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시에 나타난 탄광촌 삶에 관한 연구
정연수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막장 체험의 비극성과 그 극복 의지 3. 비극적 현실과 탄광공동체 의식 4. 외부적 시각으로 본 막장의 현실 5. 폐광 이후 탄광촌 현실의 시적 형상화 6. 맺는 말 |
1. 들어가는 말
문학이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양식이고 보면, 탄광노동에 대한 삶을 기록해 온 탄광시1)에 대한 연구는 곧 한 시대의 산업과 그 산업을 이끌어 온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는 일이다. 탄광은 단일 산업으로 도시가 형성된 탄광지역 공동체, 지하 작업장의 높은 노동 강도와 직업병 등 열악한 노동환경, 농촌이나 도시변두리에서 소외계층이 유입된 인구형성 등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또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시행 이후 대규모 폐광이 이뤄지면서 대량 실직자 발생과 탄광지역 공동체의 와해 등 커다란 사회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탄광노동과 탄광촌은 우리 나라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탄광시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2) 이 시기는 탄광노동자들이 인권문제나 삶의 질에 의식을 갖는 노동운동 등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이다. 한국 현대시사에 있어서도 노동계급의 논의와 더불어 노동시가 크게 부각된 것도 1980년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1970년대 민중시가 보다 선명한 문학 노선의 노동시로 변주’3)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많은 탄광시가 쏟아지기 시작한데는 국내 문단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1980년대 들면서 많은 시인들이 탄광시 창작 담당층으로 나서기까지는 사북사태 등의 노동운동, 대규모 폐광정책으로 인한 탄광노동자 생활공동체와 도시공동체 붕괴 등으로 인해 탄광현장과 탄광지역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이 확대된 계기가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학으로 눈을 돌리는 탄광노동자의 의식 진보를 통해 노동자 창작층이 증가한 내적 요인이 무엇보다 크다 하겠다. 이는 탄광시 작품과 창작층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업화의 변화에 대응하는 탄광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실상을 증언하고, 또 석탄산업사의 흐름을 읽어내는 역사의 기록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시문학사에 있어서 노동시는 1980년대에 가장 활발”4)하게 움직였으나, 탄광시는 1990년 들어 가장 활발해진 양상을 보인다.5) 사회적으로 문학적 영역을 크게 확대한 시인들이 석탄합리화로 인한 폐광과 실직, 도시공동체 파괴 등 산업화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취재 창작에 나서면서 탄광문학층을 두텁게 형성한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문학의 수용자이던 탄광지역 주민과 탄광노동자 스스로 창조적 주체가 되어 문학의 현장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지식인이 쓴 노동문학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힘에 의해 쓰여진 탄광문학의 대량양산은 진정한 민중문학으로서의 조명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탄광지역의 현실을 드러내려는 창작 활동이 활발한 동안에도, 비평에 있어서 탄광문학은 여전히 소외 영역에 자리했다. 문단의 관심권에서 밀려난 주원인으로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목소리가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지 못한 점이라든가, 상투성과 도식성으로 인한 예술성의 부족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요소들이 결코 탄광시 연구의 당위성을 약화시킬 수는 없다. 석탄산업이 종언을 밝힌 현 시점에서 탄광시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은 우리 문학 발전을 위한 당면과제이다. 1980년대에 시작해 1990년대 창작품 양산의 절정을 이루면서 그동안 900여편의 탄광시가 양산된 만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연구를 통해 한국 현대문학의 지평을 넓혀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탄광노동자 정일남과 성희직, 탄광노동자 가족 김태수, 탄광촌 주민 김진광, 외부인 이건청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탄광시의 전체적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막장 체험의 비극성과 그 극복 의지
탄광 노동문제에 있어 임금, 복지, 인권 등의 많은 현안이 대두되지만, 특히 위험한 작업현장과 관련하여 안전이 무엇보다 우선되고 있다. 탄광노동이 안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많은 탄광시가 죽음에 깊이 접근함으로써 생존을 확인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줄 초상난 광부의 상여틀 꾸미는데도 이골났다
밤새워 다섯 초상집 오가다 보면 새벽이 왔다
젊은 미망인 된 새댁들
봄바람 따라 기차 타고 어디로 떠났던가
-정일남,〈過去〉6)
하룻밤에 다섯 명의 광부 상여틀을 꾸며야 하고, 다섯 초상집을 오가다 밤을 새우는 모습을 통해 석탄을 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숨져갔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탄광노동 체험을 지닌 정일남이 자신의 체험을 시로 형상화하면서 광부의 노동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탄광시에서는 죽음과의 친화성 속에서 더욱더 생명에 대한 애착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그 죽음의 절망 속에서는 좌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체념하기도 하고, ‘이골’나기도 하면서 절망을 극복해나가는 모습이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갱 속에서 죽었는지 헤일 수도 없”(정일남,〈금천교의 기억〉)다는 증언을 통해 석탄을 캐기 위해 많은 목숨이 죽어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연탄을 보면서 “밤낮을 교대하며/우리시대의 마지막 불씨를/채굴하다 묻힌 광부의/그 마지막 숨결이 타오른다”(정일남,〈연탄〉)며 숨져간 동료 광부를 떠올리기에 이른다.
