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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CBS 시사쟈키

소한마리-화절령- 2007. 12. 17. 21:50
황인오, " 이근안은 용서해도 정형근은 용납 어려워"
조회(75)
정치,사회의 혼돈 | 2004/12/16 (목)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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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오, "이근안은 용서해도 정형근은 용납 어려워"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나는 그 유명한 이근안씨로부터도 80년과 83년 두 번에 걸쳐서 갖은 악행을 당한 바 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그 사람들과 원수를 삼지는 않는다. 어쨌든 역사의 현장에서 배역이 달랐으니까.
그러나 정형근 의원 같은 경우는 현직을 나와서 까지 자꾸 이런 식으로 재탕 삼탕을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12년 전의 사건인데. 최근 다시 논란의 초점이 되니 심정이 어떤가.


황인오>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 또 일어나서 나와 내 가족들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을 헤치는데 대해서 참 불쾌하다. 그러나 다시는 이와 같이 무덤을 파헤치고 관 뚜껑을 열어서 죽은 시신을 다시 훼손하는 것 같은 이런 행위를 이번에는 정말 끝내야겠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잘 된 기회라고 생각을 한다.


'중부지역당'과 황인오 옥중 수기는 안기부의 작품


◎ 사회/정범구 박사>
정형근 의원은 시사자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이철우 의원 간첩설이 과장, 왜곡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 ‘황인오씨가 쓴 옥중 수기에서도, 이철우 의원이 노동당에 가입한 10명 중 1명이었다는 것이 분명히 나와 있고, 또 민족해방애국전선이라고 하는 것이 중부지역당의 다른 명칭이었다는 것을 수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반박했는데.


◑ 황인오>
우선 명칭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밝힐 것이 있다. 우리는 소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는 이름을 작명한 사실이 없다.


우리 자체 조직은 민족해방애국전선이었고, 안기부 수사 과정에서 결국 ‘결과적으로 너희들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규정이 된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럼 당시 안기부의 작명이었다는 말씀인가?


◑ 황인오>
그렇다.


◎ 사회/정범구 박사>
또 수기에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중부지역당의 다른 명칭이었고, 단지 이것을 일부 관계자만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기술했다는데.


◑ 황인오>
일단 그 수기 문제만 나오면 나는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다.


일단 내가 96년도 대전 교도소에서 복역할 당시 나를 담당하던 교도소의 관계자가 법무부에서 제안이 왔다면서 수기를 쓸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정치범들이 글을 쓰는 것을 일체 방해하던 교도소 측에서 내게 특별히 집필 허가를 내줘서 3개월간에 걸쳐서 그 글을 썼다. 글을 쓰고 나서 마침 집사람이 출판 관계 일을 하기 때문에 이 글을 집사람에게 내보내서 출판하게 하려고 했고, 그것을 일단 교도소 당국에 내놨다.


그런데 그것을 집사람이 면회 오기 전에 안기부 직원이 가져갔다. 안기부 담당자가 대전 지부의 이우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안기부 산하의 천지미디어라는 출판사에 넘겨 거기서 자신들 마음대로 가감을 한 것이다. 출판계약은 집사람에게 강제로 받아가고.


교도소 당국자와 이 문제를 가지고 1년간 씨름을 했지만, 갇혀 있는 입장에서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었다.


당시 김대중 민주당 총재의 비서관을 통해 국방 백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안기부 수사관을 통해서 그 교도소당국자가 김대중 후보 쪽에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직접 유출한 것처럼 써 줄 수 없겠느냐, 그 부분을 가필 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 일이있다.


그리고 나서 97년 중반쯤에 그 책을 만들었다고 가지고 왔는데 원래 내가 쓴 원고보다 오탈자가 많아서 뜻이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내 뜻과 아무 상관없는 글들이 첨삭됐고, 이철우 의원이 표시됐다는 조직표는 조직 폭력배나 마약 사범들의 조직표와 같았다. 우리가 옳든 그르든 그래도 명색이 민주화 운동, 조국 통일 운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조직표가 아니다.


