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문과학은 여전히 가능하다”- 가뉴팽 (1923 ~ 2006)

소한마리-화절령- 2012. 1. 14. 19:14

“인문과학은 여전히 가능하다”

임상훈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  
ㆍ가뉴팽 (1923 ~ 2006)

20세기는 인문과학의 탄생기이면서 전성기인 동시에 노쇠기이기도 했다. 늦둥이로 태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기대주였는데 너무 일찍 조로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불과 한 세기 만에!

프랑스 인문과학자 장 가뉴팽의 한 제자가 최근 자신의 책에서 20세기의 인문과학을 평한 것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다소 도발적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가뉴팽의 사상을 이해하고 나면.

그렇다면 이제 인문과학은 불가능해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어찌 보면 가뉴팽이 그가 바친 평생의 학문여정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오히려 “인문과학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 평범하다 못해 싱겁기까지 한 이 명제에서 가뉴팽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이 답을 위해서는 인문과학의 정의에 관한 질문부터 던져야 할 것이다. 인문과학이 무엇이기에 20세기에 만들어져 세계를 뒤덮을 기세를 올리며 성장했다가 금방 쇠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활이 가능한 것일까?

하나의 독립된 학문 체계로서 과학의 시작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과학이 점차로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시기로 천문학과 물리학의 탄생과 함께한다. 물론 이 시기 전에도 천체와 사물의 원리는 늘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의 과학자들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사물을 보는 방법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바로 가설과 검증 사이의 끝없는 대화가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철학자들의 ‘~주의’나 ‘도그마’는 더 이상 과학에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된다. (과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경향신문 2011년 12월24일자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 토마스 쿤’ 참조) 플라톤주의자나 니체주의자는 있어도 뉴턴주의자나 아인슈타인주의자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무엇에 대한 과학이라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즉 대상이 아닌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학을 이전에 있었던 자연철학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인문과학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답은 이미 나온 것이다. 인간의 제반 문화를 학문의 “대상으로서 다룬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것은 이미 소피스트들 이후로 계속 해 왔다) 인간을 학문 대상으로서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한다. 인문과학은 인간의 제반 문화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으로, ‘인문’은 대상이고 ‘과학’은 방법론인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흔히 문학, 사학, 철학(속칭 ‘문사철’)을 아우르는 개념인 ‘인문학’은 영어로 ‘Humanities’라고 부른다. 이는 바로 인간적인 것들(문화)을 다룬다는 말로 소피스트 전통 이후 전개되었던 고대 그리스의 인본주의 사상을 다시 부활시킨다는 의미다. ‘인문학’은 르네상스(재탄생) 이후의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에 깐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을 학문의 대상으로 과학적으로 다루는 ‘인문과학’과는 엄밀하게 구별돼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문과학’의 최초의 시도는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실증주의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 단계를 거쳐 발전해 나간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탐구도 같은 여정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증적, 즉 과학적인 접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문과학이 바로 사회학이다.

콩트의 사회학이 물론 현대 사회학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왜 사회학일까? 바로 인간의 모습이 실증적으로 관찰되려면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실체로서의 ‘문학’은 없으며 실증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한국문학’이거나 ‘영문학’, 또는 ‘현대문학’이거나 ‘중세문학’일 뿐이다. 더 넓게 말해서 ‘언어’라는 것은 없고 실증적으로 있는 것은 ‘한국어’, ‘영어’, ‘불어’ 등이다. 즉 인문과학의 조건은 바로 실증적, 다른 말로 역사적 맥락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된다. 20세기 초반은 이처럼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인문과학이 탄생해 각 분야의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기다.