절망의 밑바닥,
거기 살아서 번쩍이는 잎잎들.
지주로 받쳐진 저 속에서
빠개지는 아픔을 견디면서
쏟아져 나오는 저것들은
어느 세기의 햇살들인가.
붕락된 갱 속에
죽은 광부의 눈빛이
깊이 잠든 지층을 일깨워
비로소 퍼득이는 무리들.
저마다 새로 살아서 열리는 빛
(중략)
순간 무너져 내린 지층
또 어느 세기가 열리는가
새로운 빛의 해변이
닫혀진 벽 저편에서
일제히 쏟아져 밀려온다
실로 누가 태어나는 소리,
어둠과 어둠이 부딪쳐서
빛이 굴절하는 소리
개벽이 오는 소리.
-정일남,〈採炭幕場〉일부7)
밝은 빛에 대한 욕구는 어둠의 이미지에 대한 거부로써 시작된다. 이는 빛이 없는 상태인 어둠에 싸여있는 자기 존재를 거부하려는 내면적 충동이기도 하다. 빛을 찾아 나서는 행위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려는 의식으로, 가난과 죽음이 늘 속박하고 있는 현실의 부정적인 어둠을 인식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어둠을 거부하고 나선다. 탄광시에 나타나는 거부는 대립이나 투쟁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체념을 거친 다음 빛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다. 빛에 대한 욕망은 어둠의 강렬한 부정으로 표상됨으로써 결국 빛의 획득은 자기승화를 향하는 한 과정이 된다. 알 수 없는 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막막함과 ‘절망의 밑바닥’이라는 삶에 대한 절망감을 극복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햇살을 찾아 나서고 있다. “빛이 굴절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개벽’이라고 믿을 만큼 ‘빛’에 대한 갈망은 강하다.
석탄은 쉽게 생성되지도 않으며, 채탄 또한 쉽게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절망의 밑바닥”에서 형성된 것이며, “지주로 받쳐진 저 속에서/빠개진 아픔을 견디면서/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결국 오랜 절망과 고통의 세월을 견디었기에 “햇살”이 되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 빛을 얻기까지 “붕락된 갱 속에/죽은 광부의 눈빛이/깊이 잠든 지층을 일깨워”주는 절차가 있었으며, 비로소 “새로 살아서 열리는 빛”이 되고 있다.
“어둠과 어둠이 부딪쳐서/빛이 굴절하는 소리/개벽이 오는 소리”에서 절망이 절망을 만나 희망의 되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어둠과 어둠이 부딪쳐서” 만드는 빛은 절망과 절망이 부딪쳐서 희망을 만드는 탄광노동자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절망하면 대담해지는 법’이라는 니이체의 철학을 한 차원 뛰어넘어서는 절망의 미학을 탄광시는 보여주고 있다. 절망이 만들어 내는 미학은 죽음의 공간인 막장에서 희망의 공간인 삶으로의 도약을 찾아내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
캄캄한 지층 틈 사이에서
내가 만난 고생대의 아침이
처음으로 열린다
죽은 광부가 매몰된 자리에서
비로소 찾아낸 광맥
캡램프의 불빛에
매몰된 고생대의 숲이 열린다
- 정일남,〈어느 갱 속에서〉8)
“어둠은 불씨의 주머니일 뿐/절망의 썩은 새끼는 아니었다”(정일남,〈광부〉)에서 확인되듯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던 시인은 “죽은 광부가 매몰된 자리에서/비로소 찾아낸 광맥”(〈어느 갱 속에서〉)이라는 의식에까지 도달한다. 죽음 뒤의 빛, 고통 뒤의 환희를 통해 절망의 현실 속에서 더 절망함으로써 절망할 것조차 없이 희망이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는 “한에 있어서 고통은 세계에 대한 반격이 되지않고 감미로운 슬픔으로 해소”9)되고 있는데서도 보여지듯 슬픔을 슬픔으로써 초월하려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라는 한(恨)의 감정 통제 방식과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탄광시는 슬픔으로 ‘한’을 쌓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한’의 감정풀이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죽음이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정일남,〈광부에게 물어보면〉)는 진술처럼 체념은 오히려 절망을 극복하는 지혜로 자리하고 있다. 절망 앞에서 더 절망하면서 희망으로 승화될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채탄막장은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절망의 공간이 지닌 막장의 의미는 성희직의 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항상 죽음과 맞닿아 있는 위험한 작업조건으로 인해 ‘6개월 전 바로 이웃 탄광에서/물통사고로 일곱 목숨을 잃었는데/1993년 4월2일/또다시 생목숨 일곱을 앗아간/삼척탄좌 가스 폭발사고’(성희직,「우리의 막장은 일터인가 전쟁터인가?」)에서 진술되듯 빈번한 재해가 발생된다. 탄광의 주요 재해로 운반, 가스 폭발, 질식, 갱내 화재, 갱내 출수, 화약 및 발파사고 등을 들 수 있다.10) 탄광업은 타 산업에 비하여 노동자 수, 재해 건수는 적지만 재해 발생율과 사망도수는 월등히 높다. 1987년 전체 산업노동자 6백만명 중 탄광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이하였으나, 전체 산업 대비 광업 사망이재자 비율은 평균 14%에 이르고 있어, 탄광재해율이 일반노동자보다 10배 가까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11) 국내 탄광의 높은 재해율은 기계화의 미비와 도급제로 인한 무리한 노동강요, 열악한 작업환경 등에서 기인한다.
