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삶의 고뇌를 넘어 ‘참자아’를 찾아가다
- 니시다 기타로 (1870~1945)
일본의 사상·철학은 신도(神道), 불교, 유교의 전통을 가꾸어 왔으나, 메이지 후기에 이르면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이들에게 서양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역설한 것처럼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곳이기도 했으나, 또한 쇼와 전기의 사상가들에게서 흔히 확인할 수 있듯이 극복해야 할 적이기도 했다. 전자만을 따라간다면 일본은 언제까지나 서양의 학생일 수밖에 없고, 후자만을 따라간다면 편협한 국수주의를 면치 못할 것이다. 메이지 초기(1873년)에 모리 아리노리, 니시무라 시게키,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 등등 당대의 일급 학자들이 모여 만든 메이로쿠샤(明六社)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도 이런 문제였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는 유럽을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동양’을 고집하는 것도 아닌, 유럽과 동북아 전통을 대등하게 놓고서 그 종합 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에도 후기 이래, 본격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인들이 염원하는 ‘우리의 철학자’를 이룩한 인물이 니시다 기타로이다. 교토의 명물인 ‘철학의 길’은 바로 니시다가 산책하던 길로서, 그의 사유에 꼭 어울리는 아름다운 길이다.
일본 철학자들이 서양 철학의 견습생으로 그치지 않고서 자신들의 철학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암흑기인 쇼와 전기(1925~1945)이다. 특히 니시다 기타로, 와쓰지 데쓰로, 미키 기요시, 구키 슈조는 이른바 ‘교토 사철(四哲)’로 불리는 거장들이다. 교토 큰 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면 이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 철학자들은 각자의 전공에 상관없이 이들의 사유를 연구하거나 최소한 언급하곤 한다. 요컨대 니시다 기타로와 교토 사철는 현대 일본 철학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니시다 철학의 주제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참조해 말한다면 ‘고뇌를 넘어 환희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니시다는 “철학의 동기는 비애의식(悲哀意識)이다”라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의 ‘동기’에는 독창적인 착상, 논리적-개념적 연역, 거시적인 종합, 사회의 변혁, 종교·윤리의 창건 등 여러 가지가 있겠거니와 니시다의 경우 삶의 비애야말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 동기였고 이 점에서 그 심층에서 불교라든가 실존주의 철학 등과 통한다. 니시다는 그의 삶에서 많은 죽음들을 목격했다. 여린 소년 시절에 각별히 사랑하던 누나의 죽음을 경험했고, 후에는 그의 삶의 대들보였던 어머니의 죽음은 물론 세 명의 자녀들(장남과 차녀, 오녀)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으니(여기에 처와 사녀는 밤낮 침상에 누워 지내는 병자였다), 이런 사람이 비애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겠다. 게다가 니시다는 사회생활에서도 기구해서 갖가지 부조리와 차별, 냉대,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인생 후기의 교토대학 교수 시절은 그나마 비교적 평온했지만, 그의 삶은 고뇌와 비애의 연속이었다. 니시다는 자신의 생에 찾아온 이런 시련들을 철학으로 극복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니시다 철학’이 탄생했다. 니시다는 고뇌에 찬 삶을 살았지만, 항상 그를 나락으로부터 구해준 것은 스승, 친구, 제자 등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는 니시다의 인격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니시다의 철학은 첫 번째 주저인 <선(善)의 연구>에서 전개된 ‘순수 경험’에서 출발한다. 순수 경험이란 “조금도 사려분별을 섞지 않은 참된 경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이 때문에 서구 철학자들은 니시다를 현상학의 범주에 넣어서 이해하기도 한다. 두 번째 주저라 할 <자각에 있어서의 직관과 반성>에서는 그의 일생의 테마인 ‘자각’의 문제가 전면에 드러난다. 니시다 철학의 기본 주제는 그의 삶 그대로 ‘고뇌를 넘어 환희로’이다. 어떻게 삶에 엄습해 들어오는 각종의 고뇌를 털어내고 환한 빛의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여기에 니시다 사유의 기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제3의 주저로 일컬어지는 <작용하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에서는 그 유명한 ‘장소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그의 자각론이 지나치게 유심론적으로 주관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여기에서의 장소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진정한 자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만이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 자체에 대한 자각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때의 자각이야말로 ‘절대무의 자각’인 것이다. 이 ‘절대무의 자각’에 이르러 니시다 사유는 최고조에 달한다.
