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긍정

소한마리-화절령- 2011. 12. 10. 09:30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긍정

이정우 | 대안연구공동체 파이데이아 학장
ㆍ니체(1844~1900)

니체는 서구 철학사의 거대한 변환,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변환을 진수시킨 인물, 철학사의 이정표에 이름을 각인한 인물이다. 무엇이 니체를 ‘문제적 인물’로 만들었는가?

니체는 영원불멸의 것을 희구했던 서구 존재론사를 전복시키고 생성과 창조의 철학을 연 선구자이다. 그의 사유는 플라톤 이래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존재’의 철학에 일침을 가하고 생성존재론(ontology of becoming)의 단초를 열었으며, 그가 연 길은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 등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니체는 플라톤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적 가치에 철퇴를 가하고,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근간으로 하는 초인의 사상을 설파했다. 기존의 가치를 송두리째 거부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 니체는 서구 문명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니체 사유의 초석은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영원회귀란 무엇이고 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성을 저주할 때, 시간의 흐름 앞에서 허무주의에 빠질 때, 사람들은 ‘앙심(르상티망)’을 품게 된다. 왜 나는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나고 또 죽어야 하는가? 어째서 세계에는 내 삶을 궁극적으로 뒷받침해 줄 동일성이 없다는 말인가? 이는 곧 생성만이, 차이들만이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에 대한 앙심이다. 하지만 니체는 외친다. 생성은 무죄다!

생성이 무죄임을 깨달은 사람은 영원회귀를 긍정한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차이생성의 반복을 긍정하는 것이다. 통상 반복이란 어떤 같은 것의 반복으로 이해되지만, 시간 속에서 완벽히 같은 것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항상 차이가 동반된다. 차이나는 것들만이 영원히 회귀한다.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차이나는 것들이 반복된다는 것(결국 세계는 차이를 계속 산출하면서 이어진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 이것이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이는 곧 시간과 생성을 부정하고(앙심을 품고) 영원불멸의 것을 꾸며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떻게 영원회귀를 긍정하는가? 니체는 일체의 “그랬었다”를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했노라!”로 바꿀 것을 요청한다. 시간과 생성변화, 우연과 덧없음의 허망함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긍정하는 존재로 화하는 것. 하지만 이것은 결코 사후적 정당화가 아니다.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긍정하는 자기정당화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건들의 일어남 그 자체를 에누리 없이 긍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긍정한다는 것은 사건의 파편들을 이어붙이고, 생성의 수수께끼를 풀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들을 거두어들이는 전체, 수수께끼를 해소하는 해(解), 우연을 설명해 주는 필연을 해체함으로써, 파편이 더 이상 파편이 아니고, 수수께끼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며, 우연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는 경지를 가리킬 뿐이다. 전체, 해, 필연을 해체해버린 파편, 수수께끼, 우연은 더 이상 부정적인 뉘앙스에서의 파편, 수수께끼, 우연이 아니게 된다. 이런 경지에서만 영원회귀는 긍정된다.

삶은 주사위놀이와도 같다. 매번 던질 때마다 중요한 것은 “그랬었다”라는 우발성을 의지의 필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던져진 수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가 아니라 매 수마다 동반되는 의지의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그랬었다”에 대해 투덜거리며 따라가기보다는 “창조적 번개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 진정으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 이것이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영원이고, 그 사랑의 증표는 회귀이다.

서구의 기독교적 가치는 원한=앙심, 가책=죄의식, 그리고 금욕으로 구성된다. 서구 문명은 그리스-로마적 건강함을 유대-기독교적 병약함으로 대체함으로써 망가지기 시작했다. 고대적 환희와 승리가 중세적인 어두침침함과 비틀림에 의해 더럽혀진 것이다. 서구 문명은 ‘로마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대립의 역사이며, 후자가 전자를 정복함으로써 서구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이런 흐름은 근대에 이르러서조차도 치유되지 못했다. 현대인들의 저 왜소함과 평범함을 보라. 니체는 외친다. “선악의 저편에 숭고한 수호의 여신들이 있다면-내가 한번 볼 수 있게 해 달라! 아직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 만한 완전한 것,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 행복한 것, 강력한 것, 의기양양한 것을 한번 볼 수 있게 해 달라!”