탄광경영이 호황일 때도 노동자는 빈익빈의 늪에서 생활고를 겪으면서 ‘노동자의 씨는 따로 있는 건지/사십평생을/죽어라 죽어라고 일을 했지만/나는 지금도 노동자’(성희직, 「광부이력서」)라는 탄식이 멈추지 않는다. 결국 노동자와 주민들은 탄광지역의 현실과 노동자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직접 투쟁에 나선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온
인간 두더쥐
막장인생
광산쟁이
그 서러운 이름들, 그 한맺힌 가슴들
사북, 1980년 4월
수억만년 전에 죽어버린 땅이 깨어났다
그날
수십년을 참아온 광부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날
그 절망의 시간을
그 분노의 날들을
그 한맺힌 세월을 힘껏 걷어차고
화산이 폭발하듯 두겹 하늘 열어젖히자
노다지, 갈쿠리로 돈을 긁던 사용자들
뼈다귀 맛에 길들여진 개 노조간부들
서울의 봄을 총칼로 가로막는 무리들이
간덩이가 콩알만해졌다
-성희직,「사북 1980년 4월」12)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가슴에 한 맺혔던 울분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막장인생’을 살고 있는 한 개인의 삶에 대한 한이 아니라, 모순된 탄광현실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다. 공정한 이윤의 분배 없이 ‘돈을 긁던’ 기업주와,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뼈다귀 맛에 길들여진 개’가 된 노조간부에 대한 분노인 것이다. 사북사태를 기록하고 있는 이 시를 통해 노동자에게 있어 노동운동이 갖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수십 년을 참아 온 절망의 시간과 분노를 노동운동을 통해 표출하는 것이다. 참고 지내던 탄광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한계는 1980년 4월의 사북사태를 비롯해 크고 작은 노동운동을 통해 폭발하면서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타개하려는 민중의 힘을 만들어 낸다. ‘개인적 집착을 넘어서게 하는 슬픔은 사회적 힘’13)을 갖게 되듯이 탄광노동자와 그 가족이 오랫동안 참아왔던 슬픈 분노는 사회적 연대감으로 확장된다. 같은 슬픔을 간직하던 사람들의 연대감은 투쟁의 강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일어선 사북의 노동운동은 ‘두겹 하늘 열어젖히’는 일이었으며, 수 십 년 묵혀둔 절망과 분노의 폭발이었다.
그러나 탄광노동자들이 언제나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절망 앞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는 의연한 자세를 지닐 줄 안다. 이는 더는 무너질 것이 없다는, 더는 슬플 것이 없다는 절망의 막장에서 얻어내는 지혜다. 광부들은 절망을 견디며 살아가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모순된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지를 지닌 노동자에게 사북사태는 새로운 앞날에 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노동자 스스로 고통스런 현실을 극복하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광산쟁이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맨주먹 움켜쥔 수천의 노동 형제들과/목이 터져라 외친 함성/함께 흘린 뜨거운 눈물/세월 흘렀어도/그날의 불덩이 아직 가슴에 타오르고’(성희직,「우리 사랑 먼후일까지」)있다면서 투쟁의 불꽃을 갈무리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탄광시들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현실을 온 몸으로 타개해 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탄광 현장과 탄광지역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쓰여진 탄광시는 우리 산업사회가 지니는 부조리한 모습과 가난이 빚고 있는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 여과없이 기록해 내고 있다. 또 노동계층의 실존적 삶과 사회적 삶을 둘러싼 각양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 고발하면서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탄광 현실이 빚어내는 상처들을 잘 기록했을 때 상처에 동참하지 못한 이웃들은 문학을 통해 함께 분노하고, 울분을 터트리며 세상의 개혁을 향해 함께 투쟁해 나갈 수 있다. 탄광시는 바로 거짓 없는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세계 자체를 꿰뚫어 보고자 한다.