거기에는 이철우 의원이라거나 이런 사람들이 행동대원으로 표현돼 있다.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게 표현할 리가 있나.


내 저작권은 완전히 박탕당했고, 그런 표나 몇 가지 내용들이 변조됐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것을 나의 저작물이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을 근거로 한 주장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다.


이철우 의원 이름도 몰랐다


◎ 사회/정범구 박사>
양홍관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철우 의원은 민족해방애국전선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양홍관씨가 관련된 조국통일애국전선이라는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데. 이것은 맞나?


◑ 황인오>
그 사실 관계는 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소위 양홍관씨의 윗선으로 지목되는 최모씨 등은 나와 만나기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조직을 만들어서 활동하던 분들이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활동을 하다가 나를 만남으로써 북한과 연계된 혐의를 뒤집어쓰게 됐고, 나 때문에 조직이 깨지게 됐는데, 실제로 이 조직은 최모씨와 양홍관씨등이 직접 했던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 세부 사항이나 내부 성원들의 사정을 잘 몰랐다.


◎ 사회/정범구 박사>
말하자면 여러 개의 독자 조직을 안기부에서 하나로 묶어서 이런 사건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 황인오>
그런 셈이다. 양홍관씨는 이번에 TV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봤고, 이철우 의원은 면식조차 없다. 양홍관씨는 그래도 이름은 기억하는데, 이철우 씨는 이름도 기억을 못 한다.


이것은 내가 당시에도 그런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안기부 직원들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철우 의원이 소위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와 노동 당기를 걸어놓고 입당식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황인오>
내가 80년데 25세의 나이로 사회 민주화 운동 일선에 뛰어 든 것은 누구와 계약을 한 것도 강요한 것도 아니고, 선서나 맹세를 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이스카웃이나 전국 체전에 나간 선수단도 아닌데, 선서나 맹세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조국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특별히 무슨 종교 단체의 비밀 의식 같은 것이란 아무 필요 없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야 말로 민주화 운동이라든가 이런 활동을 했던 우리들의 족적에 대한 이해가 결여됐거나 아니면 왜곡하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모와 처자식 함께 가두고 협박, 이 보다 더한 고문이 어디 있나?


◎ 사회/정범구 박사>
그리고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이 고문 여부다. 정형근 의원 등은 만약에 이철우 의원 등이 고문을 당했다면 왜 판결문 등에 그에 대한 언급이 한 줄도 없느냐며 반박하고 있고, 정형근 의원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상대를 명예훼손으로 건 모양인데.


◑ 황인오>
나는 정 의원이 나를 고소해서 법정에서 만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그분들 입장에서는 전기 고문이나 물고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문한 기분이 아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우선 80~90년대에 있어서 극히 한두가지 예외를 빼 놓는다면 그 당시 많은 시국 사범들, 청년 학생들, 민주 인사들이 법정이나 검찰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했지만 이런 것들이 검찰과 법정에서 언제 한번 받아들여진 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4살 먹은 내 어린 아들을 안기부 지하실에 20여일동안 감금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사회/정범구 박사>
황인오씨의 경우에는 사건의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당시 전부 연행이 됐다고 하는데.


◑ 황인오>
그 당시 집사람이 아이를 업고 있었으니까 그대로 연행하고 감금하고, 아이도 같이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안기부 내에 있던, 본명은 모르겠지만 자기들끼리는 백키로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아주 험상궂은 수사관이 정형근 의원의 지휘 아래 네 살 먹은 아이가 보는 앞에서 집사람을 폭행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우리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형근 의원은 우리 어머니에게 툭하면 직접 아버지까지 불러들여서 총살을 시키겠다는 등 온갖 폭행을 가했다.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언제든지 법정이건 어디서건 대질할 것을 아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어떻게 고문을 당했나.


◑ 황인오>
내가 협조하지 않으면 네 살 먹은 아들과 집사람을 계속 가둬 놓고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그 이상의 고문이 필요하단 말인가?


