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입증하는 자료를 가지고 탈출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정국은 급속히 격랑에 휩쓸려 갔다. 정권의 존폐를 위협할 만한 메가톤급 사건으로 대학가와 노동, 재야, 종교계를 비롯한 전체 민주진영의 일대 궐기를 촉발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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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자료를 갖고 탈영, 기자회견을 하는 윤석양 이병 |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과 시위가 잇달았다. 조금만 세게 밀어붙이면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런 호재를 맞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일반의 기대와 예측에 어긋난 행보를 보인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야합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국회 안의 투쟁만으로는 효과적인 정권견제가 어려운 때라 장외투쟁으로 국면전환을 꾀하는 것이 필요한 때, 보안사 사건은 장외투쟁을 벌이기에 충분한 명분이 있고 그만큼 폭발력 높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는 장외투쟁 대신 보안사 해체와 내각제 개헌포기, 지방자치제 시행 등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도 단식과 같은 극단적인 투쟁을 하지 않던 김대중 총재의 행보는 명백하게 보안사 민간인 사찰로 벌어진 국면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국면에서 정권을 퇴진시킬 수도 없고, 설령 퇴진시킨다고 해도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과 재야를 비롯한 전체 민주역량의 소진을 초래하기보다는 노태우 정권의 퇴로를 열어주고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내자는 것이었다.
김대중 총재가 요구한 핵심사항은 지방자치제의 즉각 실시였다. 3당 야합의 고리였던 내각제 개헌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87년 직선제 개헌으로 곧 시행될 예정이던 지방자치제가 3당 야합으로 국회 내 절대다수를 차지한 민자당에 의해 또다시 연기된 것을 보안사 사건을 지렛대로 이용해 쟁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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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장 선거 후보자 초청토론회 (1995년 6월 23일) |
배병삼 교수의 2월 1일 자 경향신문 칼럼에는 춘추시대 정나라 재상 정자산(鄭子産)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그는 순시를 다녀오는 길에 사람들이 옷을 벗고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 자기 수레를 내어주어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공자는 그를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맹자는 ‘은혜로웠지만,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맹자는 ‘물 건너 주는 일은 온종일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리를 놓으면 수레가 없어도 누구나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자산은 ‘사람은 어질지 모르나 유능한 정치가는 아니다.’라는 것이 맹자의 평가이다.
같은 날 민주통합당은 1박2일간의 워크숍을 열고 혁신을 다짐하는 선언문을 내놓았다. 여기서 민주통합당은 국회의원의 영리목적 겸직 전면 금지, 헌정회 연로 회원 지원금의 조건 없는 폐지, 국회의원 세비 30% 삭감을 선언했다. 아울러 계파정치 청산과 민주적 리더십 강화, '당직은 당원에게, 공직은 국민에게' 원칙 준수, 뇌물수수ㆍ알선수재ㆍ알선수뢰ㆍ배임ㆍ횡령 등 5대 부패 및 각종 비리 연루인사의 공천ㆍ당직 제한, 대안제시형 정책정당화 및 생활밀착형 민생정당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역설했다.
다 맞는 것 같고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 말들이 나열되어 있다. 따로 선언할 것도 없이 민주적인 대중정당이라면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들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들이다.
세비 30% 삭감은 여전히 민주통합당과 이쪽 진영 사람들의 정치적 감각이 얼마나 안이하고 근시안인지 보여주는 낙제점이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와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 폐지 등 정치 초년생의 현실인식을 보여준 안철수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마추어 정치 선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자산에 대한 맹자의 평가에서 보듯이, 정치와 정치가의 영역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오늘의 민주당이다. 물론 민주당만 아니라 이즈음의 여야 각 당 정치인이고 정치행태이지만.
며칠 후면 퇴임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대 실정(失政)인 4대강 파괴가 막무가내로 진행된 데에는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로 타오른 민의의 힘을 바탕으로 민주당이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했다면 4대강이 저 모양이 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시민사회나 종교계가 4대강 사업을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단식과 시위를 할 때 민주당은 시위현장에 가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힘을 배경으로 국회 내에서 이를 저지하는 것이다. 김대중, 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였다면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의 공약사업인 점을 살펴서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으니 사업의 타당성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으로 일정을 최대한 늦추는 한편, 4대강을 동시에 전면적으로 파헤치기보다 한 군데 혹은 두 군데의 강을 먼저 실시한 다음 차례로 실시하자는 논리 등으로 친박 진영 등 여권 내부의 소극적인 세력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세우지 않았을까? 그렇게 국토의 젖줄인 4대강을 절반이라도 지켰을 것이다.
한미 FTA 비준 과정을 보아도 그렇다.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면 당 지도부가 거리의 농성장은 인사치레로 한 번쯤 찾아가고 주로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상대로 한 압박과 협상으로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대형마트 규제와 중소기업 보호, 또는 고용안정 관련 법안과 주고받는 데 주력했을 것이다.
직전 대통령 후보를 지낸 사람까지 용산참사 농성장과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것은 진정성은 보였을지언정, 정자산의 사례처럼 정치를 모르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노무현 이래 그 잘난 진정성 타령에 이 진영이 오늘 이 모양으로 전락했지만.
의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타당한 핑곗거리가 아니다. 과거에도 여당의 1/3이나 1/4밖에 안 되는 의석으로 자유당, 공화당 정권에 맞서 강력한 견제역할을 해 온 역사가 있다.
정치의 본령을 제대로 인식하여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시적으로 저지하고 정권의 독주를 저지한다면 세비 30% 따위를 삭감하는 게 무에 중요할까. 전액을 삭감한들 연간 300~400억에 지나지 않는다. 300조가 넘는 중앙정부 재정의 만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쇼를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선전에 약속한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부터 관철하는 것이 신뢰를 되찾는 지름길이다.
이미 받아놓은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라는 진성어음조차 현금으로 바꾸지 못하는 정치력으로 별로 쓸데없는 선언문을 백날 발표한들 무슨 소용일까.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를 사실상 낙마시키는 것으로 최소한의 존재감을 보여 준 민주당의 다음 행보가 고작 의미 없는 선언문이라는 데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안철수 류 정치 초보들의 비판도 수용하되 여기에 흔들릴 것만도 아니다. 시민운동은 시민사회에 맡기고 민주당은 ‘정치’를 해야 한다.
60년을 훌쩍 넘은 이 나라 정치의 본류로서 ‘대안제시형 정책정당화 및 생활밀착형 민생정당화’를 말로만 아닌 불퇴전의 전투력과 예술적인 협상력으로 실천하여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89년 12월 19일에 여ㆍ야 합의로 만들어진 지방자치법개정안이 90년 1월의 3당 합당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거대 집권여당이 된 민주자유당이 전면적 재검토를 선언한 것이다.
90년 12월 31일, 151회 정기국회에서 지방자치법 중 개정법률안, 지방의회의원 선거법 개정법률안,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법 등이 여ㆍ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1992년 노태우는 연두기자회견에서 단체장 선거의 연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단체장 선거 시행을 공약했었던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94년 3월 4일에 마침내 단체장선거를 포함한 이른바 4대 지방선거를 1995년 6월27일에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은 지방자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마침내 1995년 6월 27일에 역사적인 4대 지방선거가 시행되었다. 이로써 지방의회는 제2기의 출범을 기록했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1960년대 이후 30여 년 만의 부활이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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