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절망 빠진 김씨를 구한 건 쪽방촌 ‘사랑방’이었다

소한마리-화절령- 2012. 8. 31. 09:54

절망 빠진 김씨를 구한 건 쪽방촌 ‘사랑방’이었다

등록 : 2012.08.30 21:05 수정 : 2012.08.30 21:45

 

30일 오후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위치한 ‘동자동 사랑방’에서 쪽방촌 공동체를 만든 엄병천 대표(왼쪽)가 인근 주민 강동근(58)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애진 기자 jiny@hani.co.kr

[절망살인]의 시대
우리 안의 은둔자들 ③

절망형 은둔자는 사회경제적 빈궁에 처한 사람들이다. 서울 여의도 칼부림 사건 피의자 김아무개(30)씨는 4000만원의 빚을 진 신용불량자였다. 의정부 칼부림 사건 피의자 유아무개(39)씨도 일용직 노동자였다.

절망형 은둔자는 쪽방, 지하방, 고시원 등에서 혼자 산다. 이들의 거주공간 자체가 은둔·고립의 처지를 상징한다. 연립주택 지하방과 고시원에 사는 이들은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접촉 없이 혼자 지낸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쪽방촌도 거주자의 93%가 1인가구다.

결국 절망형 은둔자들이 벌이는 ‘절망 범죄’를 막는 근본 대책은 이들을 세상으로 불러내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행정학)는 “사회적 좌절과 분노를 품은 절망형 은둔자라 해도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주고, 지지해주면 얼마든지 그 처지를 이겨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사업실패로 노숙생활뒤 쪽방에
사랑방 활동하며 절망 벗어나

분노 품은 절망형 은둔자라도
누군가 도와주면 이겨낼 수 있어

지역공동체·직업교육 등 절실

절망자를 구하는 공동체
연이은 사업 실패로 1998년부터 노숙생활을 한 김아무개(55)씨는 2004년부터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살았다. 노숙 시절, 김씨는 술병을 깨 4번이나 손목을 그었다. 길을 걷다 어깨가 부딪친 사람을 죽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회가 미웠고, 누군가 이유 없이 죽이고 싶었다”고 김씨는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는 요즘 ‘동자동 사랑방’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쪽방촌 이웃 가운데 아픈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반찬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다. 김씨는 쪽방촌 이웃들이 와서 함께 식사하는 ‘사랑방 식도락’을 새달 11일부터 열 계획이다.

1000여가구의 쪽방촌이 밀집한 동자동에 3평 남짓한 사랑방이 문을 연 것은 2008년 6월이었다. 엄병천 용산나눔의집 대표가 쪽방촌에 방을 마련해 이웃들에게 개방했다. 엄 대표는 자신의 방을 쉼터로 꾸몄고, 반찬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현재 사랑방에는 상근활동가 2명과 자원봉사자 30여명이 일한다. 함께 만든 반찬은 120여가구에 나눠주고 있다.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인 이웃들을 위해 임금 등 노동문제에 대한 전문적 상담도 제공한다. ‘사랑방 마을공제 협동조합’을 만들어 긴급생활자금을 2% 이내 금리로 대출해주기도 한다.

아래로부터의 해결과 한계
사회·경제적으로 빈궁한 처지에 몰린 절망형 은둔자들에게 동자동 사랑방 같은 지역공동체가 절실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절망형 은둔자를 사람들 사이로 끌어내고, 응축된 분노를 해소하는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절망형 은둔자들의 범죄를 사회적 낙오자의 이상행동으로 파악해서는 이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며 “구성원들이 직접 공동체를 구축해 ‘아래로부터의 해결책’을 도모하는 것이 효과가 높다”고 말했다.

실제로 동자동 쪽방촌 주민 강동근(58)씨는 “사랑방이 생기기 전에는 이웃들끼리 만나지도 않았는데, 이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동네 친구가 2명이나 생겼다”고 말했다. 그런 친구가 있는 한 강씨는 절망형 은둔자가 아니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경비원을 고용해 보안을 철저하게 한다고 ‘절망 범죄’로부터 안전해지는 게 아니다”라며 “공공의 공간을 만들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마을공동체가 절망 범죄를 예방하는 대안”이라고 밝혔다.

빈곤층 주거밀집지역에 새로운 형태의 지역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절망형 은둔자를 세상으로 불러내는 하나의 대안이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고시원 등에 혼자 거주하는 절망형 은둔자들에게는 동자동 사랑방과 같은 지역공동체의 영향이 미치지 못한다. 여의도 칼부림 사건 피의자 김씨와 의정부역 사건 피의자 유씨도 고시원에서 홀로 지냈다. 두 사람 모두 안정적인 일자리와 소득이 없는 처지를 비관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은둔을 벗어나게 할 사회복지와 직업교육
동자동 사랑방은 혼자 사는 약자들에게 △기본적 생계 해결을 돕고 △직업적 재활을 돕고 △긴급한 생활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구실을 정부가 떠맡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절망형 범죄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형사정책에 맞춰져 있지만, 이번 사건은 범죄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며 “복지국가의 전망 아래 사회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절망형 은둔자를 위한 ‘도움과 관심’을 제공하는 일은 결국 국가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왕의 각종 사회복지체계를 재정비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직업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보건복지부는 현재 전국적으로 자활센터 250여곳을 운영중이다. 연간 8만여명이 자활센터에서 제공하는 직업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자활센터 1년 예산 5333억원 가운데 자활급여를 위한 예산이 3969억원을 차지하고, 직업교육을 위한 예산은 1400억원에도 못 미친다. 정부의 취업알선 실적도 저조하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를 보면, 지난 11년 동안 고용센터에 구직 등록을 한 사람들 가운데 취업에 성공한 비율은 28.3%에 불과했다. 자활센터를 만들긴 했지만 안정적·지속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직업훈련체계 등의 안전망이 너무 미흡하다”며 “직업교육만 체계적으로 해도 절망형 은둔자들이 사회적 관계를 다시 복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