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놀아라, 그것이 문화가 될지니- 요한 호이징가 (1872 ~ 1945)

소한마리-화절령- 2012. 2. 12. 03:12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놀아라, 그것이 문화가 될지니

임상훈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ㆍ요한 호이징가 (1872 ~ 1945)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요의 일부분들이다. 하지만 이 세 곡을 같은 자리에서 듣는 기회는 드물지 않을까? 첫 번째 노래는 1970년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것으로 발표된 ‘새마을 운동’, 두 번째 노래는 당시 권력과 최극단에 서있던 한 저항시인의 시에 1980년대에 곡을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다. 각각 근대화, 민주화라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시대적 소명이 처절하게 묻어있는 ‘진지한’ 곡들이다. 필자와 비슷한 세대라면 1960, 70년대 유년시절을 겪으면서 단체소풍 가서 ‘새마을 운동’류의 ‘건전가요’ 한 곡 정도는 불러줘야 똘똘한 어린이였고, 1970, 80년대 대학시절을 겪으면서 술자리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민중가요’ 한 곡 정도는 부를 수 있어야 고민하는 청춘으로 통했다.

하지만 세 번째 곡은 왠지 우리 정서상 진지하게 부르기에 민망한 감이 있다. 구전되어 오던 것을 1950년대에 개사해서 곡을 붙인 것으로 알려진 이 곡은 실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퇴폐가요’로 낙인 찍혀 금지당해야 했다. 이렇게 같은 가요지만 신성한 노동을 찬양하는 ‘건전가요’나 시대적 고민을 토해내는 ‘민중가요’와 달리 ‘놀자판’ 딱지가 붙은 ‘퇴폐가요’들이 전하는 말은 한마디로 “일하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놀아보자”는 얘기다. 어느 세대에서도 환영 받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였다. 그런데 이 곡이 21세기 들어 한 젊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영화삽입곡으로까지 쓰였다. 금지곡은커녕 기성세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젊어서 노세, 멋진 미래 위해!”라고 감칠맛 나게 불러내는 이 가수의 선동은 20대에겐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이 무슨 일인가! 늙어지면 못 노니 미래를 위해 젊어서 놀자니!

삶의 진지함을 조롱하는 듯한 이 놀이의 선동. 40, 50대가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고의 변화는 어찌 보면 60, 70대가 40, 50대를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대립, 국가의 영광이냐 개인의 인권이냐의 대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다. 요컨대 과거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진지함에 대한 놀이의 반란이다. 근자에 보이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당황하게 만든 새로운 잠재적 정치세력의 출현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20대의 눈에는 기성세대의 근엄함 뒤에 있는 경직과 위선은 한낱 조롱거리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한국사회의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에 이은 새로운 ‘문화 세대’의 아이콘, ‘놀이’이다. 과거에 노는 것은 퇴폐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관념에서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천진난만한 사고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놀던’ 아이들이 ‘범생이’들의 부러움 속에 시장의 한복판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10대의 우상과 장래희망은 이미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아닌 가수, 배우, 운동선수이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놀이가 21세기를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되었다면, 문화의 한 중심에, 더 구체적으로 산업의 한 중심에 서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학자가 이러한 예측을 했던가? 여기서 우리는 20세기 초, 특히 당시로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낯선 분야에 선구자적 저작을 남겼던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 요한 호이징가를 언급하려 한다.

요한 호이징가는 19세기 말 네덜란드의 흐로닝언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일곱 살 무렵 흐로닝언에 들어온 카니발 행렬을 보면서 그 광경에 매료되어 평생을 의례, 축제, 놀이 연구에 빠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첫 대표작은 중세가 저물어 가면서 근대의 여명이 시작되는 14~15세기 유럽사회의 모습을 수려한 문체로 그려낸 <중세의 가을>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한 사회가 그 수명이 다해갈 때, 바닥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오는 새 기운의 확산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표면에서는 애처로울 만큼이나 진부한 과거의 담론이 화려한 색깔로 덧칠된다는 것이다.

