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절령통신

[스크랩] 세계화와 TRIGGER

소한마리-화절령- 2011. 1. 25. 23:58
 

세계화와 TRIGGER


1.


트리거 trigger: 본래 방아쇠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IT산업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데이터베이스가 미리 정해 놓은 조건을 만족하거나 어떤 동작이 수행되면 자동적으로 수행되는 동작으로 트리거는 데이터베이스에서 데이터에 대한 유효성 조건과 무결성 조건을 기술하는 데 유용하다고 한다. 트리거 필름은 약물중독이나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적 현안의 토론을 유발하기 위해 만든 영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1960년대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고속도로의 안정성에 대한 단편영화를 만든 데서 유래한다.’-daum.net 사전에서-


예를 들면 80년대 들어 비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곳곳마다 음란물이 판을 쳤다. 80년대 초반에 벌건 대낮에도 다방같은 곳에 들어가면 눈뜨고 보기 낯부끄러운 음란영화를 틀어놓기가 일쑤였다. 필자가 생활하던 강원도 사북 탄광부들의 산골 오두막에서도 유일한 오락거리나 되는 듯 광부들과 아내들이 전라의 서양남녀들이 동물과 같은 정사를 벌이는 포르노물을 즐겨 보곤 하였다. 오죽하면 ‘비디오’라는 말은 모든 음란성 행위를 대표하는 말로 쓰였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음란비디오를 보기 위해 할부로라도 비디오를 구입하는 대열에 끼었다는 게 관련 종사자들의 말이고 보면 결과적으로 이런 음란물의 보급은 비디오기기가 대중화하는 데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고 비디오가 보급된 나라 대부분이 겪는 것이기도 하였다. 


컴퓨터의 보급에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고 볼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에는 역시 음란물과 함께 게임이 견인차 노릇을 한 것이다. 모두 대중의 말초적인 흥미에 소구함으로서 대중의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종의 트리거,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이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출현한 것도 역사의 궁극적인 발전을 향한 하나의 트리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자본주의가 가진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봉건시대라 부르는 전근대 사회가 안고 있던 수많은 문제를 일단 해소하는 데 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가령 신분제의 해체와 정치적 민주화,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대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빈곤과 질병해결의 기반을 마련 한 것 등등. 무엇보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세계의 수많은 민족, 국가 문명들 사이에 소통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언설에 대해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가공할 자연파괴와 격심해지는 빈부격차를 낳은 것을 넘어 민족과 국가, 문명들 사이의 소통의 기반을 마련하기는커녕 9.11과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 등 갈등과 대립의 격화를 보면서도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는 질책이 따를지도 모르겠다.




2.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향후 30년 내에 세계 인구 전체의 수요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생산하는데 현 세계 노동력의 단지 2%만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윈피싱어(William Winpisinger, 전 국제기계협회회장)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현재와 같은 체제를 그대로 둘 경우 지구적 규모의 광범위한 대량실업이 일어날 가능성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앞세운 이랜드가 대량의 비정규직을 해고한 것은 장래 일어날 사태의 극히 작은 부분을 맛보기로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대목이다. 극소전자혁명(디지털혁명)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로봇산업의 발달 등은 아직 여유를 즐기고 있는 의사 등 수많은 전문직 종사자들마저 비정규직으로 내몰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18~19세기 산업혁명 초기에 자신들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주범으로 기계를 지목하고 나섰던 러다이티스트들을 순진하고 무지한 초기 노동운동의 한계라고 폄하한 지금까지의 노동 운동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해도 이제 와서 자본주의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당장 우리의 경험으로도 산업화가 달성되기 전 겪은 그 절대적 굶주림과 헐벗은 시절, 무엇보다 가정과 사회 구석구석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이란 눈 씻고 찾을 수도 없고 교사와 경찰, 관리들 앞에서 굽실대기만 해야 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 맑고 공기 좋고 인정 많은 공동체라는 것도 상대적으로 먹고살만한 인사들의 음풍농월로 밖에 들리지 않는 추억놀음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행정(行程)에서 나름의 필연성을 갖고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고안하고 기획하여 내놓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엇갈리며 인류의 욕구와 욕망이 뒤엉켜 생성되어 온 것이다. 어떤 점에서 자본주의는 제도,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경향성이나 과정(process)이랄 수 있다. 이전의 봉건사회나 노예제 사회가 그렇듯이.


