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그의 이론은 콤플렉스로 점철된 ‘무의식’의 자기분석
작품과 작가의 삶은 무관하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몰개성’ 이론이 글쓰기 일반을 대변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었지만 작가의 삶의 편린들이 작품 해석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나름의 유용함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소소한 것까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전적 연구의 한 구절에서 자신의 삶과 정신분석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정신분석과의 관련성을 배제한다면 나의 개인적 경험들은 아무런 흥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프로이트의 개인사를 잠시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을 이해하는 열쇠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이론은 철저한 자기분석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또 하나의 사례
이제 프로이트를 상담용 소파에 편히 눕게 하고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말하게 두자. 물론 시가를 한 대 물려주면 더 없이 좋으리라. 드디어 그가 ‘자유연상’을 하기 시작한다. 느슨하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무신론자이기도 했다. 그가 유대교와 그 전통에 대해 갖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그의 반유대 정서는 자신의 이름을 지기스문트(Sigismund)에서 지그문트(Sigmund)로 바꾼 데서 유추해볼 수 있다. 지기스문트는 유대교에 관용을 베푼 헝가리 군주로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니발과 모세에 대한 동일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는 아리안 족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내며 기독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어쩌면 콤플렉스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모순되고 양가적 감정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프로이트는 콤플렉스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핍박받는 소수 민족 출신에다가 변변치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기차 여행에 대한 공포와 스스로 로마 신경증이라고 불렀던 증상, 그리고 질투와 그로 인한 죄의식 등이 뒤섞여 있었다. 막내 딸 안나에 대한 집착 또한 심해서 자신이 분석했던 그 어떤 사례보다도 전형적인 히스테리 부녀 관계를 형성했다. 게다가 그는 코카인을 상습적으로 복용했고 학문적 동료와 교류하면서 동성애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직관에만 의존한 추론
아직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제도권 학계에서 완전히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놀라울 만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검증 가능성은 여전한 시빗거리다. 정신분석의 유일한 도구가 언어이고, 대상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이런 비판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직관에만 의존한 프로이트의 어처구니없는 추론 또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이트가 분석한 도라의 사례다. 그에 따르면 도라는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를 간호하는 내연녀, 내연녀의 남편 K씨 모두와 동일시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프로이트는 도라와 K씨와의 스킨십에 대해서도 작용(자극) 반작용(흥분)이라는 생리, 물리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한다. 이처럼 기계적이고 경직된 해석과 가부장적인 권위로 환자의 주장을 묵살하는 독단,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성욕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의 측근들조차 돌아서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적어도 임상 치료에 관한 한 정신분석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수많은 치료 실패와 재발 사례들이 그것을 증거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유효성은 오히려 후대의 학자들이 끝없이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 즉 무의식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그것이 언어와 맺는 관련성에 있다.
무의식과 언어의 은유
정신분석에서 본질적인 것은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외쳤던 자크 라캉은 무엇보다 이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의식이 아닌 어떤 것, 표면적 의식 뒤에 존재하는 막강한 배후세력이 바로 무의식이다. 너무 추상적인가? 구체화시켜 제시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무의식이 아니다. 우리가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볼 수 있는 건 꿈을 통하는 방법뿐이다. 중요한 것은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이 구성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꿈의 응축과 전치라는 방식은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라캉에 의해 언어의 은유와 환유로 대치된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의 의미다.
프로이트 이전까지만 해도 자아 개념은 인간이나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의식이 전적으로 행동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가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의해 보다 심층에 존재하는 무의식이 발견된 이후 이성과 합리로 대표되는 근대 인문학의 지반이 흔들리게 된다. 행위의 원인이 자아-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이라면 이제 오랫동안 분리되었던 신체와 정신 사이에도 교섭의 다리가 놓인다.
프로이트는 끝없이 이론을 수정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지형학(3항 도식: 의식-전의식-무의식, 초자아-자아-이드, 쾌락원칙-현실원칙-열반원칙)을 유지하는데 이것은 라이히의 성격분석,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 레비-스트로스의 매개항에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역사유물론에 적용된 ‘중층결정’(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개념과 인과론이라는 시간적 선형성을 뒤엎는 사후성 논리도 20세기를 예비했던 중요한 공헌이다.
