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 너머에서.....!

故 채광석

소한마리-화절령- 2011. 5. 28. 15:58

 

 

 

 

 

채광석(1948~1987)

 

 

 

 

 

 

 

"선생님, 반드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반드시…."(채광석이 강제입영하며 남긴 말)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통해 다른 시기들 보다 압축된 삶을 산 시기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기들 중 젊은 시절의 것은 대개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시대가 낭만을 터놓고 누릴 만큼 한가롭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있는 한 사랑의 문제는 언제나 젊음 앞에 가장 몸살나는 문제의 하나로 머무를 것입니다. 여기 실린 글들은 한 젊은 남자와 여자가 그와 같은 사랑의 문제를 앓으면서 죽 받은 편지들 중 남자 편지에서 보낸 것을 엮은 것입니다.

   1975년 봄, 그 젊은 남녀는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씩 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대학 4년생이었고 여자는 신입생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조금씩 시간을 보내는 만남이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 남자는 중뿔나게도 무슨 거창한 신념의 깃대를 흔들어 대더니만 훌쩍 벽돌담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1975년 5월말의 일이었습니다. 남자로서는 시대가 낭만을 누릴 만큼 한가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나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낭만은 야금야금 담 안의 세계와 담 밖의 세계를 관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는 드러내놓고, 마침내 삶의 중심을 차지할 만큼 그 벽돌담을 사이에 둔 기이한 사랑은 서로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직접 만날 수 없는 지극히 단순화된 상황이 현실보다는 상상력을 더욱 부추켜준 덕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편지들은, 허다한 자기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함엽서의 작은 공간에 자기의 온 현존을 쏟아넣으려는 과욕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1977년 초여름, 그러니까 들어간지 만2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날 아침 그 남자는 제 시간이 차지 않으면 도대체 열리지 않는 철문을 열고 바깥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1979년, 그들은 결혼했고 얼마 전에는 첫 아들의 돐을 기념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 편지들을 쓴 「그」남자입니다.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의 서문 중에서 - 채광석 >

학생운동으로 강제징집당했던 벗들과 함께.
(좌로부터 이태복, 이상완, 채광석, 임경철)

 

 

 

채광석 묘지 - 좌로부터 시인 박선욱, 평론가 현준만, 김명인, 시인 강형철, 작가 김남일, 시인 양문규(이 사진은 양문규 시인의 홈페이지에서)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채광석

 

흙을 뒤엎으면 이상 한파의 심장 속에서

스스로 새싹을 키워 온 꽃순들을 만나느니

우리들은 버리운 계절의 고동을 귀에 담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이여 너마저 잠재우는

시대의 곤고함과 자아의 무반성을

통채로 흔들어 깨우며

우리는 다시 죽어야 한다 봄에 눈을 뜨는

새싹들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 속에서

사랑과 함께 죽어야 한다.

사랑 안에 사랑으로 죽어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그 찬란함을 이 봄에 맞기 위해서라면

순간을 넘기는 총명보다는

기어코 끝끝내 승리하고야 마는 우리의 힘이

그렇다 다만 우직의 혼만이 우리와 함께 죽어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무성한 푸르름으로 우거지는

부활!

그 사랑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이 봄, 경박한 기쁨과 시시한 즐거움보다는

결연한 죽음,

불타는 사랑의 죽음으로 사랑이여

우리는 묻히자. 
 

 

 

 

 

 


채광석 연보

1948년 7월 11일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출생

1955년 창기초등학교 입학

1961년 안면중학교 입학

1964년 대전고등학교 입학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입학

1971년 10월 위수령 실시후 강제징집

1974년 5월 22일 서울대 김상진 열사 추모시위사건으로 구속. 이때 공주교도소에서 강정숙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뒷날 서간집 「그 어딘가에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발간

1977년 6월 24일 2년 6개월간 수감생활 마치고 출소

1978년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입사

1979년 강정숙과 결혼

1980년 다시 복학. 5월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다시 체포당하여 40일간 모진 고문을 당함.

1983년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라 세 번째 복적 허락을 받았으나 거부. 후배시인 김정환의 장편서사시 「황색예수전」(실천문학사)에 문화평론 성격의 발문 「김정환의 예수」를 발표하여 등단.

1984년 민중문화운영연합 창립과 동시에 실행위원으로 임명,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건 작업에 뛰어들어 사무국장 역임.

1985년 시집 「밧줄을 타며」(풀빛), 사회평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청년사) 발간. 민통련 문화예술분과 위원장, 도서출판 풀빛 주간.