이러한 자본주의가 출현했기에 주권재민이니 죄형법정주의니 하는 고상한 사상들이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아니면 한국전쟁 후 60년대의 궁핍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던 강원도 탄광부의 아들딸들이 그나마 주림과 추위를 덜게 해 준 것만으로도 자본주의와 산업화는 그 역사적 사명을 한 것이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의 소녀들이 충청도와 전라도 등에서 대도시로 올라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쪽가위에 손가락 다쳐가며 실밥을 따고 미싱을 돌려 동생들 공부시킨 덕분에 더 이상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같은 최루성영화가 공전의 흥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오야붕인 미국이 박정희라는 폭력적 지배자를 내세워 수많은 생산대중을 희생시킨 끝에 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대가로 주어진 왜곡된 산업화이긴 하지만.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이 기형적으로 생장(生長)시킨 구조의 수리에 아직도 수천만 대중의 고통이 연장되고 있는 비효율적인 근대화이긴 하지만.



3.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 역시 역사이성의 도구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언명한 ‘자유의 왕국’도 바로 자본주의가 이룩한 물질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을 토대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하여 세계의 모든 인류가 필요노동시간을 무한대로 단축할 기반은 마련되겠지만 문제는 이 생산물의 효과적인 유통이다. 산업화, 근대화, 과학기술의 발전, 사회제도의 진화 등이 불균등하게 진전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이러한 불균등으로 인한 폐해를 부당하게 떠맡고 있는 현실을 개선할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비만으로 고통당하는가하면 비참한 굶주림으로 나날을 짐승처럼 살아가는 비극적 현실을 혁파할 무슨 비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거칠 것은 다 거친 다음에야 그 다음 행정(行程)으로 이행을 허용하는, 융통성 없는 역사이성의 섭리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사는 반드시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음을 철칙으로 삼은 것처럼 자본주의 역시 언젠가 그 천수를 다하게 마련이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마냥 예측 불가능의 신비한 어떤 것은 아니다. 지난 역사시기의 거대한 변동에서는 인간의 의지가 능동적으로 간여할 수 없었고 이성의 간지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숨 가쁘게 적응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변동에는 일정하게, 아마도 상당하게 간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비디오의 보급에 음란물의 역할이 지대하였지만 이를 극복하고 비디오가 가진 많은 순기능을 살려낸 것처럼 긍정적 의미에서 인간다운 인류 공동체 실현으로 가는 트리거로서 자본주의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그러한 변화는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대중들이 비디오와 인터넷의 부정적 기능을 지적하고 비판하여 그 순기능을 하나씩 확보하였듯이 뜻을 함께하는 수천만 능동적, 대자적 인류가 각자의 처지에서 저마다의 몫을 다할 때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4. 


WTO와 FTA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새로운 시장과 이윤을 찾으려는 국제자본운동의 필연적인 요구로 탄생된 것이다. 제국주의 초과이윤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유지되던 GATT체제가 제 수명을 다하고 뒤늦게 추격하는 후발개도국들을 뿌리치고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출현한 것이고 그 구체적 실현이 WTO와 FTA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 새로운 괴물의 출현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수억의 대중들이 실업과 굶주림으로 내몰리고 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무기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 진행되는 현상만 보면 ‘타임머신’이나 ‘로보캅’에서 사실적으로 예언된 것 같은 두 세계, ‘엘로이’와 ‘몰록’으로 분화된 세계로의 진화(?)는 필연적인 것처럼 다가온다.


더욱 문제는 국내의 경우 민중적 세계인식이 결여된 함량미달의 ‘擬似’ 진보정치세력이 불가피하게 WTO-FTA체제에 투항하더라도 그 결과로 이익을 얻을 재벌 등 자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양보라도 이끌어 이로 인해 고통을 당할 민중부분에 대한 안전망 제공에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괴물의 출현에 어느 정도 방패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 정치세력이 오히려 괴물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수많은 대중을 인당수의 제물로 바치고 자신들만 빠져나가려는 시점에서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물론 있다. 있어야 하며 실제로 있을 것이다. 


