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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자료

소한마리-화절령- 2007. 12. 6. 17:23

독일의 전후과거사청산노력


 1.독일전범들(1933~1945, 12년 3개월 나치집권기간) 어떻게 처벌됐나


1-1.자살한 사람들


아돌프 히틀러: 총통, 국가사회주의독일근로자당(나치스) 당수, 자살

헤르만 괴링: 대원수, 공군총사령관, 나치스 권력서열 2위, 사형 직전에 자살

하인리히 히믈러: SS 사령관, 게슈타포 총책, 내무장관, 예비군 사령관, 영국군에 잡혀 음독자살

파울 요제프 괴벨스: 선전상, 독일문화회의 의장, 베를린 총통관저 지하호에서 자살

마르틴 보르만: 나치스 부당수, 총무장관, 베를린전투 현장에서 소련군에 의해 사살

로베르토 라이: 독일노동전선 위원장, 뉘른베르크 재판 도중에 자살

칼 홀츠뢰너: 의학박사, 강제수용소 수용자 및 소련군포로 상대로 생체실험, 영국군에 체포되어 자살


1-2.사형선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상, 1946년 10월 16일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빌헬름 프리크: 내무상, 나치당 창당멤버,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한스 프랑크: 나치당 수석 법률고문, 폴란드 총독, 아우슈비츠 건립,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나치당 외교부장, 나치즘 최고이론가,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나치당 바이마르 지부장, 뉘른베르크 지부장,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에른스트 칼덴브루너: SS 산하 보안경찰 SD 총책, 뉘른베르크에서 서형

빌헬름 자이스잉크발트: 오스트리아 총독, 네덜란드 총독,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프리츠 자우켈: 독일 노동부 노동총감, 750만명의 강제노동인력 지휘,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빌헬름 카이텔: 원수, 독일국방군총사령부(OKW)장관(합참의장 정도),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알프레드 요들: 육군원수, 국방군 산하 육군참모총장, 뉘른베르크에서 사형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부사령관, SD총책, 체코총독, 1942년 6월 5일 체코인 레지스탕스 공격으로 피살

테오도르 아이케: 다하우 강제수용소 초대소장, 전지역의 강제수용소 최고책임자, 전후 처형

아돌프 아이히만: 게슈타포 유태인문제담당국장, 1944년 헝가리유태인 80만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수십만 처형, 1962년 12월 5일 교수형

한스 루돌프 헤스: SS해골부대장,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장으로서 75만명 살해, 1947년 6월8일,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

프란츠 칠라이스: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장으로서 6만5천명 살해, 전후 교수형

요제프 크라머: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장, 3만7천명 살해, 영국군에 체포되어 교수형

카를 코흐: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장, 독직과 공금횡령혐의로 1945년 나치친위대에 의해 처형

일제 코흐: 카를 코흐의 아내, 피수용자들 다수를 가학적으로 고문살해, 종신형 선고받고 자살함

유르겐 슈트로프: SS소장, 1943년 4~5월 바르샤바게토 유태인들의 봉기 진압, 그리스정부에 의해 교수형

안톤 도슈틀러: 독일 제75군단장, 1944년 1월 이태리에서 미군특공대원 13인 처형, 1945년 10월 12일 사형

지그문트 라셔: SS소장, 다하우, 오베르부크르 수용소 등에서 피수용자 생체실험 지휘, 히믈러에 의해 사형


서독, 동독 정부에서 비나치화 재판으로 뉘른베르크 피해간 나치잔당 처벌


1-3.종신형 & 징역형


발터 풍크: 나치당 협력 사업가, 독일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총재,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에리히 레더: 1차대전 당시 해군함장, 1928년 독일해군참모총장, 1943년 해임, 뉘른베르크에서 종신형 선고