정형근의원, 2000년 '고문 폭로 말라', 2004년 '한나라당 입당' 제의


◎ 사회/정범구 박사>
정형근 의원으로부터 17대 총선 때 입당 제의를 받았다고 증언했는데.


◑ 황인오>
2000년 봄 총선 직전에 서경원 전 의원께서 당시에 감옥에서 석방되셔서 정형근 의원의 고문 용공 조작을 폭로하는 기자회견과 시위를 했다. 그 때 서 의원께서도 나에게 동참해서 어머님과 집사람, 아들 문제를 제기하자고 제안하셨는데, 나로서는 일단 아들이 초등학생이고, 집사람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또 다시 이것을 끄집어 내기를 원치 않아서 일단 다음 기회를 보자며 사양했다.


그런데 때마침 같은 시기에 정형근 의원이 박웅서라는 보좌관을 보내서 정의원 부탁이라며, 어머니와 아들, 부인 문제는 이번에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고문 폭로에 참가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당신 부탁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족 때문에 안하는 것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그 날인가 그 다음날 정 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의원은 고맙다면서 ‘이제는 황 선생 같은 분도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때가 됐으니까 같이 기회가 된다면 정치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금년 1~2월경 정 의원이 다시 전화를 해서 ‘입당해서 같이 정치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식의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거절했고, 그래서 더 이상 이야기의 진전은 없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정형근 의원 말고도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에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부터도 그런 권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 황인오>
그것은 현재로서는 언급할 수는 없다. 한나라당이나 이 쪽의 반응을 봐가면서 그것은 단계적으로 이야기 할 생각이다.


안기부, 수사 종결 후에도 집요하게 찾아와


◎ 사회/정범구 박사>
사건이 다 종결된 후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에도 안기부 직원들이 수시로 찾아왔었다는데.


◑ 황인오>
형이 확정돼서 복역하고 있을 당시 나를 담당했던 수사관들이 집요하게 찾아왔다. 그 때도 정형근씨 재직 당시로 생각되는데, 그들은 과거 80년대 계엄법으로 함께 구속됐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나의 동료 권운상씨, 권오창씨, 또 노점상 운동을 했던 양연수씨 등의 자료를 계속 가지고 우리와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고 시도했다.


◎ 사회/정범구 박사>
결국 그 때 중부지역당 사건이 북한 거물 간첩 이선실과 연결된 사건으로 정리된 이유 중 하나는 황인오씨 자신이 북한에 다녀왔고, 조선 노동당에 입당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 황인오>
일단 내가 한 차례 북한에 다녀온 것은 사실이다. 인터뷰를 보니 정 의원은 내가 네 차례 갔다 왔다고 하는데 허위 사실 유포죄로 고소를 생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것은 8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80년 5월에 광주를 겪으면서, 또 나로서는 80년 4월에 사북을 겪으면서 신군부와 보수 세력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신뢰와 기대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대대로 정권을 잡고 있는 남한 현실과 어쨌든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북한 지도자들을 비교해 보면서 민족사의 정통성이 상당 부분 북한에 있다는 인식을 그 당시에 갖게 됐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화와 통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좌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봤고, 일정하게 그렇게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상태에서 민주화와 통일 과정에 있어서 북한과 일정한 연대와 협력은 할 수 있다. 그 분들 표현대로 하자면 친북 용공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분명히 그 당시로서 내가 친북 용공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주사파였던 적은 없어


◎ 사회/정범구 박사>
그때의 상황인식은 지금 크게 변화가 없나?


◑ 황인오>
아니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한번도 소위 주사파였던 적은 없다.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적은 없고, 민족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봤을 때에도 세습 독재와 우상화, 주민 통제는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이 남한 사회의 문제 보다는 덜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보고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몇 가지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 우선 북한에 가서 보니, 세습 독재의 문제는 여기서 문헌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듣는 것과는 너무 다르게 치유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회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었고, 역사를 날조했고, 무장 항일 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한 것처럼 하는 것 등.