‘영원불멸’ 서구 존재론사 전복 생성·창조의 철학 연 선구자

유대교적인 원한=앙심은 기독교로 전환되면서 가책=죄의식을 발명해냈다. 유대교는 “그들은 악하다”고 말한다. 이제 유대교를 이은 기독교는 말한다. “나는 악하다!”고. 기독교는 원한의 방향을 바꾸어 한 개인의 “양심” 속에 내재화한다. 이로부터 ‘가책’이 생겨난다. ‘원죄설’이야말로 이 가책의 정당화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신자들은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고통을!”이라고 외친다. 더 많은 고통을 내면화할수록 더 큰 구원의 기회가 보장된다.

유대-기독교가 발명해낸 또 하나의 개념은 금욕이다. 모든 밝은 것, 강한 것, 행복한 것들은 ‘죄’로 전락한다. 원한이 세계/삶을 고통으로 보고, 가책이 고통을 내면화한다면, 금욕은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 니체는 이런 금욕주의에서 ‘반(反)자연’, ‘삶을 거스르는 삶’의 전형을 본다. 금욕적 인간들은 무리를 이룬다. 공동체 속에서 우울증을 극복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무리를 조직한다. 우리 안에서 개인들은 왜소화되고 하향 평준화된다.

니체에게 현대(니체의 당대)는 허무주의의 시대이다. 허무주의는 세 가지의 얼굴로 나타난다. 1)소극적 허무주의는 의지의 소멸을 지향한다. 의지하는 것은 귀찮다. 하지만 귀찮아하는 것 자체도 귀찮다. 2)반동적 허무주의는 무를 의지한다. 죽음에의 욕동. 해방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 3)부정적 허무주의는 초월을 지향한다.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머저리 같은 기독교인들.

니체가 지향하는 것은 의지의 소멸과 투쟁하는 의지에의 긍정이자, 무에의 의지와 투쟁하는 존재=생성에의 의지의 긍정이며, 초월에의 의지에 투쟁하는 창조에의 의지의 긍정이다. 창조행위는 초월적 동일자가 아닌 의지적 생성에의 긍정이며, 무가 아닌 새로운 생성에의 긍정이며, 의지의 소멸이 아닌 의지의 확장에의 긍정이다.

이러한 긍정이란 곧 “삶의 형식을 창조하는 힘”, 즉 ‘조형력’에의 긍정이다. 형식을 창조하는 힘은 곧 해석하는 힘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해석이란 세계를 특정 관점에서 보는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특정한 해석 주체로 내세우는 행위이다. 한 인간의 관점이란 곧 그의 존재이다. 나아가 해석이란 힘에의 의지에 입각해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산다는 것은 곧 힘에의 의지의 활동이며, 이것은 다름 아니라 ‘관점을 세우는 힘’으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해석 주체로 세워가는 인간,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적/초월적 진리에의 믿음과 그 파멸로 인한 절망이라는 양극을 무효화시키는 인간, 그가 곧 초인이다. 초인은 가치들의 가치를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세워나가는 해석적 주체이다.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뱀 대가리를 수없이 물어뜯어 내뱉는 고난의 밤들을 버티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리라’(lyra)를 얻는 자, 그가 곧 초인이다. 마침내 영원회귀를 기쁘게 긍정하게 된 인간, 삶을 기쁘게 긍정하게 된 인간. 이미 ‘인간’ 그 자체를 넘어서 가는 초-인!


니체를 더 알고 싶다면

니체의 전집으로는 지오르지오 콜리(Giorgio Colli)와 마치노 몬티나리(Mazzino Montinari)가 편집한 독일어판 니체 신판전집을 보는 것이 좋다. 한글본으로는 <니체 전집>(책세상)과 <니체 전집>(청하)이 나와 있다. 니체에 대한 꼼꼼하고 상세한 독해로는 하이데거의 <니체>(박찬국 옮김/길)가 있다.

하이데거의 연구서는 문헌학적으로 훌륭한 것이지만 니체를 보는 시각 자체는 일면적이다. 니체를 근대 철학의 완성자로 보면서 그를 넘어서고자 하는 저작이다. 니체를 파시즘의 선구자로 보는 해석과 관련해 여러 논쟁들을 낳기도 했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민음사)은 하이데거와 정확히 대조를 이루는 저작이다.

20세기 후반에 ‘니체 르네상스’를 몰고 온 이 책에서 들뢰즈는 니체를 현대 철학의 초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들뢰즈의 이 저작을 분기점으로 현대 니체 연구가 봇물을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클로소프스키의 <니체와 악순환>(조성천 옮김/그린비)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고병권의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책세상)은 니체의 철학 전체를 잘 해설해 주고 있다. 이정우의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한길사)은 서구 존재론사에서의 신족(플라톤주의)과 거인족(반플라톤주의)의 투쟁을 다루고 있으며 니체를 거인족의 선구자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