자체의 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진보, 민주세력의 도덕적 정당성
진보 세력의 도덕적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이제 북한 인권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 과거 군사독재의 반문명적 인권유린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항거를 통해 오늘의 민주사회를 쟁취한 역사를 가진 진보진영이 유독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나 성명서를 낸다고 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남한의 반독재민주화운동 당시, 해외양심세력이 독재정권을 규탄하고 국내 민주세력을 성원한 물심양면의 국제적 연대가 우리의 민주화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던가.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이른바 ‘장기수 송환’ 당시, 동진호 선원을 비롯한 납북자들과 국군포로 가족들의 송환요구를 진보세력이 외면한 것은 앞으로 커다란 도덕적 부채로 남을 것이다. 정치적 고려를 떠나 순수한 인도적 관점에서 우선 납북자들의 생사여부와 소재라도 확인하도록 문제를 제기하고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보편적 인권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중대 사안을 감상적 ‘민족공조론’과 협소한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보수진영으로 그들의 발길을 돌려 세운 것이다. 이것은 일부 보수진영의 반북대결 의식을 강화하고, 이른바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을 유발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아닌가. 강정구 교수에게는 ‘보편적 인권’의 원칙을,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현실적 접근론’을 펴는 일부 ‘진보진영’의 태도는 분단 60년의 불안을 유전인자처럼 지니고 있는 일부 국민들의 오해를 낳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은 약간의 의구심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민주화 운동세력에 대한 도덕적 신뢰를 철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민주화 운동세력의 도덕성과 진보적 원칙을 회복해야 할 때다. 진실로 민주주의와 진보의 가치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반문명적 인권 유린 사태 앞에서 침묵해야 할 어떤 ‘현실적인 이유’도 없다.
한반도 평화구축과 북한인권
거듭된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에 우리사회가 지금과 같은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면 조만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성될 한반도의 긴장국면에서 또 다시 주도권을 잃고 피동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핵문제 다음에 제기될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중재, 조정하는 명분과 힘을 축적하기위해서도 시급히 우리 시민사회와 정부가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 이는 미국 정부와 주류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한국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하고 한미동맹의 재조정 과정에서 우리의 국가적 이익을 좀더 폭넓게 반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북한의 반발과 남북관계의 일시적 교착은 언제든 겪어야 하는 것이다. 대세는 개방과 교류, 인권과 민주주의의 편에 있다. 확고한 신념과 원칙에 따른 일관성 있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남북 관계를 올바른 궤도로 조정하는 데 기여할 것이며, 북한이 인권 문제에 대해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개선의 노력을 취할 수밖에 없도록 떠밀고 갈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북한을 위한 길이며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한반도의 민주적 재통일은 물론 동북아의 도덕적 균형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북한의 민주적 변화를 유도하는 첫번째 고리로서 반문명적 인권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스스로 진보와 민주적 가치를 신봉하는 양심적인 세력이라고 믿는다면 북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태도다. 이를 통해 고질적인 색깔논쟁을 종식하고 분단구조의 해체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민관 모두 다양한 접촉과정에서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냉전구조 해소의 기운이 북한 주민에게 실질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문명사회가 보편적으로 승인한 원칙에 따라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진보와 보수를 넘어 모든 시민사회가 정당한 몫을 다할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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