1987년 7월 12일 새벽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 7월 14일 '민족시인 채광석 민주문화인장' 거행. 팔달공원 묘지에 안장.

1988년 1주기에 맞춰 「채광석 전집」(풀빛) 문학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한마당) 발간.

1992년 5주기를 맞이하여 대전에서 추모문학의 밤 「그 사람, 채광석」 거행

1997년 10주기를 맞아 서울에서 추모문학의 밤「채광석, 그에게 다시 묻는다」 거행

2000년 7월 12일 안면도 송림공원에서 시비(詩碑) 건립
 

 


   글을 읽고 내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남자 참 멋있는 남자라는 것이었다. 채광석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그러니까 나의 대학교 2학년 시절 자칭 '돌돌이 형'이라고 통하던 내 친구에 의해서였다. 녀석은 내게 채광석의 시집 <밧줄을 타며>란 시집을 내 생일에 선물했었다. 지금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린 그 친구를 난 아주 가끔씩 기억해내야만 한다.

  어쨌든 87년 그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의 이름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거나 설령 들었었다 하더라도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90년이 되기 전까지 나는 문학이란 것에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채광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히려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 논쟁 등이 이미 한 풀 꺽이기 시작한 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였다. 김병익 선생의 강의 시간 중에 우리는 <민중문학과 민족문학 그리고 순수문학>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발견한 사실들 중 하나는 채광석이란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었고, 마치 80년대 전체를 들끓게 했던 것처럼 시끄러웠던 민족·민중문학론 논의에 대해서 많은 글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정치(精緻)하게 다듬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일이었음에도 놀랍게도 그에 대한 자료들이나 평가들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학비평이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문학비평 그 자체에도 해당된다. 그 하나가 비록 깊은 상관성으로 연통해 있고 그래서 경계가 모호하다 하더라도, 인접한 문학 이론과 문학사의 아카데믹한 작업으로부터 문학 비평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서로 혼동되어 역할 분담이 착종되는데 가령 현대문학사가는 당연히 문학평론가라는 잘못된 인식이 그런 예이다. 문학 작품이 구체적인 삶과 세계에 대한 언어적 의미화라면 문학비평은 작품으로 형상화된 그 언어적 의미화를 다시 의미화하는, 메타비평적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럴 때야 비평은 학문으로서의 문학학과 구별되는 문학의 장르에 들 것이며 그것이 비평문학으로 가름될 것이다. 그 비평문학은 시인과 작가의 작품들에 점수를 매기고 우열을 가리는 사정행위가 아니고 흠을 들추고 잘못을 꼬집는 할큄의 비난(작고한 채광석이 이름붙인 ‘문학비난가’라는 말!)이 아니라,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에서 그것들이 숨기고 있는 삶의 비의와 세계의 진의를 밝혀내며 그래서 추악한 현실을 폭로하고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세상에의 꿈을 꾸도록 만드는 미학적 언어 행위이다.

<비평의 ‘문학’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 김병익(문학평론가)>

  내 생각으론 정과리는 우리 시대의 훌륭한 평론가로 나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그 역시 논투나 사투의 중 가운데 놓여 지식인적 문학인의 한계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 특히 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문학평론가는 문학평론가 이전에' 보다 훤출한 역사비평가, 사회비평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극화된 이론의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는 인터프리터Interpretey이 한계를 뛰어 넘어, 크리티크Critic의 자세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정과리도 한국 비평문학의 수준 혹은 바로 그 한계를 감수할 수밖에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김명인, 홍정선과 더불어 아직은 소중한 씨앗들인지라 두고 볼 일이다. 고인이 된 채광석처럼, 적어도 오늘의 분단 한국문학에선 자기의 온몸을 내보일 줄 아는 그런 투박스러우나 솔직한 비평이론가가 그래서 더욱 그리워지기도 한다.