그럼 새로운 인문과학의 이러한 착상은 그 후 탄생할 제반 인문과학의 시대를 위한 축복이었을까? 오히려 재앙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소쉬르는 언어학의 대상을 추상적 의미의 언어(랑가주)가 아니라 실증적 의미의 언어(랑그)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랑가주와 같은 “다양하고, 잡다하며” “여러 영역에 걸쳐있는” 혼재된 것들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랑그처럼 “특정한 일부분”이면서 “랑가주의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개개인이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집단이 채택한 필요한 약정의 총체”여야 학문(언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발하고 독창적인 다른 많은 발견들에도 불구하고 ‘랑그’가 언어학의 대상이 된다는 지극히 실증주의적인 발상 때문에 20세기 상당수의 언어학자들이 “언어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는 명제를 아무 거리낌 없이 남발하게 만들어 버렸다. 언어란 인식 대상들에 대한 관념화의 수단이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라캉(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나 푸코(모든 학문 체계는 특정 사회적 맥락에서 가능) 등에게까지 이러한 실증주의의 잔재들이 남게 된다.

그 결과 모든 인문과학은 사회학으로 집결되고 개별 학문 간의 변별성과 고유성이 모호한 상황에서 급기야는 인문과학이 통섭이라는 이름 하에 생물학, 물리학 등의 자연과학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철학을 밀어내고 인문학 패러다임의 터줏대감 자리를 차지하던 인문과학이 인문학 위기의 주범으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지경에 몰린 것이다.

가뉴팽은 바로 이 점을 일관되게 지적했던 인물이다. 그럼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모든 인문과학들이 각자의 고유 영역과 일관성을 보장받으려면 우선 이들을 옭아매는 학제적 구조(disciplinary system)부터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이미 대학의 학과 단위는 학문적(scientific) 단위가 아닌 결사적(incorporated) 단위, 또는 실용적(pragmatic) 단위로 편재 또는 재편되고 있다. 대학의 실증주의화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학문의 부활, 인문학의 위기 타개를 위해서는 대학의 학과 단위를 현재와 같이 실증적으로 주어진 구체적 대상들 중심의 학제편성이 아니라 내적 일관성에 따라 주어진 고유한 대상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들로의 재편이 필요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근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문학의 부활을 위한 제도 개선은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문과학의 활동 또한 교조주의적인 주장으로만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가뉴팽은 그의 거의 모든 커리어를 이론가이면서 임상실험가로 활동했다. 현재로서 인문과학의 과학적 조건은 바로 임상실험이라는 프로이트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말한 ‘깨진 수정체’(broken crystal)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수정체는 아무렇게나 깨지지 않고 결을 따라 깨진다. 하지만 깨지기 전에 우리는 수정체의 결을 볼 수가 없다. 깨진 후에 그 모양과 방향을 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수정체의 결과 구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깨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임상실험은 학자들로 하여금 공허한 주장을 금하게 하고 과학적 가설에 대한 검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렇게 자연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문화현상들을 각각의 고유한 이론적 틀로 설명하고 다시 임상학적 검증을 통해 수정 또는 확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과학’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가뉴팽은 구조주의의 자양분을 받았으되 그 한계를 지적하고 구조주의자들이 소홀히 했던 구조의 내부를 들여 봤다는 점에서 후기구조주의자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후기구조주의에서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던 구조(상징계) 이전의 세계(상상계)와 구조 이후의 세계(실재계) 사이의 연관 관계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모델로 풀어냈다는 점에서는 후기구조주의까지 넘어선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과학 모델에서 무엇보다 큰 장점은 하나의 일관된 이론적 틀로 임상검증 과정을 통해 전 인문과학을 포괄하는 종합이론 체계(매개이론, Theory of the Mediation)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가뉴팽을 더 알고 싶다면
2006년에 펜을 내려놓고 영면에 들어간 장 가뉴팽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 불어, 독일어, 영어 등 서양 언어로는 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불행히도 아직 한국에는 출판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인문학 연구 기관인 대안연구공동체의 한 분과에서 가뉴팽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그 저서의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연구에 참여할 문은 열려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소쉬르 언어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언어학 강의>(최승언 옮김, 민음사)를 읽는 것이 좋다. 또 현대 과학철학의 줄기를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책으로 앨런 차머스의 <현대의 과학철학>(신인철·신중섭 옮김, 서광사)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