삶의 고뇌를 넘어서 참자아를 찾아가려는 니시다의 사유는 일정 정도 헤겔의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의식은 그 순수성·무매개성(‘직관’)에서가 아니라 반성을 매개해 자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이는 곧 순수 경험이 반성을 통해서 분열·전개해 감으로써 개체적·직관적 경험이 보편적·논리적 경험으로 확장됨을 뜻한다. 그러나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의 논리를 구사하는 니시다에게서 결국 경험은 자아 안에서의 사건으로 머무른다. 자각이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비추는 것(自己の中に自己を映す)”, 자기가 자기에 있어서 자기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각 개념의 이런 의식철학·주의(主意)주의 등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서 장소론이 등장한 것이다. 니시다의 장소 개념은 주관 쪽에 치우쳤던 그의 사유를 주관과 객관, 자아와 비아가 그 안에서 관계 맺게 되는 터에 대한 사유에로 이끌었다. 이는 자각이라고 하는 의식의 점에서 사물을 보는 입장에서 그것을 감싸안는 장소의 면에서 보려는 입장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니시다는 물리적 공간이나 역장(力場:힘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 등을 ‘유의 장소’라 부르고, 그에 대비적으로 훨씬 추상적 수준에서 의식과 그 대상이 관계 맺는 장소를 ‘무의 장소’라 부름으로써 구분한다. 이는 사르트르에게서의 유로서의 즉자와 무로서의 대자의 구분과 통하는 사유이거니와, 니시다는 이 무의 장소를 ‘의식역(域)’ ― ‘의식의 뜰’ ― 으로서 제시함으로써 사르트르의 이원론에 비해 보다 유심론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물론 니시다는 무의 장소를 다시 ‘대립적 무의 장소’와 ‘절대무의 장소’로 구분한다. 대상과 주체가 여전히 대립해 있는 ‘대립적 무의 장소’와 달리 ‘절대무의 장소’는 대상과 의식의 대립을 해소하는 가장 포괄적인 장소로서, 그 자체는 절대적 무가 됨으로써(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유를 담는 일반자(‘일반자의 일반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일반자는 ‘의식의 뜰’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가능한 장소이며, 이 점에서 차라리 의식의 타자가 존재했던 ‘대립적 무의 장소’보다 더욱더 유심론적인 장소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절대 무의 장소에서 의식 자체도 무로 화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선불교적인 뉘앙스에서 절대 무를 자각한 ‘참 자기’인 것이다. 이 점에서 니시다 사유의 몇 차례 변모에도 불구하고 ‘순수 경험’, ‘직접 경험’의 추구라는 그의 기본 정향은 일관되게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그의 사유가 타자가 아니라 주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사유는 주체의 빛을 추구하는 사유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사유의 한계가 노정된다. 니시다 철학은 주체·자아의 빛을 추구하는 사유였기에, 타자로 향하는 시선보다는 자아로 향하는 시선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윤리적 한계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니시다 사유의 이런 한계는 구체적으로는 ‘대동아 공영권’이 운운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던 당대 상황에 대한 니시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니시다는 일본사의 암흑기라 할 쇼와 전기에 활동한 인물이다.(그는 정확히 1945년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가 과연 대표 지식인으로서 이 시대에 감연히 맞섰는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는 태평양전쟁에 적극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시대가 지운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해야 하며,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 당대의 타자들보다는 일본중심주의에 머물렀다. 이는 하이데거나 박종홍의 경우가 그렇듯이 단지 그의 인간적 실수가 아니라 그의 사유 자체 내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고 해야 한다. 빛을 어디까지나 주체·자아에 두는 그의 사유에서는 ‘타자의 사유’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니시다의 철학은 첫 번째 주저인 <선(善)의 연구>에서 전개된 ‘순수 경험’에서 출발한다. 순수 경험이란 “조금도 사려분별을 섞지 않은 참된 경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이 때문에 서구 철학자들은 니시다를 현상학의 범주에 넣어서 이해하기도 한다. 두 번째 주저라 할 <자각에 있어서의 직관과 반성>에서는 그의 일생의 테마인 ‘자각’의 문제가 전면에 드러난다. 니시다 철학의 기본 주제는 그의 삶 그대로 ‘고뇌를 넘어 환희로’이다. 어떻게 삶에 엄습해 들어오는 각종의 고뇌를 털어내고 환한 빛의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여기에 니시다 사유의 기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제3의 주저로 일컬어지는 <작용하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에서는 그 유명한 ‘장소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그의 자각론이 지나치게 유심론적으로 주관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여기에서의 장소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진정한 자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만이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 자체에 대한 자각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때의 자각이야말로 ‘절대무의 자각’인 것이다. 이 ‘절대무의 자각’에 이르러 니시다 사유는 최고조에 달한다.