그리고 또 잘못 인식했던 것 중 하나인데, 저쪽의 공작원 등은 우리가 생각했던 혁명가나 운동가가 아니라 결국 북한 집권 노동당의 관리에 불과할 뿐 우리처럼 자발적으로 헌신적으로 이 문제를 능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또 무엇보다 북한의 경제 체제와 세습, 우상화 이런 것들은 남한 사회의 문제보다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연 연대와 협력의 대상인가 하는데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고 체포되기 전부터 이것을 어떻게 청산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17살 때부터 사북에서 광부로 일하셨다는데. 어떻게 이런 쪽에 관심을 갖게 됐나.


◑ 황인오>
그 전까지는 사법고시 등을 봐서 개인적으로 출세할 생각을 했는데, 도시산업선교회라든가 한완상 박사의 ‘민중과 지식인’이라거나 ‘기독교사상’ 등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그것이 아니라 내가 놓여진 탄광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것인가에 대해 마음먹은 것이 78~79년 정도였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러다가 80년 사북 사태를 경험했고, 사북 사태로 피신자 입장이 되면서 소위 미스 유니버스대회폭파사건이라는 라는 것도....


◑ 황인오>
그것도 정당한 이름이 아니다. 미스유니버스대회 방해 미수 사건이라고 해야 맞다.


사북 사건으로 인해 피신 중에 미스유니버스대회가 미국의 CBS TV에 의해서 실황중계가 된다는 것을 노리고 그 대회장을 점거해서 거기 모인 각국의 기자들에게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과 계엄 해제, 신군부의 처벌, 그리고 김대중씨를 비롯한 민주 인사들의 석방, 직선제 개헌 등의 요구사항들을 내외에 알리려고 했다.


성명서를 작성하고, 두 사람이 현장에 들어가서 잠시 동안이나마 관계자를 인질로 잡아서 5분이건 10분이건 이런 것들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필요하다면 그 당시엔 또 자진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수에 그치게 된 사건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 사건으로 관계자는 모두 구속됐나?


◑ 황인오>
나도 그 때 징역 20년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재탕, 삼탕 마녀사냥, 부관 참시


◎ 사회/정범구 박사>
이철우 의원의 간첩 논란이 불거지면서 다른 누구 보다 생각이 많으셨을 것 같다.


◑ 황인오>
마녀 사냥의 재판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 분들은 우리 사건으로 재미를 참 많이 봤다. 92년 대선 때 잘 활용했고, 문민정부 당시 안기부 개혁론이 나왔을 때 우리 사건에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국에서 전시회를 하고, 안기부의 존립 근거를 제시해서 개혁을 좌절시켰다.


또 작년에 정연주 KBS 사장 선임 당시 이 사건을 거론해서 빨갱이 사냥에 한번 써먹었고, 그렇게 재미를 보니까 이번에 또 이 사건을 들고 나와 부관참시라는 낡은 수법으로 이런 것을 한다고 생각된다.


◎ 사회/정범구 박사>
국정원이 관련된 과거사 진상 규명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중부지역당 사건을 다루겠다고 했는데. 이 진상을 밝혀내는 작업이 지금도 의미가 있다고 보나.


◑ 황인오>
그 당시 있었던 여러 가지 왜곡 과장된 측면은 물론이고 낱낱이 밝혀지길 원한다. 정형근 의원이 공언하는 것처럼 법정이나 국정 조사는 물론이고 청문회라도 빨리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다.


나는 그 유명한 이근안씨로부터도 80년과 83년 두 번에 걸쳐서 갖은 악행을 당한 바 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그 사람들과 원수를 삼지는 않는다. 어쨌든 역사의 현장에서 배역이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형근 의원 같은 경우는 현직을 나와서 까지 자꾸 이런 식으로 재탕 삼탕을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더 세월이 가기 전에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그것은 누구를 처벌하고 잡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올바른 민주주의 사회로 진전하기 위해서 서로 고백하고 화해하고 용납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진행:정범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