그러한 점에서 탄광시에서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의 희망을 찾아가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인간 사이의 불화, 모순된 사회와 소외된 인간에 대한 불화를 제거하고 있다. 죽음의 공포에 대한 초월 의지는 생명에의 애착에서 출발한다. 죽음에 대한 각오를 통해 절망적 삶을 포기하기보다는 극복하고,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는 한층 더 깊어지고 실존은 보다 확실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믿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탄광시를 통해 현실의 부정적인 조건에 저항하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탄광시는 탄광노동자의 작업공간이자 산업화 속의 소외와 모순이 집약된 노동현장인 막장을 건강한 노동현장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절망, 죽음에의 공포, 고통스러운 삶, 어둠, 지하막장 같은 모든 부정적 요소들과 화해하려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나아가서는 화해하려는 모습을 통해 건강한 삶에 대한 힘을 갖게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탄광시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이라 하겠다. 탄광노동자의 삶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낸 것처럼 탄광시는 절망을 딛고 일어나 희망을 향해 쓰여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3. 비극적 현실과 탄광공동체 의식
탄광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공간은 탄광노동자들의 작업장인 채탄막장과 생활공간인 사택이다. 막장과 사택의 공간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산간오지에 위치한 탄광촌은 탄광 개발과 함께 탄광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석탄산업 단일 업종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탄광을 중심으로 사택, 행정관서 등의 네트워크가 구성된다. 탄광촌으로 유입된 사람들 상당수는 농경사회, 산업사회 속에서 경제적인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ꡐ인생의 막장ꡑ으로 탄광을 선택했다. 비슷한 과거, 비슷한 절망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탄광사택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사택 공동체는 다른 집단보다 더 긴밀한 공동체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따라서 굳이 채탄막장을 통하지 않고도 사택을 통한 탄광현실 접근이 가능하다. 김태수는 〈구동사택․1969〉를 통해 비극적인 탄광촌의 현실과 당대의 사회구조 그리고 더 나아가 시대적 현실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바람에 날려가는 풀씨처럼 그렇게 아버지의 입갱이 시작되고, 나는 사이렌 소리에 꿈이 부서지는 밤을 자주 만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속옷에 부적을 넣어두고도 주말이면 山堂에서 밤을 지샜고, 옆집 곰보아저씨는 출근 때마다 새 아침을 향해 종이 비행기를 날렸다.
밤새 안녕, 학수 아빠는 죽탄에 깔려죽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새벽새 안녕, 철이 삼촌은 가스폭발로 죽고
-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
낮새 안녕, 미자아빠는 광차에 다리가 잘리고
색상이 다른 아픔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같은 색의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구동사택. 아이들은 挽歌와 곡소리를 동요처럼 불렀고 어른들은 소주로 불감증을 씻곤 했다. 가끔씩 월남전 참전 상이용사의 갈구리손과, 데모하다 잡혀갔다 온 영미삼촌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기웃거리고 명절이면 공장으로 떠났던 누나 형들의 파리한 웃음도 눈에 띄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세
날마다 새벽종이 울리고
제야의 종소리가 진눈깨비로 흘러내릴 때까지 우리들의 희망은 캪램프 빛이 되어 막장벽을 파헤쳤지만 곰보아저씨의 종이비행기는 언제나 제자리를 돌아왔다.
- 김태수, 〈구동사택․1969〉전문14)
〈구동사택․1969〉는 탄광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사택을 배경 삼아서 광부 가족의 일상적 정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광부 아버지, 산당에 가는 어머니, 역시 광부인 옆집 곰보아저씨, 학수네, 철이네, 미자네, 영미네 가족,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 월남전 참전 상이용사, 공장으로 떠났던 누나와 형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제목이 말해주듯 1969년으로 설정된 시대의 탄광촌 사택의 삶을 총체적으로 전달하려는 시적 의도 때문이다. 광부와 그 가족들의 삶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섬세하고도 입체적으로 묘사하면서,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농축하고 있는 힘은 사택에서 광부의 가족으로 생활한 시인의 체험에서 나온다.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둔 시인은 입갱한 아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밤마다 ꡒ사이렌소리에 꿈이 부서지는 밤을 자주 만ꡓ나게 된다. 탄광촌 주민들은 사이렌 소리가 사택촌을 지날 때마다 입갱한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조바심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위협하는 위험의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인에게 사이렌 소리는 잠을 방해하고, 꿈을 무참히 부수는 공포의 대상이다.