이 가공할 WTO와 FTA라는 21세기 신 괴물을 낳은 구 괴물인 20세기 자본주의가 물질생산력을 고도로 증대하여 인류의 필요노동시간을 무한대로 단축할 물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나 그 지구적 유통구조를 완비하지는 못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전달되지 못하는 대사불비(代謝不備)의 불완전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 불완전을 보완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세계화의 도구인 WTO-FTA인 것이다.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출현한 근대 국민국가가 인류의 근대화, 문명화에 공헌한 만큼 그에 맞갖은 해악을 끼친 것을 수리하자면 바야흐로 우리의 삶에 구체화되고 있는 ‘세계화’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족과 국경, 저마다의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민중적 국제주의를 실현할 고속도로로서 이 ‘세계화’를 이용해야 하고 이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족과 국민이 상상의 공동체라면 더 큰 상상의 공동체로서 인류공동체는 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인가. 국익이라는 허깨비가 민중적 국제주의, 민중적 세계화를 가로막고 있다면 더 크고 강력한 인류의 이익이라는 허깨비로 이를 극복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는가. 삼년고개의 역발상과 창조적 상상력을 기껏 기업경쟁력 강화라는 쩨쩨하기 짝이 없는 곳에 가로채이지 말고 더욱 통 큰 일판에 끌어와야 하지 않을까.



5.


결국 역사는 유독 일하는 민중에게는 가혹한 시련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아가게 하는 숙명을 부여했다는 의구심이 든다. 겪어야 할  고난을 하나도 건너뛰지 못하게 엄격한 시험 감독처럼 군림해왔다. 특히나 한반도의 민중에게는 그러한 원칙을 더욱 혹독하게 적용해 온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95년인가, 문민정부 시절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렝 투렌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중들의 투쟁과 희생을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마디게 진전되어왔기 때문에 좀처럼 후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언명한 바 있다. 꼭 그가 말했대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점령군의 제무시(GMC)에 실려 외양만 이식된 수많은 제3세계의 허방다리 민주주의처럼 껍데기뿐인 것을 단 한 푼의 공짜도 없이 철저히 제값을 치르고 얻은 것이다. 해방정국과 단정수립, 동족상잔의 전면전을 거쳐 거세찬 물결과 같이, 수백만 민중의 피땀을 제물로 영수증을 챙기며 한발 한발 쟁취한 것이다.


지배자들은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여 새로운 지배도구를 고안해왔고 그 도구는 언제나 수많은 민중을 죽음과 같은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아니 몰아넣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악독한 조건 속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것까지 어느 틈엔가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는 자본의 끈질긴 적응력 이상으로 지배층이 고안한 지배도구를 자신의 해방을 향한 도구로 전환하는 생명력을 보인 것이 민중의 힘이다.


부르주아의 이해를 관철하기위해 민중을 동원하여 얻어낸 신분해방과 구지배층을 몰아내기 위해 속임수로 도입한 선거제도, 자신들의 새로운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착안해 낸 법치주의 등등은 결과적으로 양날의 칼이 되어 민중의 무기로도 유용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생성 이후에도 현대적 지배자들은 좀 더 교묘한 지배 장치를 끊임없이 개량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온 데 대해 민중 역시 어느 틈엔가 칼자루를 바꿔 잡아왔다. 자본의 직접적 이윤획득기구인 공장이야말로 민중의 해방을 담보하는 강력한 기지로 전환되지 않았는가.


이제 자본은 바로 그 공장으로부터 노동자를 몰아내는데 누천년 동안 노동을 통해 인류가 쟁취해낸 전자혁명의 성과물을 가로채려하고 있다. 수억의 노동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민중을 어둠의 종족으로 몰아넣고자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략의 산물인 세계화는 결국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자본의 자기운동속성이  계략의 실현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민중적 세계화가 저절로 익어 떨어지는 감나무가 아니라는 것 또한 명백하다. 역사는 스스로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이에게 몫을 내주었을 뿐 세월만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응답을 보내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이성의 본질을 몸으로 체득한 민중, 능동적 민중, 대자적 민중은 91년 이후의 혼란과 미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중적 세계화를 위한 지구적 연대에 나서야 한다. 현대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괴물이 민중적 세계화를 위한 방아쇠임을 깨닫고.



출처 : 화절령
글쓴이 : 화절령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