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막장인생…한 서려 떠날수가 없었다
한겨레 | 입력 2010.04.22 20:20 | 수정 2010.04.22 22:40
[한겨레] '사북항쟁 30년' 이원갑·윤병천씨의 회한
1980년 열악한 탄광 노동환경 개선투쟁고문당하고 보험설계사·공사판·식당 전전
지난 21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뿌리관에서 조촐한 기념식이 열렸다. 30년 전 이날 이곳에서 벌어졌던 '사북항쟁'을 기억하는 자리였다. 당시 항쟁을 이끌었던 이원갑(70·사북항쟁동지회장)씨와 윤병천(61·동지회 사무국장)씨는 '기억하려니 가슴이 아프고, 잊어버리기엔 더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두 사람은 30년 전 당시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끌었다. 이들과 함께 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은 이후 대부분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두 사람은 끝내 사북을 떠나지 못했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막장을 택했던 청년 두 명은 막장이 사라진 뒤에도 "한에 사무쳐" 평생 사북과 함께하는 운명이 됐다.
사북항쟁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 등으로 기소됐던 이씨는 이듬해 집행유예를 받고 사북으로 돌아왔지만, 회사는 그에게 다시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광업소 소장이 사북을 떠나면 500만원을 주겠다고 하더라고. 다음에는 1000만원, 그다음에는 1500만원…." 이씨는 막장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했지만 사북을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보험설계사가 되어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동료들은 "밤에 다시 오라"며 회사 몰래 이씨를 도왔지만, 몰락하는 탄광촌에서 보험 영업으로 평생을 견딜 수는 없었다. 이씨는 그 뒤로도 옷장사, 횟집 등으로 9남매를 키우며 사북읍을 맴돌았다. "이 땅에 한이 많아서 어디 갈 수가 있어야지…."
민주화운동 인정됐지만 정부 아무 조처 안해"몸 만신창이 됐지만 명예회복은 해줬으면…"
항쟁 이후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윤씨는 복직이 되긴 했지만, 회사는 윤씨를 위험하고 돈 안 되는 막장으로만 내몰았다. 결국 윤씨도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포장마차를 열었다. 미안한 마음에 찾아오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 강원 원주시로 잠시 외도를 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윤씨를 기다리는 건 공사판이었고, 그는 3년 만에 다시 돌아와 식당을 차렸다. "죄인도 아닌데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게 분하고 원통해서 다시 돌아왔지."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남은 건 고문으로 삐뚤어진 손과 무릎관절이 다쳐 절뚝거리는 다리뿐이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신들은 '폭도'가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런 메아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씨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광부들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사라지곤 했다"며 "광부 손은 까매서 그런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더라"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생기고,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긴 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5년 이씨 등 2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지만, 다른 항쟁 참가자들의 신청은 6년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2008년 사북사건 관련자 명예회복을 국가에 권고했지만, 정부는 명예훼복을 위한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
항쟁이 벌어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 탄광노동자들이 떠난 사북에는 거대한 성채처럼 자리잡은 하이원리조트와 강원랜드 카지노를 찾는 관광객들만 붐비고 있다. 윤씨는 "그때도 못 배우고 돈 없는 사람들이 사북에 와 광부가 됐는데, 결국 지금도 없는 사람들이 사북에 들어와 도박중독자가 되고 있다"며 "사북은 여전히 변방이자 막장 같다"고 씁쓸해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꿈은 온전한 명예회복이다. "자식한테 해준 게 없어. 출세길을 막았는데,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명예라도 남겨줬으면 좋겠어."(윤씨) "고문에 몸은 아프지, 가정은 깨졌지, 제대로 벌지도 못했지…. 그래도 죽기 전에 우리가 했던 일이 정당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어."(이씨)
정선/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 사북항쟁
1980년 4월21일,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탄광노동자와 가족들이 나흘 동안 경찰 지서를 포함한 사북읍 전체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탄광노동자들은 1979년 한 해에만 221명이 숨지는 등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리고 있었고, 회사와 어용노조의 횡포가 항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 이들은 4월24일 정부 쪽과 협상 뒤 농성을 끝냈으나, 정부는 약속을 깨고 이원갑씨 등 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을 검거해 처벌했다. 사북항쟁을 계기로 주변 탄광촌에도 저항이 이어졌으며, 1980년 봄 전국적인 시위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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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열악한 탄광 노동환경 개선투쟁고문당하고 보험설계사·공사판·식당 전전