2연에서 사이렌 소리에 대한 두려움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화자가 직접 보고 들은 체험에 기초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ꡒ학수 아빠는 죽탄에 깔려 죽고ꡓ, ꡒ철이 삼촌은 가스폭발로 죽고ꡓ, ꡒ미자 아빠는 광차에 다리가 잘리고ꡓ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들었던 사이렌 소리였다. 사이렌 소리로 상징되는 사고로 인해 사택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 가족들의 꿈이 무참히 부서진 것을 똑똑히 보아왔기 때문에 사이렌 소리는 더더욱 공포로 다가선다.
〈구동사택․1969〉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탄광 현실 속에 가장인 광부의 안전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탄광촌 사람들의 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아버지를 걱정하는 어린 아들의 두려운 밤, 남편의 속옷에 부적을 넣으며 무사함을 비는 아내, 부적도 미덥지 못해 주말에는 산당에 가서 남편의 무사를 밤새 비는 아내의 모습이 그것이다.
ꡒ색상이 다른 아픔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같은 색의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구동사택ꡓ에서는 탄광노동자들이 탄광촌으로 유입하게 된 사연을 들춰낸다. 농촌, 혹은 도시변두리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채 마지막(막장) 선택한 “색상이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탄광지역은 사회에서 냉대 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일수록 재기하기 쉬운 희망의 터전이 된다. “자기의 고통 속에 집단과 자기시대의 깊은 상처를 인식하고, 자기 내부에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이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재생적 힘을 깊이 간직”15)할 때 공동체적 유대감은 더 강화된다.
한편 “같은 색의 눈물”을 갖게되는 데는 서로가 공통으로 지닌 과거의 절망, 인생의 실패, 위험한 노동현장에서의 끈끈한 유대, 죽음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작업장 동지로서의 연민 등이 작용하고 있다. 결국 이들은 죽음과 재해라는 절망적 공유를 통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사택의 만남은 끈끈해진 유대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택에서의 이별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라 탄광사고에서 비롯된 영원한 이별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잦은 탄광사고로 인한 죽음의 비극에는 어린이들까지 동참하면서 비장감마저 감돈다. ꡒ아이들은 만가와 곡소리를 동요처럼 불렀고ꡓ에서 드러나듯 연속되는 죽음으로 인해 만가와 곡소리가 아이들의 일상적인 노래가 되어버렸다는 해학적 표현 뒤에는 탄광촌의 비극적 실상이 고발되고 있다. 또한 ꡒ소주로 불감증을 씻ꡓ어야할 만큼 무감각해진 의식 뒤에는 숱한 탄광 동료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탄광현실이 드러난다. 비극적 현실을 위로하는 것이라곤 ꡐ술ꡑ밖에 없는 황폐한 현실은 ꡐ인생막장ꡑ으로 불리는 탄광노동자의 삶에 대한 절망이 끝나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ꡒ밤새 안녕ꡓ, ꡒ새벽새 안녕ꡓ, ꡒ낮새 안녕ꡓ은 광부들의 갑방․을방․병방 3교대 작업을 의미한다. 3교대 작업까지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는 광부에게 돌아오는 것은 ꡒ우리들의 희망은 캡램프 빛이 되어 막장벽을 파헤쳤지만 곰보아저씨의 종이비행기는 언제나 제자리를 돌아ꡓ온다는 진술뿐이다. 탄광노동자의 희망과 미래는 ꡒ종이비행기ꡓ로 환유되어 상공을 잠시 날아보지만 결국 희망 찾기에 실패하고 언제나 제자리를 돌아오고 마는 현실을 통해 탄광노동자들이 지닌 고달픈 삶의 여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한편 희망을 ꡒ종이비행기ꡓ밖에 접을 수 없는 ꡒ곰보아저씨ꡓ의 현실은 시대와 적극적으로 부딪쳐 살아가지 못하는 탄광노동자의 연약한 의식이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이상 살펴 본대로 〈구동사택․1969년〉은 높은 노동강도와 탄광재해에 시달리는 탄광노동자, 사고에 긴장하며 살아가는 광부가족, 공동의 긴장과 절망감 속에 살아가는 사택촌 주민, 희망 없는 탄광주민의 삶 등을 다루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산업발전 속에 일방적으로 희생되고 쓰러져 간 탄광노동자와 사택공동체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내는 탄광시의 힘이라 할 수 있다.
4. 외부적 시각으로 본 막장의 현실
그동안 탄광시가 활발하게 창작되고 논의될 수 없었던 이유는 탄광노동현장 체험의 부족으로 지적할 수 있다. 탄광이 산간오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창작 체험을 위해 접근하기에는 위험하고 강도 높은 노동, 대중 독자의 관심을 끌기 힘든 특수성, 탄광지역의 폐쇄성, 탄광노동에 대한 시인들의 역사의식 부족 때문이다. 물론 탄광노동자와 탄광촌 주민들의 창작능력 부족, 문학에 몰두할 만큼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의 불충분, 문학을 노동 운동의 일환으로 실천하지 못한 탄광노동운동권의 무자각 등도 함께 지적할 수 있다.