1919년 발표되어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 이후 1938년 내놓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호모 루덴스>이다. 우리말로 ‘유희의 인간’이라는 의미의 이 신조어는 그를 일약 세기적 문화이론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문화 속에 나타나는 유희의 기능에 주목하면서 고대 이후 어떠한 사회를 막론하고 문화의 동력은 바로 이러한 유희의 정신이 구체화되는 놀이와 그 다양한 양태에 있다고 단언한다. ‘놀이’의 반대편에는 ‘진지함’이 있다. 진지함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생산 활동인 ‘노동’과 관계가 있으며, 호이징가에 따르면 이러한 진지한 노동이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적 발상을 가로막고 진부한 패턴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이를 할 때, 더욱 창조적이고 생산적이 되며 이것이 문화를 만들어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와 ‘노동’의 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하는 것은 미덕이고 놀고 쉬는 것은 악덕이라는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노동은 신성하고, 인간은 일을 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윤리적 가치판단이 일반화되어 있다. 실제로 인간은 노동의 대가로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노동과 반대되는 놀이 또는 여가는 생산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이징가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한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을까?

호이징가의 이론을 좀 더 다른 차원의 모델로 이해해보자. 노동에는 두 측면이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일을 할 때, 일 자체의 메커니즘이 있고 그 목적으로서의 대상이 있다. (mechanism-telos) 예를 들면 장인이 호미를 만드는 것은 밭을 갈기 위한 것이며, 목수가 집을 짓는 것은 안락한 삶의 공간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호미 제작-밭 경작’ 또는 ‘건축-주거공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노동의 두 면을 구성한다. 그런데 우리는 암암리에 서로 대등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두 측면 중에서 목적 중심적 노동관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노동의 결과만을 중시하며 노동 자체는 등한시되고 심지어는 멸시되는 환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호이징가의 진단에 의하면 이것이 심화되는 것이 바로 19세기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퍼진 산업화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소외계층으로 전락을 했으며, 왜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비효율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노동이 성스럽다’는 프로파간다는 반향 없는 외침일 뿐, 의미가 없다. 목적을 잊고 (또는 경감하고) 노동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노동관의 전환 없이는 노동 자체의 의미와 재미보다는 그 결과의 효용성과 가치만이 중요시되며 따라서 어떠한 임무도 그 자체에서 나오는 성취감보다는 타당성, 유용성의 잣대에서만이 판단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는 상실되고 수단으로서 발생하는 가치만이 유효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그 행위자 역시 노동의 주체로서의 자격과 역할은 박탈되고 효율성을 위한, 사회의 목적을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호이징가의 놀이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놀이는 결코 노동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놀이란 다른 목적을 두고 하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 자체가 목적인 노동이다. 즉, 노동의 ‘동력(mechanism)-목적(telos)’ 두 면에서 목적을 잠시 배제한 동력중심의 노동관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관은 목적 중심적, 목적 편향적 노동관으로부터 다시 균형을 잡아주는 내적 원동력이다. 노동을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면서 그 자체에 공정한 규칙과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는 게임을 하듯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공부가 일종의 노동이라면 마찬가지 원리로 설명되지 않을까? 공부의 결과를 성적으로, 석차로, 등급으로, 진학할 상급학교로만 환원하지 말고 그 자체에 규칙과 의미를 부여하는 게임처럼 생각하면, 공부의 ‘진지함’을 경감시키면 훨씬 학생들의 성취감도 높아질 것이다. 노동을 컴퓨터 게임처럼 평등한 규칙과 수준별 레벨, 그리고 원한다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해주면 노동 앞에 밤새워 붙어 앉아있는 노동 중독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호이징가에 따르면 규칙의 불균형 안에서 우리는 게임에 몰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칙과 비협조만이 따를 뿐이다. 또한 참여자 사이에 수준별 레벨이 맞지 않고 비대칭이 뚜렷하다면 우리는 게임에 참여할 의지를 상실할 뿐이며 이것은 결코 노동의 수단을 위해서도, 목적을 위해서도 원하는 결과가 아닐 것이다.

행위가 가져오는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답다.

호이징가를 더 알고 싶다면

요한 호이징가의 두 대작 <중세의 가을>(이희승맑시아 옮김, 동서문화사)과 <호모 루덴스>(이종인 옮김, 연암서가)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 두 권 모두 역사적 가치가 있음에도 문체가 난이하지 않고 읽기 수월하다. 인간 문화에서 놀이의 역할을 좀 더 보고 싶다면 로제 카아와의 <놀이와 인간>(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도 읽어 볼만 하다. 호이징가의 이론을 좀 더 체계화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