삶의 고뇌를 넘어서 참자아를 찾아가려는 니시다의 사유는 일정 정도 헤겔의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의식은 그 순수성·무매개성(‘직관’)에서가 아니라 반성을 매개해 자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이는 곧 순수 경험이 반성을 통해서 분열·전개해 감으로써 개체적·직관적 경험이 보편적·논리적 경험으로 확장됨을 뜻한다. 그러나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의 논리를 구사하는 니시다에게서 결국 경험은 자아 안에서의 사건으로 머무른다. 자각이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비추는 것(自己の中に自己を映す)”, 자기가 자기에 있어서 자기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각 개념의 이런 의식철학·주의(主意)주의 등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서 장소론이 등장한 것이다. 니시다의 장소 개념은 주관 쪽에 치우쳤던 그의 사유를 주관과 객관, 자아와 비아가 그 안에서 관계 맺게 되는 터에 대한 사유에로 이끌었다. 이는 자각이라고 하는 의식의 점에서 사물을 보는 입장에서 그것을 감싸안는 장소의 면에서 보려는 입장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니시다는 물리적 공간이나 역장(力場:힘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 등을 ‘유의 장소’라 부르고, 그에 대비적으로 훨씬 추상적 수준에서 의식과 그 대상이 관계 맺는 장소를 ‘무의 장소’라 부름으로써 구분한다. 이는 사르트르에게서의 유로서의 즉자와 무로서의 대자의 구분과 통하는 사유이거니와, 니시다는 이 무의 장소를 ‘의식역(域)’ ― ‘의식의 뜰’ ― 으로서 제시함으로써 사르트르의 이원론에 비해 보다 유심론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물론 니시다는 무의 장소를 다시 ‘대립적 무의 장소’와 ‘절대무의 장소’로 구분한다. 대상과 주체가 여전히 대립해 있는 ‘대립적 무의 장소’와 달리 ‘절대무의 장소’는 대상과 의식의 대립을 해소하는 가장 포괄적인 장소로서, 그 자체는 절대적 무가 됨으로써(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유를 담는 일반자(‘일반자의 일반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일반자는 ‘의식의 뜰’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가능한 장소이며, 이 점에서 차라리 의식의 타자가 존재했던 ‘대립적 무의 장소’보다 더욱더 유심론적인 장소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절대 무의 장소에서 의식 자체도 무로 화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선불교적인 뉘앙스에서 절대 무를 자각한 ‘참 자기’인 것이다. 이 점에서 니시다 사유의 몇 차례 변모에도 불구하고 ‘순수 경험’, ‘직접 경험’의 추구라는 그의 기본 정향은 일관되게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그의 사유가 타자가 아니라 주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사유는 주체의 빛을 추구하는 사유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사유의 한계가 노정된다. 니시다 철학은 주체·자아의 빛을 추구하는 사유였기에, 타자로 향하는 시선보다는 자아로 향하는 시선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윤리적 한계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니시다 사유의 이런 한계는 구체적으로는 ‘대동아 공영권’이 운운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던 당대 상황에 대한 니시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니시다는 일본사의 암흑기라 할 쇼와 전기에 활동한 인물이다.(그는 정확히 1945년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가 과연 대표 지식인으로서 이 시대에 감연히 맞섰는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는 태평양전쟁에 적극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시대가 지운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해야 하며,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 당대의 타자들보다는 일본중심주의에 머물렀다. 이는 하이데거나 박종홍의 경우가 그렇듯이 단지 그의 인간적 실수가 아니라 그의 사유 자체 내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고 해야 한다. 빛을 어디까지나 주체·자아에 두는 그의 사유에서는 ‘타자의 사유’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니시다 기타로를 더 알고 싶다면
니시다 기타로의 저작들 중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는 <선의 연구>(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1)가 유일하다. 니시다 철학에 입문하는 데에는 고사카 구니쓰구, <절대무의 견성철학 :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심적 옮김, 장경각, 2003)이 큰 도움을 준다. (일본 학자들의 이름이 한자로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각각의 이름을 밝혀주면 좋을 것 같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로는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문학과지성사, 2000)이 있다. 유아사 야스오(湯淺泰雄)의 <신체>(김영희 옮김, 박영사, 1991)에는 니시다 기타로의 신체론을 다룬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니시다 기타로의 저작들 중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는 <선의 연구>(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1)가 유일하다. 니시다 철학에 입문하는 데에는 고사카 구니쓰구, <절대무의 견성철학 :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심적 옮김, 장경각, 2003)이 큰 도움을 준다. (일본 학자들의 이름이 한자로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각각의 이름을 밝혀주면 좋을 것 같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로는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문학과지성사, 2000)이 있다. 유아사 야스오(湯淺泰雄)의 <신체>(김영희 옮김, 박영사, 1991)에는 니시다 기타로의 신체론을 다룬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본대로 느낀대로 세상을 포착하라 - 메를로 퐁티 (1908 ~ 1961) (0) | 2012.02.12 |
---|---|
놀아라, 그것이 문화가 될지니- 요한 호이징가 (1872 ~ 1945) (0) | 2012.02.12 |
“인문과학은 여전히 가능하다”- 가뉴팽 (1923 ~ 2006) (0) | 2012.01.14 |
‘의미’란 불리고 쓰일 때 완성된다- ㆍ비트겐슈타인 (1889 ~ 1951) (0) | 2012.01.14 |
과학은 ‘지식의 축적물’이란 생각을 뒤집다-ㆍ쿤 (1922 ~ 1996) (0) | 2012.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