발두르 폰 쉬라하: 히틀러 유겐트 설립자, 교육장관, 뉘른베르크에서 20년형 선고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반성, 20년 복역 후 1966년에 출소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상(~1938.2), 체코 총독(1938.3~1941.9), 징역 15년형,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2년후 사망

빌헬름 샤하트: 바이마르공화국 시절부터 재무상을 지내며 독일경제 재건, 징역 10년형

한스 프리체: 선전상 관료, 무죄 석방되었으나 비나치화 재판에서 유죄, 모든 공민권 박탈

프리츠 티센: 1923~1939년 나치당에 협력하고 거액의 정치자금 제공, 1931년 나치당 입당, 1939년 반나치가 되어 스위스로 탈출, 1941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종전시까지 강제수용소에 구금


거의 모든 독일군 장성들이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공민권이 박탈되었다. 나치에 협력했던 자본가 크루프재벌, 쿠르트 폰 슈레더, 칼 베헤슈타인, 알베르트 페글러 등은 자기 소유기업이 해체되고 지분도 완전히 몰수되어 소시민으로 살았다. 나치당 윗대가리와 중간급 간부들은 사형 내지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하급당원도 공민권 박탈됨. 강제수용소 근무자는 일개 사병도 실형을 살았다.


전후 독일은 나치시대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 반나치 운동가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여 철저한 반나치, 비나치화 시대를 구축하였다.


콘라트 아데나워: 쾰른 시장, 가톨릭중앙당 실력자, 1944년 히틀러암살계획에 가담하여 강제수용소 구금, 서독의 초대 총리, 기독교민주당 당수

쿠르트 키징거: 변호사로서 반나치활동가들 변호, 나치의 위협으로 은둔, 전후 서독 국회의원, 사민당-기민당 연립내각 총리, 기민당 위원장

빌리 브란트: 1933년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 1940년 스웨덴으로 망명, 신문기자 겸 반나치스운동가, 1946년 뉘른베르크재판 취재, 서베를린시장과 사회민주당당수 역임, 1969~1974년 서독 총리,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무릎꿇고 참회, 동독 방문하여 국교 재개, 공산당 합법화, 1971년 노벨평화상 수상


*지멘스사 남경지사장이자 나치당 남경 부지부장인 욘 라베는 1937년 12월 남경의 외국인거주지인 '국제안전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중국인 25만명을 수용했다. 물론 일본군은 안전구에까지 들어와 중국인 수만을 학살했으나 나치당원 직위를 내세운 라베의 활약으로 수만명의 중국인이 살아났다. 한때 그의 집에 수백명의 중국인들이 살았고 라베는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1940년 일본의 항의에 의해 독일로 소환되어 게슈타포의 조사를 받았다. 1945년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공민권이 박탈되었으나, 1948년 비나치화 재판에서 "나치를 싫어했고, 중국인 수만명을 살린 공로"가 인정되어 공민권을 회복하고 지멘스사에서 복직되었다. 1950년 병사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


-반전운동은 왜 패배했고 패배는 어떤 상처를 남겼는가?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애타게 기다렸던 대표들이 연단 구석에 마침내 모습을 나타내자 회의장[인터내셔널 사무국 회의-인용자]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일어났다. 우렁찬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기쁨과 친근감과 신뢰감을 보여주는 갈채였다. 그리고 아무런 지시도 없었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인터내셔널의 노래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으로부터 터져 나오면서 요란한 갈채 소리를 뒤덮었다. (중략)....지금 대륙의 운명이 붕괴 직전에 놓인 이 시기에 전 유럽의 노동자들은 이 작은 연단에 의해 대표되고 있었고, 한결같이 집요하고 엄숙한 기대를 걸고 있는 몇천 명의 시선이 이 연단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다.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티보 가의 사람들 4: 1914년 여름(중)>, 정지영 옮김, 민음사, 216쪽.