지난 21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뿌리관에서 조촐한 기념식이 열렸다. 30년 전 이날 이곳에서 벌어졌던 '사북항쟁'을 기억하는 자리였다. 당시 항쟁을 이끌었던 이원갑(70·사북항쟁동지회장)씨와 윤병천(61·동지회 사무국장)씨는 '기억하려니 가슴이 아프고, 잊어버리기엔 더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사북항쟁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 등으로 기소됐던 이씨는 이듬해 집행유예를 받고 사북으로 돌아왔지만, 회사는 그에게 다시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광업소 소장이 사북을 떠나면 500만원을 주겠다고 하더라고. 다음에는 1000만원, 그다음에는 1500만원…." 이씨는 막장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했지만 사북을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보험설계사가 되어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동료들은 "밤에 다시 오라"며 회사 몰래 이씨를 도왔지만, 몰락하는 탄광촌에서 보험 영업으로 평생을 견딜 수는 없었다. 이씨는 그 뒤로도 옷장사, 횟집 등으로 9남매를 키우며 사북읍을 맴돌았다. "이 땅에 한이 많아서 어디 갈 수가 있어야지…."
민주화운동 인정됐지만 정부 아무 조처 안해"몸 만신창이 됐지만 명예회복은 해줬으면…"
항쟁 이후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윤씨는 복직이 되긴 했지만, 회사는 윤씨를 위험하고 돈 안 되는 막장으로만 내몰았다. 결국 윤씨도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포장마차를 열었다. 미안한 마음에 찾아오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 강원 원주시로 잠시 외도를 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윤씨를 기다리는 건 공사판이었고, 그는 3년 만에 다시 돌아와 식당을 차렸다. "죄인도 아닌데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게 분하고 원통해서 다시 돌아왔지."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남은 건 고문으로 삐뚤어진 손과 무릎관절이 다쳐 절뚝거리는 다리뿐이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신들은 '폭도'가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런 메아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씨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광부들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사라지곤 했다"며 "광부 손은 까매서 그런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더라"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생기고,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긴 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5년 이씨 등 2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지만, 다른 항쟁 참가자들의 신청은 6년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2008년 사북사건 관련자 명예회복을 국가에 권고했지만, 정부는 명예훼복을 위한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
항쟁이 벌어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 탄광노동자들이 떠난 사북에는 거대한 성채처럼 자리잡은 하이원리조트와 강원랜드 카지노를 찾는 관광객들만 붐비고 있다. 윤씨는 "그때도 못 배우고 돈 없는 사람들이 사북에 와 광부가 됐는데, 결국 지금도 없는 사람들이 사북에 들어와 도박중독자가 되고 있다"며 "사북은 여전히 변방이자 막장 같다"고 씁쓸해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꿈은 온전한 명예회복이다. "자식한테 해준 게 없어. 출세길을 막았는데,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명예라도 남겨줬으면 좋겠어."(윤씨) "고문에 몸은 아프지, 가정은 깨졌지, 제대로 벌지도 못했지…. 그래도 죽기 전에 우리가 했던 일이 정당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어."(이씨)
정선/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 사북항쟁
1980년 4월21일,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탄광노동자와 가족들이 나흘 동안 경찰 지서를 포함한 사북읍 전체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탄광노동자들은 1979년 한 해에만 221명이 숨지는 등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리고 있었고, 회사와 어용노조의 횡포가 항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 이들은 4월24일 정부 쪽과 협상 뒤 농성을 끝냈으나, 정부는 약속을 깨고 이원갑씨 등 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을 검거해 처벌했다. 사북항쟁을 계기로 주변 탄광촌에도 저항이 이어졌으며, 1980년 봄 전국적인 시위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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