이건청은 탄광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도 탄광노동현장의 실상에 대한 체험을 통해 소외된 계층에 눈을 돌리고 탄광노동의 의미에 접근하고 있다. 암울한 역사일수록 실천하는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시인은 노동현장에서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역사의 기록자로 동참한다. 시인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의식했건 안 했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삶의 총체적 삶의 조건을 기본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의 조건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의 조건을 생산하는 데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것도 “문학은 인간활동의 일환이며 인간의 의도적 행위가 문학의 핵심적 인자로 작용”16)하기 때문이다.
나는 1998년 3월
거기에 갔다.
그리고 3월16일,
대한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의
垂坑으로 825미터를 하강한 후
다시 人車를 타고 3200미터 지하
3억년 숲과 짐승들이
현생 인류와 다시 만나는 현장에 닿았다.
거기가 막장이었다.
飛散 탄가루가 시야를 가리는 거기,
더운 지열이 들끓는 거기서
방진 마스크를 쓴 채,
캡 램프를 단 안전모를 쓴 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석탄덩이를
집어 올렸다.
(중략)
막장 밖에 나와 하늘을 보았다.
사람들은 식당에 밥 먹으러 가고 있었다.
세상은 그냥 세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 숨쉬는 석탄들을
추운 거리에 쌓아둔 채
그냥 내 자리로 돌아 올 수 없었다.
석탄이 탄소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바람 부는 탄광 마을에 그 소리들이 쌓여 있었다.
그때 나는
요즘도 지층에 묻히는 사람들이 있고
묻힌 사람들이 탄소로
변해가고 있음을 알았다
석탄이 되었거나
석탄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 많다
기록 속에 갇힌 이름들이 있고
그들은 거기서 검게 변해가고 있다.
-이건청,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12.010〉17)
이 시는 “나는 1998년 3월/거기에 갔다”고 채탄막장 방문을 일지처럼 기록하면서 “대한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의/垂坑으로 825미터를 하강한 후/다시 人車를 타고 3200미터 지하”까지 간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건청은 외부인이면서도 입갱을 통해 탄광노동현장에 대한 체험을 갖는가 하면, 수차례 탄광지역 방문을 통해 탄광시에 대한 의욕을 보임으로써 탄광의 시적 형상화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18) 그것은 탄광노동현장에 대한 밀착 취재를 통해 많은 외부인에게서 보여지는 탄광촌 스쳐지나기 식의 피상적 접근을 지양한 점이라든가, 입갱을 통해 탄광노동을 체험하고, 탄광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생활 및 사상에 대한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접근하는 방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막장 안에 서게 된 시인이 처음에는 고생대의 자연과 만나는 신비로움에 ‘무릎을 꿇’어가면서 벅찬 감격을 누린다. 그것은 3억년의 지질학적 신비에 대한 경이로움이었으며, 우주의 역사에 동참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감회였다. 이는 삶의 절망이 자리한 채탄막장의 실체를 미처 깨닫지 못한 탄광노동자와 외부인이 갖는 인식의 거리감이다. ‘두겹 하늘’ 밖에서 살던 삶과 ‘두겹 하늘’ 안에의 삶에 대한 단절감이 주는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생대의 신비에 머물지 않고 노동현장으로 눈을 돌린다. 입갱 체험을 끝내고 막장 밖으로 나오며 ‘세상은 그냥 세상’이라는 삶의 화두를 깨닫는 순간 우주의 신비에 경이로워 하던 한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 힘겹게 석탄을 캐는 광부에게 애정을 보내는 시인의식을 갖는다. 관광객에 불과한 외부인이 막장 체험을 통해 채탄노동의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삶의 막장에 대한 현실인식을 갖추게 된다.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을 만큼 외부 세계와 단절된 탄광의 소외현실이 탄광막장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좁혀지면서 석탄에 대한 감상적 인식이 현실감을 찾게된다.19)
“요즘도 지층에 묻히는 사람들이 있고/묻힌 사람들이 탄소로/변해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나, “석탄이 되었거나/석탄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인식하면서 석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도 인식하기에 이른다. 석탄의 생성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석탄을 캐는 노동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러한 사회적 관심은 마침내 석탄을 위해 희생된 탄광노동자들의 현실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석탄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란 진술을 통해 ꡐ죽어감ꡑ이 진행형이라는 인식에까지 도달하면서 계속되는 탄광노동자의 희생에 대한 고발효과까지 가져온다.