<민족문학의 대로를 위한 몇 가지 생각 - 문병란(시인)>

  그는 이전까지 관습적으로 되풀이되던 문학판의 외국이론 짜집기식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만큼 그의 비평은 공격적이었고, 다듬어지지 못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채광석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전위(前衛)였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투박하지만 공격적인 비평행위들은, 사회 모순에 등돌린 채 안주하고 있는 그간의 평단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공격적인 성향이나 투박함이 채광석이란 사람 자체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를 회상하는 많은 문인들이 그의 따뜻한 성품에 대해 상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를 묻고난 오늘 이후에도, 죽고 없는 그는 항상 우리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들 곁에 있었습니다. 때론 귀찮을 정도로 철철 넘치는 정력으로, 주책으로, 입담으로, 논쟁성으로, 거칠은 욕설로, 온몸을 부벼대는 사랑의지로, 땀냄새로 체온으로 함지박 웃음으로. <김정환의 약력보고 가운데>

시를 쓰는 평론가, 채광석, 우리는 우스갯말로 자네를 문학비난가라고 놀려댔지만, 사실은 자네가 올바른 문학을 추구하면서 못마땅한 문단의 풍토와 가식과 허위에 찬 문화주의에 대하여 얼마나 전의에 불타는 붓을 날카롭게 휘둘렀는가를 잘 알고 있다네. 사실 차갑고 냉정하고 적당히 예복입고 써야 할 평론을 자네는 일개 병사처럼 단독무장을 한 채로 이리저리 부딪치고 안으로 피를 흘리곤 했었다네.                     <황석영의 조사 가운데>

암울한 시대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청년. 채광석

  194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대전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대 영어과에 68학번으로 들어갔던 채광석은 1971년 박정희 정권이 내린 위수령으로 강제 징집되어 전방에서 군복무를 해야 했다. 군을 제대하고 1975년 복학한 학교는 잇따라 내려지는 긴급조치로 꽁꽁 얼어붙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는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 신동수씨 등과 함께 채희완 교수는 '김상진 추모제' 라는 이름의 시위를 기획한다. 이 시위의 표면에는 탈춤반, 문예반, 연극반이 나섰다.

  대학내에 새로운 방식의 집회문화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사건으로 황선진 인천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장선우 감독. 유상덕 한국교육연구소장 등이 도피생활을 했고, 몇몇 한두레 활동가들도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이 시위(일명 5.22사건)로 구속된 그는 2년반 동안 공주 등지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그는 후일 그의 아내가 된 강정숙 여사와『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로 엮인 편지들을 썼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복도 잠시 야만의 시대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80년 5월의 계엄령 포고령 위반으로 다시 투옥당한 그는 인간 육신의 한계에 달하는 굴욕과 갖은 고문을 당하고 석방된다.

  이후 그는 잠시 신용협동조합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 첫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빈대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 들어간다. 생전의 그는 잠시도 쉰 적이 없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국장, 집행위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 민중문화운동연합 실행위원, 「시와 경제」동인, 도서출판 풀빛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150원이 있었다고 한다. 살아 생전 머리 누일 집 한간 장만하지 못한 채 민중문화운동진영의 맹장으로, 맏형으로, 이론가로, 시인으로, 평론가로 그가 소유했던 것은 로직 뜨거운 마음 한 오라기였던 것이다. 시인. 황지우가 인용하고 있듯이 '남들이 다 어려운 가운데서 매끄럽게 챙길 것은 챙기고 일의 결과를 소유하면서 눈치껏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가장으로서는 못살았고, 지식인으로서는 철저하게 살아온' 그였다.

채광석 - 그가 남기고 간 과제와 참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히들 80년대를 문학판에서는 '시인의 시대'라고 말한다. 되돌려 생각해보면 80년대만큼 우리 문단에 기라성같은 시인들이 많았던 시대도 없었다. 파울 첼란이 아우슈비츠의 잔혹함 이후 더 이상의 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던 유럽 문학 내에서의 절망을 깨고 시를 썼듯이 80년 5월의 잔혹한 현실을 딛고 시인들은 시 특유의 기민한 장르적 속성답게 숱한 시들을 토해냈고 5월 광주는 시인들의 부채이자 영감의 근원이 되었다.(그에 비해 소설적 성취는 뒤늦게 찾아왔고 그나마 90년에 접어들며 더 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80년대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란 것이 운동 전반에 걸쳐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입증되면서 지식인 문학은 자신들의 계급적 토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노동자 계급이, 우리 민족이 해방 이후 외세, 매판자본에 의해 지속되어 온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저항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채광석은 '이제 지식인 계급의 문학은 이대로 있으면 몰락한다'는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다. 그는 오랫동안 문학권력의 한축이자 지식인 담론의 생산자였던 창작과 비평의 그늘 안에 안주하던 당대의 많은 문학평론가들과는 달랐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중 속에서 새로운 문학을 찾아내려 했다. 전자인 창비가 시민적 민족문학이라면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새로운 담론을 끌어내며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1987년 1월 정기총회장에서 구속문인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하는 채광석(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집행위원)

  그때 채광석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때 박노해라는 한 무명 노동자 시인을 발견한다. 그의 문학적 이론을 뒷받침해 줄 시인의 발견은 그에겐 엄청난 기쁨이었으리라.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 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 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 박노해의 등장이 촉발한 문학창작의 주체 논쟁은 87년 김명인의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민중문학의 구상'이라는 논문을 거치면서 민족·민중문학의 급격한 이념 분화로 이어진다.