이라크 전쟁과 북핵위기는 전 세계 민중에게 전쟁반대운동을 공통의 긴급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9.11 테러 이후 본격적인 군사적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며 성장해온 최근 몇 년간의 세계민중운동도 '전쟁 반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투쟁에 나서고 있다. 특히 수천만 세계인이 참여한 지난 2월 15일의 반전시위는 이라크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한껏 드높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최초의 대규모 살상전이엇던 제1차 세계대전과, 이를 막기 위해 펼쳐졌던 유럽 노동자들의 투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제국주의 세계질서는 지금의 세계화 바람을 능가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광풍(狂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동반한 전쟁의 위험도 지금에 못지 않았다. 또한 이에 맞선 유럽 노동계급의 반전 결의도 2월 15일의 장관(壯觀)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은 '결국' 일어났다. 노동계급의 반전투쟁, 최초의 국제적 반전투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의 세계민중운동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면서. 이는 결코 100년 전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벌거벗은 제국주의가 21세기의 우리에게 다시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당시의 투쟁과 그 패배는 지금 우리가 답해야 할 다급한 물음이기도 하다.


1. 전쟁의 먹구름 뒤에는 자본주의가...


20세기 초반은 한 마디로 전쟁의 시대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최초로 세계전쟁이 일상이 된 시기였다. 자본주의는 지옥의 밑바닥까지 갔다가 미국이라는 새로운 강대국과 함께 그곳에서 벗어났다. 이 위기의 시대의 출발점이 바로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부르주아 문명의 폭력성을 토해내고 그 유령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본래 대규모 살상 전쟁은 산업자본주의의 역사에서 결코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자본주의의 중심부인 유럽에서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긴 평화의 시대가 계속됐다.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들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전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지만, 1914년까지 40여 년 동안 자본주의의 한 복판을 뒤흔드는 그런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장기평화의 시대는 은밀히 장기전쟁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세대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이라고 생각돼왔던 세계자본주의, 그것이야말로 전쟁의 씨앗을 낳은 원흉이었다. 1870년대 초의 세계불황을 극복한 뒤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과 달랐다. 자본가들은 이제 경공업이 아니라 중화학공업에서 살길을 찾았다. 대규모 공장을 경영하는 독점자본가가 등장했다.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 동안 세계자본주의의 최선두에 서온 영국보다도 세롭게 산업화를 추진한 미국이나 독일이 후발자의 이점을 누리게 됐다. 미국과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영국의 구닥다리 동료들보다 훨씬 홀가분하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새로운 자본주의, 즉 독점자본주의는 애초부터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었다. 첫째, 각국의 독점자본은 안정적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필요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광적인 해외 식민지 장악 경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1900년대에 들어서면 지구상에 남아 있는 땅이 별로 없었다. 100년 전의 세계화는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 확보 경쟁은 곳곳에서 군사적 충돌을 야기했다. 아프리카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1906년과 1911년 영국과 프랑스, 독일 3국의 모로코 위기는 그 대표적 사례였다.


둘째, 중화학공업은 군수산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독일 최대 재벌 크루프 가문의 제철공장은 거대 야포를 생산하는, 독일군의 최첨단 병참기지였다. 각종 소총과 기관총의 생산도 수지가 맞는 장사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폼 나고 실속이 있는 것은 조선산업이었다. 영국과 독일의 대규모 조선소들은 경쟁적으로 군함을 만들어 대느라 쉴 틈이 없었다. 전쟁 직전 5년 동안 군비경쟁은 각국의 예산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수준으로 치달았고, 그 뒤에서 가장 재미를 본 것은 바로 독점자본가들이었다.