체험을 통해 탄광노동현장과 탄광촌을 기록하겠다는 이건청의 시의식은 시집 제목『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이라는 데서도 확고하게 드러난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투시력을 지닌 시인의식이 철저하게 반영되면서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12.010〉에서는 석탄/채탄의 대립항을 통해 본질 탐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석탄/채탄의 대립은 자연의 석탄 대 인간의 석탄 대립구조를 뜻한다. 자연의 석탄이 고생대의 신비에 대한 경이로움을 동반한다면, 노동현장의 석탄은 어둠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견디는 생존 의지를 지니고 있다. “3억년 숲과 짐승들이/현생 인류와 다시 만나는 현장”이 석탄이 자연의 석탄이라면, “지층에 묻히는 사람들이 있고/묻힌 사람들이 탄소로/변해가고 있음을 알”게된 현장은 노동현장의 석탄이다. 시인이 본 채탄 현장은 “飛散 탄가루가 시야를 가리는 거기/더운 지열이 들끓는”공간으로 탄 속에 묻히는 죽음과 고통이 뒤따르는 곳이다. 그 참담한 노동현장을 보는 순간 채탄막장 밖에 외부인으로 있던 의식이 노동 현실 속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단절된 인식의 거리감이 극복되면서 “살아 숨쉬는 석탄들을/추운 거리에 쌓아둔 채/그냥 내 자리로 돌아 올 수 없었다”는 진술에까지 다다른다. “그냥 내 자리로 돌아 올 수 없었다”는 진술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핀대로 이 시는 석탄형성 현장에서 노동 현장으로의 시선 이동, 다시 시인의 자아성찰에까지 심화되면서 삶의 깊이 있는 울림을 전달한다. 탄광시는 노동의 역사에 대한 동참의식과 현실에 대한 철저한 기록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5. 폐광 이후 탄광촌 현실의 시적 형상화
‘문학작품이 현실의 모사’라는 말 그대로 탄광시는 삶의 진정한 가치 실현을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자신과 상처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자신보다 앞서 그런 상처의 고통을 처절하게 견디며 살다간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를 보여준다. 탄광시가 탄광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석탄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면서 정부에서는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를 통해 대규모 폐광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광부들에게는 실직을, 석탄산업이라는 단일경제에 의존하던 탄광도시에는 자립기반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도시공동화 현상까지 빚게된 대규모의 급작스런 폐광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면서 많은 시인들이 탄광 현실에 관심을 갖게된다. 탄광의 폐광과 지역공동체의 와해로 인한 고통스런 현실은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인의 삶이 아니라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함백항 갱 입구에 갔다
갱구는 막혀 있고
망아지 만한 개 몇 마리
컹컹 짖고 있었다.
굴속에서 갱이 무너져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영혼이
아주 막힌 갱구를 향하여
사람들이 사는 쪽으로
컹컹 짖고 있었다.
개들이 밟고선 폐석 더미가
먼-지질시대
공룡의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김진광, 〈함백항 폐광 입구에서〉20)
폐광으로 인한 절망의 신음이 개와 공룡을 통해 전달된다.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폐쇄된 갱구는 폐허가 된 폐광촌 주민 모두가 느끼는 막막함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막장’인 갱구 안에서 살아가던 탄광노동자들은 빛을 찾아 밖으로 나오고 싶어했다. 그 나오고 싶어하는 간절함은 ‘막장’을 통해 빛으로 이어졌으나,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통로인 ‘막장’이 폐쇄되어 있다. ‘막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폐광의 시대를 맞아 갱구 안을 향한 그리움은 더 절실하다. “갱구는 막혀 있고” 라든가 “아주 막힌 갱구”에서 보여주는 단절된 희망을 ‘개 몇 마리 컹컹 짖’으며 서러운 폐광의 운명을 대변한다.
폐광기를 다루고 있는 이 시는 갱도 붕락사고로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죽은” 광부와 국가산업 발전을 위해 숨져간 광부의 노고를 떠올리며 잊혀진 시대를 일깨워 준다. 개의 울음소리와 죽은 광부 영혼의 울부짖음은 갱구에서 사람들이 사는 쪽으로 방향을 옮겨간다. 그러나 사람 사는 쪽에서도 역시 막힌 갱구처럼 마을도 막혀있을 뿐이다. 폐광촌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울음에 대한 메아리로 폐석더미가 공룡의 소리를 대신 낸다. 이미 사라진지 수억 년이 된 공룡의 울부짖음은 사라진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사라진 짐승이 내는 울음소리는 회복될 길 없는 폐광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라진 과거를 들추어내는 의식은 폐광에 대한 암울한 현재의 불만에서 기인한다. 개와 죽은 영혼, 그리고 공룡까지 사람 사는 쪽을 향해 짖어대면서 폐광지대가 갖는 절망은 극대화되고 있다. 김진광의 시는 폐광으로 탄광노동자와 탄광지역공동체가 와해된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면서 이 시대의 절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폐광의 현실을 드러내는 시들을 통해 우리는 그 동안 모르거나 잊고 지내던 탄광지역의 아픔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산업화로 인하여 변질되어 가는 삶을 조금이라도 그 본래의 의도대로 인간다운 삶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픔의 느낌들이 끊임없이 표면화되어야”21) 할 것이다. 탄광지역이 지닌 모순된 산업화의 모습을 문학 작품 속에 용해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의 몫이다. 탄광시는 바로 아픔의 느낌을 ‘표면화’하는 작업을 통해 이 시대의 산업과 노동현장에 동참하고 있다.