시가, 죽음 충동
프로이트는 애연가였다. 시가는 그에게 지적인 자극제였고, 프로이트는 그것 없이 정신분석학의 탄생은 불가능했다고 고백했다. 철저한 자기분석으로 유명한 그에게도 섣불리 분석(재현)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담배와 어머니였다. 분석에 필요한 적절한 거리두기(중립성)가 어려울 만큼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린 대상들이었고 이것은 어쩌면 ‘저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짐짓 무관심한 척 하지 않는가? 어설프게 관심을 보였다가 다치기 싫으니까 말이다. 어머니의 부재를 견뎌내기 위한 프로이트 손자의 ‘실패 놀이’(포르트-다(fort-da) 놀이로 알려진, 실패(실타래)를 던졌다 다시 끌어당기기를 반복하는 놀이)와 흡연 행위의 유사성은 흥미롭다. 연기를 흡입했다 내뿜는 동작은 실패를 던졌다가 다시 당기는 놀이와도 무리 없이 연결 된다. 프로이트에게도 시가는 결핍된 욕망의 대용품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담배를 통해 그가 얘기하는 죽음 충동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긴장을 감소시키려는 쾌락원칙을 끝까지 밀고가면 긴장 제로, 즉 죽음이다.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생명체의 충동, 그것이 죽음 충동이다. (이것은 강렬도 제로의 상태를 뜻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를 환기시킨다.) 의사였던 프로이트가 담배의 해악에 대해 몰랐을 리 없다. 실제로 코카인 중독의 위험을 깨달은 뒤 담배에만 몰입했던 그는 비염, 심장 장애, 종양으로 심하게 고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흡족한 듯이 즐겼고 소울 메이트였던 플리스의 반복되는 금연 처방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고통 속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았다. 플리스는 프로이트의 흡연에 대한 승인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금지하는 자로서의 상징적 아버지의 자리를 꿰찼고, 프로이트에게 분석(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던 담배는 ‘숭고한 사물’의 위치로 고양됐다.
이쯤에서 프로이트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라이히가 강조했던 물음을 돌아보며 글을 마치자. 계급적 이해를 배반했던 파시즘 체제에서 예속을 욕망했던 대중의 비합리성과 현재의 반세계화 저항 시위라는 증상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 또는 단절이 존재하는가? 이런 모순과 양가성을 포착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 정신분석은 정답을 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를 더 알고 싶다면
프로이트를 제대로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우선 <프로이트의 환자들>(김서영/프로네시스)을 추천한다. 전집에서 사례들만 따로 모아 요약한 책으로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는 독자들에게 좋다. 내용이 충실하고 무엇보다 권말 부록으로 수록된 전집 기행과 독해 지침은 입문자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꿈의 해석>,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쾌락원칙을 넘어서>, <종교의 기원> 등 4권을 권한다. 학술서에 인용된 빈도로 보나 주요 개념과 이론들의 변천 행보를 보나 분기점이 될 만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필립 그랭베르의 <프로이트와 담배>(김용기 옮김/뿌리와이파리)에서는 플리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소개되어 있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이론과 예화들이 챕터 별로 배치된 형식으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프로이트의 유대인으로서 정체성과 모세에 대한 충격적 일화가 담겨 있는 요세프 하임 예루살미의 <프로이트와 모세>(이종인 옮기/즐거운 상상)도 프로이트 이해에 도움을 준다. 죽음 충동에 관해서는 제드 러벤펠드의 <죽음 본능>(박현주 옮김/현대문학)이라는 흥미진진한 추리 소설이 있다.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월적 환원을 위한 투쟁 (0) | 2011.12.10 |
---|---|
구조주의의 태반 (0) | 2011.12.10 |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긍정 (0) | 2011.12.10 |
II. 현대사상의 뿌리들 ① 카를 마르크스(1818 ~ 1883) : 변증법, 프락시스 (0) | 2011.12.10 |
21세기에 보는 20세기의 사상지도 (0) | 2011.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