레닌은 독점자본주의의 이러한 특성들을 '제국주의'라는 말로 정리한 바 있다. 그럼 제국주의의 군사적 측면은 어떻게 세계전쟁의 폭발로 발전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열강들이 집단안전보장의 열쇠라고 생각했던 군사적 블록의 건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손잡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1907년에는 영국이 프랑스, 러시아와 삼국협상을 맺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유럽대륙의 세력관계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며 이간책을 써왔었다. 그리고 프랑스, 러시아와는 오랫동안 숙적 관계였다. 그런데도 자국의 외교적 전통을 어기면서까지 프랑스, 러시아와 군사동맹에 나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흥 자본주의 강국 독일에 해나 견제 욕구 때문이었다.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모든 고려 요소들을 압도했다. 각국의 행동양식의 변화 뒤에는 이렇게 세계자본주의 구조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군사블록의 건설은 집단안전보장이 아니라 집단전쟁보장의 효과적 수단이었다. 원래 기대된 것은 상대편 나라 뒤에 있는 다른 강대국들의 존재 때문에 어떤 나라도 쉽게 도발하지 못하리라는 논리적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몇몇 동맹국의 국지전이 조약의 구속력 때문에 관련되 모든 나라들 사이의 교차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가능성이었다.


각 군사동맹 속에 존재했던 '약한 고리'들이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제국 내의 슬라브계 피억압민족들(체코와 남슬라브 민족들)의 독립 요구 때문에 붕괴 일보직전에 있었다. 삼국협상의 한 당사자인 러시아는 1905년 혁명에 뒤이어 1914년 여름에도 혁명의 위기에 부딪혔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8일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백년 전의 알 카에다?)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 당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두 나라는 이 사건에서 국내의 위기로부터 탈출할 사광을 보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강경한 최후통첩을 보냈고, 세르비아의 후견국인 러시아는 전시동원령의 준비로 이에 대응했다. 그리고 여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인 독일이 끼어 들고, 러시아의 우방 프랑스와 영국이 동참했다. 최초의 세계대전은 이렇게 해서 현실이 되었다.


2.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투쟁과 그 패배


1차 대전은 최초의 세계 전쟁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도 이전의 전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규모로 존재하며 게다가 이들이 국제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각국의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이들의 국제적 단결의 상징인 제2인터내셔널이 바로 그 새로운 요소였다.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자국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위해 노동자 민중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는 짓이라고 가르쳤다.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심상치 않은 군비경쟁이 계속되고 두 차례의 모로코 위기에 이어 발칸반도에서 전쟁이 빈발하자 가국 노동운동의 경각심은 더욱 높아졌다. 1907년 독일 쉬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며 전쟁의 가능성에 맞서 싸우겠다고 결의했다. 전쟁으로 치닫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를 막으려는 힘도 강력해지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쉬투트가르트 결의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전쟁 정책에 대한 저항이 막연히 언급되어 있을 뿐 그 구체적인 수단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국 노동자정당 내의 좌파는 총파업을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지만, 바로 이 반전총파업에 대해 우려하거나 자신 없어 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다수파가 그러했다.