6. 맺는 말
탄광 현장과 탄광촌을 배경으로 쓴 탄광시는 우리 산업사회가 지닌 부조리한 현실, 탄광 현실이 빚어내는 상처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또 노동계층의 실존적 삶과 사회적 삶을 둘러싼 각양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앞에서 탄광시를 살펴보면서 절망의 밑바닥에서 체념을 거쳐 희망을 건져내는 힘이라든가, 가족의 미래와 생존을 위해 노동의 한계를 참아내는 치열한 삶, 정부의 대책없는 폐광정책 속에 무너진 탄광지역 공동체의 모순된 삶을 읽을 수 있었다. 탄광시에서 확인되는 것은 비극적인 현실의 극복방안으로 대립과 투쟁을 선택하기 보다 운명에의 순응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바깥 세계와 단절된 공간으로의 탄광현실이라든가, 막장으로 표현되는 절망적인 삶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불화를 피해 나가는 탄광노동자의 의식세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한편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세상과 화해에 나서는 탄광노동자의 의식세계를 담고 있는 탄광시 이면에는 노동만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병폐와 소외된 인간의 고독한 희망 찾기, 고통스런 현실 등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탄광시는 우리 산업사회에서 가장 모순된 사회구조를 지니면서 산업화의 모든 부작용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탄광지역을 현미경처럼 보여주면서 현 시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
탄광노동자들의 불우한 삶은 산업화가 진행되는 시대상황의 반영물로, 특정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산업사회에서 탄광노동자들이 겪었던 보편적 삶의 한 예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한국 산업사회의 모순된 노동현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탄광시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닌 구조적 모순의 현장을 비판하는 한편 절망을 극복해 가는 민중의 의지를 확인시켜준 데서 탄광시의 공로를 찾을 수 있다.
탄광시를 읽는 다는 것은 어두웠던 한 산업시대를 장식한 절망의 산업사를 읽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탄광시를 통해서 삶이 황폐하고 시련이 가중될수록 이의 극복의지 또한 강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과의 친화성 속에서 더욱더 생명에 대한 애착을 절실하게 느끼는 모습, 절망의 끝에서 삶을 향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그 모습을 통해 탄광노동자와 가족들의 삶의 치열성을 확인한다. 또한 모순된 시대적 질곡을 이겨내려는 인내의 자리에 그들의 삶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 확인이 가능한 것은 소외된 노동현실에 대한 애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탄광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탄광시의 단편을 살펴보는데 그치고 있지만, 탄광시를 연구하는 데 있어 시대적 흐름, 주제상의 차이, 작품의 형식, 창작 주체에 따른 차이점 연구, 다른 노동문학과의 변별성 등 다양한 연구 방법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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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tudy of the Life of a Mining Village as Represented in Coal Mine Poetry Collection
Jeong, Youn-Soo
This study is purposed to expand the range of Korean literature by examining the realities of mining laborers and mining village communities that are isolated from the age of industrialization. Coal Mine Poetry Collection started to spread from late 1980ꡑs and as the mining laborers and the village residents began to participate in creating poetries in throughout the 1990ꡑs, about 900 pieces have been created so far.
In this study, the pieces were selected for different subjects, including a mining laborer Jung Il-Nam and Seong Hee-Jik, a family of a mining laborer Kim Tae-Soo, a resident Kim Jin-Gwang and a visitor Lee Geon-Cheong , in order to examine the different aspects of Coal Mine Poetry Collection.
Coal Mine Poetry Collection formalizes the tragedies of working face experiences and the willingness to overcome them, the tragic realities of the mining village and their attachments to communities and the devastated reality of the mining village after the abolishment of the mines. We can understand that Coal Mine Poetry Collection represents the contradictories existing in the work places of Koreaꡑs industrialized society. Also, it shows the consciousness of mining laborers who solve the conflicts by accepting the hopeless life of the working faces rather than rejecting it.
Coal Mine Poetry Collection is significant in that it criticizes the structural contradictions of our society and identifies the wills of the commoners who overcome the despairs.
Key Words : coal-mine poems, coal-mine reality, despair, an abandoned mine, a coal mine labor, a blind end in a min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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