  그에게 『노동의 새벽』은 민중적 리얼리즘의 승리의 증거였던 셈이다.

  채광석의 '민중적 민족문학'의 핵심은 민중민족운동의 과제인 "민족자주화와 민중민주화"에 대한 문학의 복무였다. 신동엽에게 민족시인이란 계관을 씌워준 것 역시 채광석이었다. 그는 신동엽에게 민족자주화를, 박노해에게서 민중민주화를 본 것이다. 이런 그가 뜨겁게 달궈놓았던 이 땅의 문학은 그가 사라지자 얼마 안 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가 그토록 상찬했던 박노해는 이제 풀려났다. 그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았던 70년대의 노동자 수기 작가들. 그들이 부르주아들에게 먹혀듦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처녀성을 상실했던 것처럼 - 채광석은 명망을 얻은 이들을 노동자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닌 어정쩡한 얼간이들이라 욕했다고 한다 - 한 세기가 저물고 또 다른 세기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옥중서간집/ 채광석 지음/ 형성사/ 1983년

『밧줄을 타며』- 풀빛 판화시선14 /채광석 지음/ 풀빛/ 1985년

『민족문학의 흐름』 - 채광석문학평론집/ 채광석 지음/ 한마당/ 1987년

『민족민중문학론의 쟁점과 전망/ 김사인·강형철 엮음/ 푸른숲/ 1989년 - <시를 생각한다>/채광석

 기타 -『물길처럼 불길처럼』- 채광석사회평론집/ 채광석 지음/ 두레/ 1985년, 『채광석 전집』/채광석 지음/풀빛 1988년 등

 기타에 속하는 책은 읽지 못했으나 작가의 저작을 소개하기 위해 언급

 시인 채광석이를 생각하며(권오량. 서울사대 영어교육과 교수)

 시인 채광석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곳

 좀더 자세한 그의 약력을 볼 수 있는 곳

 


  20세기를 30년간 살아왔고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려 하는 이때에 진보를 말한다든지 변혁을 말한다는 것이 다소 낭패스럽다면 그것은 시대가 변했다기 보다는 나 자신이 변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최근 나는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한 사람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봐버려야 하는 일이 있었다.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한 것은 부평시민연대에서 주최했던 박노해 초청강연회였고, 보기 싫은데 보게 된 일은 인현상가 라이프호프 화재현장이었다. 박노해 씨가 사노맹의 맹주 시절 나는 그의 체포 현장을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공사현장에 목재를 배달해야 하는 일꾼에 불과했고, 그가 체포되어 갈 때도 지금 잡혀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나중에 나온 뉴스를 보고서야 그게 박노해였음을 알았다.

  한때 그를 몹시 좋아했던 나는 그의 문건들을 몰래 구해 읽기도 했는데 그가 반성문에 도장을 찍고 나와 행한 일성이 '돈이 되는 운동'이란 말을 듣고 그가 얼마나 변화된 모습으로 사회적 활동을 할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자고로 진보나 변혁 혹은 대안이란 것은 기성 사회와 불화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긴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박노해로 상징할 수 있는 우리의 진보 혹은 대안세력이란 것이 더이상 사회적인 긴장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20세기 대한민국의 세기말은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하다. 인현상가의 화재 사건으로 우리는 또다시 꽃다운 생명을 불살라버렸다. 화성 씨랜드 화재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4개월여만의 일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통해 한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반성에 익숙하지 않으며 혹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곧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 그 새로운 천년의 시작에 앞서 나 역시 작은 변화들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천년에도 내 심장은 여전히 왼쪽에서 뛸 것이기에 천하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채광석의 죽음에 조상하기 보다는 장례식장에서 누군가가 외쳤다는 '호상'이란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그가 죽지 않고 많은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이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것은 더 큰 절망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채광석의 많은 부분들이 허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항상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문학 평론가들은 글을 참 잘 쓴다. 그리고 매끄럽다. 그들은 너무 매끄럽다. 물묻은 다이알 비누처럼 너무 매끄러워서 그들은 본질을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지금 이 순간 그가 그리운 것은 아마도 그의 욕설을 육성으로 들을 수 없는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