SPD는 인터내셔널의 맏형이었다. 110만 당원과 30%대의 득표를 자랑하는 SPD는 누가 뭐라 해도 맑스-엥겔스 사상의 직접적 후계자였고 권력 장악의 최선두에 선 정당이었다. 그러나 이 당은 노동운동의 전수로서 총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제도 정치의 틀을 넘어서는 대중 행동에 대한 터부가 존재했다. 섣부른 대중 행동은 SPD가 30년 넘게 이룩해온 거대한 조직 기반들을 탄압의 회오리에 내맡기는 짓이라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이런 SPD로서는 인터내셔널에서 구속력 있는 결정으로 반전총파업 전술을 결의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또한 SPD 내에는 세계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안이한 낙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당의 최고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는 제국주의가 발전할수록 열강들끼리의 경쟁보다는 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따라서 세계 전쟁의 위험은 적어진다는 '초제국주의'이론을 내놓았다. 이런 시각에서 독일의 당은 자국 내에서 군부와 군수산업 독점자본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대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오직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당내 좌파만이 군대 내의 가혹 행위 등을 공격하면서 군부의 득세에 도전하고 나섰다. 군국주의의 배후에 있는 1870년대 이후 독일 제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수혜자 중 한 부분이 바로 독일 노동계급이었다는 사정이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인터내셔널 내에서 반전 결의를 선도한 것은 프랑스 사회당(SFIO)이었다. SFIO는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반전 토론을 주도했다. SFIO쪽의 많은 지도자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반전총파업 전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장 조레스는 당시 서로 소원한 관계에 있던 SFIO와 CGT(프랑스 노총)을 반전-반군국주의의 기치 아래 단결시키며 국제반전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독일의 동료들과 달리 조레스가 군국주의를 단호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898년의 드레퓌스 사건(프랑스 군부가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무고하여 처벌한 데 대해 프랑스의 민주세력이 단결하여 드레퓌스를 옹호하고 나선 사건)때부터 보수적인 군부와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그는 1910년 '새로운 군대'라는 군대개혁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되어 있던 군부의 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조레스는 프랑스 노동계급의 반전 의지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운동이 한 사람의 지도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반전투쟁의 열쇠는 독일과 프랑스의 두 당에 이었다. 전쟁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이 두 나라였고, 인터내셔널 내에서 노동운동이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나라도 이 둘이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 노동계급이 공동 행동을 성사시키면 전쟁은 저지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어느 나라의 운동도 이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 이는 각국 정부가 마주하던 상황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목숨을 건' 게임이었다. 두 나라의 당이 모두 탄압을 무릅쓰고 봉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라도 엉거주춤하면 다른 한 쪽만이 희생자가 된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은 점점 더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는 SFIO의 바이양과 영국 독립노동당의 케어 하디가 내놓은 반전총파업 전술 결의를 격론 끝에 다음 대회 안건으로 넘겨버렸다. 1912년 10월의 발칸전쟁 위기 때문에 열린 바젤의 임시대회에서는 반전 입장이 다시 선언되었지만, 뚜렷한 전술 계획의 확정은 역시 다음 대회의 과제로 연기되었다. 다음 대회는 1914년 8월 비엔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즉, 전쟁 직전까지도 인터내셔널에는 반전 결의만 있었지 이를 실현시킬 아무런 구체적 행동 전술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가운데, 전쟁 발발 1년 전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각각 반전세력 측의 중대한 후퇴가 있었다. 1912년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 SPD는 1913년 군함건조를 위한 베트만-홀베크 수상의 국방예산 증액안을 찬성해주었다. 찬성의 근거는, 비록 군비증강 예산안이기는 하지만 그 재원 조달 방식이 직접세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직접세 비중의 확대는 SPD의 강령에 명기된 당 정책이었다. 변명치고는 아주 고상한 변명이었다. 한편 같은 해 프랑스에서는 의무병역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다. 독일과는 달리 프랑스 노동운동은 이에 맹렬히 저항했다. 이 해의 파리코뮌기념일에 SFIO와 CGT는 파리의 생-제르베에서 대규모 반군국주의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7월에 이 법안은 통과되고 말았다.


1914년 6월 28일, 전쟁 위기가 시작되자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한 군데, 인터내셔널로 집중됐다. 인터내셔널의 노래처럼 노도자 국제조직은 "인류를 하나로 만들" 것인가? 한 달 동안 각국 정부 사이의 탐색전과 전시동원의 준비가 계속될 때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수십만 명 규모의 반전시위가 계속됐다. 유일한 수단은 반전총파업임이 회자되었다. 희망이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7월 29~30일 브뤼셀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사무국회의는 전쟁을 반대하는 마지막 대규모 시위의 장소로 바뀌었다. 대중들 사이에서 최초로 애국주의의 광풍이 불었던 오스트리아의 당 지도자들이 "반전투쟁은 불가능하며 조직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낙관주의가 지배했다.


당 재산의 국외 반입을 추진하는 등 비합법 상황을 준비하고 있던 SPD는 밀사 헤르만 뮐러를 프랑스로 긴급 파견했다. 선전포고가 임박한 상황에서 프랑스 동지들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뮐러가 파리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날이 8월 1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저녁에 조레스가 극우파 청년의 권총에 암살 당했다. 파리에 도착한 뮐러와 프랑스 당 지도자들은 서로 "저쪽이 과연 봉기할지"를 탐문했다.


탐문의 결과는 이틀 뒤에 밝혀졌다. 8월 3일, SPD의원단은 정부의 전시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찬성을 의미했다. 다음날 파리에서는 조레스의 장례식이 벌어지는 가운데, SFIO 의원단이 자국의 전시예산안을 승인했다.


3. 세계전쟁의 여파와 1914년 여름의 교훈


자국 정부의 선전포고를 지지하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모두 자기 나라가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방어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러시아에 대해,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방어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기묘한 '방어전쟁'은 4년 반을 끌었고, 2천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관총과 대포의 위력에 독가스까지 가세하여 전투 한 번 할 때마다 100만명 단위로 목숨을 잃거나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 쌍방이 모두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상황에서 전선은 어느 한 쪽도 전진할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인류는 수천만의 목숨 값으로 현대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다.


물론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서 반전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 8월 4일, 그 날 밤 SPD 좌파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아파트 방에 모여 반전투쟁을 결의했다. 이들은 "적은 국내에 있다"는 구호 아래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어느 쪽에서도 승전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두 번째 겨울이 다가오자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다시 반전 여론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 곳곳에서 시위가 빈발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1915년 가을 스위스 침머발트에서는 각국의 반전 좌파가 한 데 모여 반전투쟁과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결의했다.


전시 하에 반전운동을 주도한 것은 병역을 면제받은 군수산업의 노동자들과 주부들이었다. 자동차 산업. 조선산업 등의 젊은 노동자들은 전쟁을 지지한 과거의 지도자들 대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열어나갔다. 이들이 전후 노동운동의 주역이 된다. 한편 남성들이 전쟁터로 끌려간 뒤 후방에 남아 세상을 움직인 것은 여성들이었다. 1차 대전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고 주부들은 계엄령 아래서도 과감하게 시위를 벌였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은 바로 생계비 인상과 물자부족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시위(3월 8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정치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독일에서는 군부가 문민정치인을 대신해 실권을 장악했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극우파로 거듭 났다. 이제는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 아니라 "정치가 전쟁의 연장"이었다. 정치는 극히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제2인터내셔널에 뿌리내렸던 평화혁명의 꿈은 이제는 의문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새로운 정전(正典)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적어도 레닌이 보기에는 최악의 폭력(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대항폭력뿐이었던 것이다.


사회 자체도 군사화했다. 20대를 참혹한 전쟁으로 보내고 온 젊은이들 중에 상당수는 확고한 반전의 신념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보다 결코 적지 않은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증오와 살육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극우정치단체의 좋은 포획감이 되었다. 그 중에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아돌프 히틀러가 있다. 이렇게 전쟁이 일단 끝나고 나서도 다시 한 세대 동안 세상을 항구적 전쟁 상태에 빠뜨려 놓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막상 전쟁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반전운동이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전쟁이 그 본 모습을 드러내면 반전투쟁은 예전보다 더 단호하고 더 대중적으로 타오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투쟁의 양상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래도 문명의 옷으로 가려졌던 많은 것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고통스러운 모습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전쟁에 반대하고 이를 최대한 방지하는 모든 대중행동은 '무조건' 정당하다. 포앵카레(1차대전 발발 당시의 프랑스의 호전적 대통령)든 토니 블레어든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바로 이들이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지금도 그 길을 따르고 있다. 전쟁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는 국민투표조차 불가능한 만큼 민주적 의사표현의 최후의 수단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가장 효과적으로 불복종 행동을 전개하는 것뿐이다.


100년 전 유럽의 노동자들은 그 한 수단인 반전총파업을 결행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뒤를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과 아우슈비츠 즉 '전반적 전쟁의 시대'가 뒤따랐다. 100년 뒤의 우리에게 도래한 또 다른 전쟁의 위기가 인류에게 그 때의 시험이 다시 제기된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1914년 7월에 발생한 유럽의 비극적 몰락의 기본적인 원인은 동유럽과 중유럽에서 민주세력이 자신들의 사회에 존재하는 군사주의적 요소를 통제할 수 없었던 무능함과 그럼으로써 군주정이 충성스런 민주적인 신민들이 아니라 무책임한 군사전문가들에게 권력을 양위했던 것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D.C.Watt.E 홉스봄, <제국의 시대>, 김동택 옮김,1998, 558쪽에서 재인용.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1차 대전을 낳은 '자궁'(B. 브레히트)은 결코 그 생산력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번 전쟁의 배후에도 의뭉스런 낯짝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의 이름은 '제국주의' 혹은 '세계화' 또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다. 달리 말하면, 반전운동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루프 (독일 기업가)  [Krupp, Alfred, 캐넌 킹]


독일 기업가, 기업경영인


별칭은 대포왕(Der Kanonenkönig).

1812. 4. 26 베르크 대공작령 에센~1887. 7. 14 독일 에센.

주강대포를 비롯해 여러 무기류를 개발·판매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의 실업가.

크루프 공장은 1847년경부터 병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크루프사). 1811년 크루프 가문의 기업을 설립했던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1826년에 사망하면서 아들인 알프레트 크루프에게 가동이 거의 중단된 작은 공장과 함께 양질의 주강을 제조하는 비법을 남겨주었다. 14세의 나이로 회사를 떠맡게 된 그는 얼마 후 주강압연기를 제조하기 위해 생산시설을 확충했다. 그는 새로운 기계들을 설계·개발해냈으며 숟가락과 포크를 생산할 수 있는 스푼 압연기를 발명했다. 또한 정부 조폐국에서 사용할 압연기를 생산하기도 했다. 크루프는 새로운 고객을 얻게 되었으며, 회사의 원자재 구매를 늘리고 자본금을 확충하여 회사의 규모를 확대했다. 그는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된 최초의 세계박람회인 '대박람회'에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인 1,950kg에 달하는 주괴(鑄塊)를 선보였다.


철도가 출현하면서 크루프의 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철도 산업 초기에는 열차 차축과 주강 스프링만이 유일한 생산품이었으나, 1852년 크루프가 최초로 이음매 없는 강철철도 바퀴테를 생산했다. 이후 그는 3개의 철도바퀴테를 포개놓은 모양을 회사의 상표로 채택했다. 또한 그는 1862, 1869년 유럽에 베서머 제련법과 평로제강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크루프는 그가 제련한 철강의 품질을 증명하기 위해 총기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로이센 내에서 총기류를 판매할 수 없었다. 1856년 이집트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았고, 1861년에는 벨기에로부터, 1863년에는 러시아로부터 각각 주문이 들어왔다. 그결과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중에 그의 총기류가 사용되었고, 그때부터 크루프의 기업은 '독일의 무기고'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근대적인 전쟁을 창시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크루프사는 46개에 달하는 국가에 무기를 공급했다.


크루프는 일찍이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문제를 인식하여 그의 기업 근로자들을 위한 포괄적인 복지제도를 창안했다. 1836년 초 그는 질병 및 장례기금을 마련했으며, 1855년에는 산재장애인들과 퇴직근로자들을 위한 연금기금을 조성했다. 그리고 1861년에는 근로자들을 위해 주택·병원·학교·교회 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크루프의 고용인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단지 7명의 고용인으로 시작했던 제철소가 그의 사망 당시에는 2만 1,000명에 달하는 고용인을 거느린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