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자들은 누군가를 향한 성적 이끌림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중 일부는 동성 또는 이성, 아니면 모든 성에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동성이든 이성이든 어떤 상대에게도 성적 이끌림 못 느껴
성욕 없으면 질병?…“태어나고 죽을 때는 모두 무성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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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性은 거대한 城이었다 그가 ‘성’을 두 사람의 관계에 들여놓으려 할 때마다 연우씨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많이 다퉜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공유하는데, 유독 자신만 상상하기 힘든 그 벽을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불안하고, 난 뭐가 다른 건지 고민스러웠죠.” 나중에 그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아냈다. “에이섹슈얼(무성애자)이요.” 지난 2월12일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심리학을 전공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차분하게 ‘커밍아웃’을 해왔다. 성적 욕망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감각마저 무딘 것은 아니다. 벚꽃빛으로 공들여 화장한 눈, 코발트빛으로 맞춘 가방과 스웨터는 그의 감각의 풍요로움을 짐작하게 했다. 연우씨는 매스미디어에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고백한 첫 한국인일지 모른다. 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은 그에겐 아주 소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 말을 알기 전엔 스스로 정리가 안 됐어요. 그 말을 접하는 순간부터 제 경험에 대해 체계적으로 생각해나가게 됐죠.” 무성애자는 일반적으로 ‘성적인 끌림을 지속적으로 느끼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경험은 개인마다 다르다. 어떤 무성애자들은 성을 혐오하고 낭만적 감정으로서의 사랑도 경험하지 않는다. 어떤 무성애자들은 낭만적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느끼지만 그 대상에 성적으로 매혹되진 않는다. 누군가는 물리적인 성욕을 갖지만 특정한 대상과의 성관계를 원치 않는다. 연우씨는 무성애자이지만 ‘흔한 연애 감정’은 경험한다. 남성과 여성을 두루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판로맨틱 에이섹슈얼’(Panromantic Asexual·범성애적 무성애자)이라고 규정한다. 연애와 섹스를 동일시하지 않을 뿐이다. “설레고, 생각나고, 같이 있고 싶고, 좀더 알고 싶고, 그런 감정들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느끼는 것”이 연애 감정이라면 말이다. 무성애자임을 자각한 뒤엔,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해졌다. “누군가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껴도, 그 사람이 ‘유성애자’인 걸 느끼면 결코 가까이할 수 없어요. 상대방이 유성애자인 경우 적당히 타협하는 에이섹슈얼들도 있는데, 전 그냥 포기해요.”
‘성적 트라우마’를 의심하던 친구들 인간은 누구나 확고한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무성애를 말하다>의 저자 앤서니 보개트의 설문조사(2004년) 결과를 보면, 영국인의 1.05%는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성적인 이끌림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국제 성의학계에서도 무성애는 동성애나 이성애처럼 하나의 섹슈얼리티 범주로 자리잡는 중이다. 물론 무성애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성적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은 주로 사회적 원인이 있을 거라 추측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라거나 성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거라는 추론이다. 무성애자들은 후천적 요인에 따라 성적 욕망을 잃은 경우는 무성애로 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연우씨는 무성애자이지만 ‘흔한 연애 감정’은 경험한다. 남성과 여성을 두루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범성애적 무성애자라고 규정한다. 연애와 섹스를 동일시하지 않을 뿐이다.
무성애가 선천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과학적 연구도 있다. 미국 양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숫양들의 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2년 동안 실험한 결과다. 연구자들은 숫양과 발정기의 암양 두 마리, 숫양 두 마리를 일정 시간 함께 있도록 한 뒤 숫양 584마리의 ‘성적 취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절반 수준인 56%의 숫양만이 암양과 교미했다. 양들 가운데 9%는 숫양에게 반응을 보였고 12%는 어떤 성적인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기에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이성을 대상으로 한 성욕이 자연계의 절대 법칙은 아님을 확인한 셈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무성애의 원인을 따지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견해도 있다. 오정민(32·가명)씨는 ‘사랑하는’ 무성애자다. 무성애자라는 그녀와의 인터뷰에서 정작 가장 많이 나눈 대화 주제는 연애였다. 정민씨는 “인터넷상 분류로 ‘바이로맨틱 에이섹슈얼’(Bisexual Romantic Asexual·양성애적 무성애자)”이라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을 사랑하는 양성애자인데 성적 매혹은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다. 여러 명의 남자, 여러 명의 여자와 사귀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아픈 연애로 끝났다. 2008년부터 2년여간 사귀었던 애인은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만난 여성이었다. “아주 많이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사랑하고도 이별을 예감한 것은 1년6개월이 지났을 무렵이다. 애인은 “몸을 밀착하고 있는 스킨십 자체에 엄청난 의미를 두는 친구”였다. 정민씨는 달랐다. “남의 침이 들어오는 걸 감수하고 키스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섹스는 물론이고요. 그런 비위생적인 걸 감수하고 일상적으로 그런 걸 하려면 대단한 필요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성적인 끌림이) 저한테 없는 게 확실해요. 대단히 필요하지 않거든요.” 로맨스 감정만으로 연애에 돌입하는, 불가해한 상태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섹스를 한다고 더 좋아진다거나 싫어진다거나 하지 않아요. 그냥 귀찮고 아프고 더럽고, 이게 다예요. 싫은데도 해야 하는 데이트 코스 같은 거죠.” ‘오늘은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 사람은 매일 성적인 관계를 원하고, 나는 싫어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좋아도 언제까지나 참을 수는 없잖아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면서도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참다 참다 한계가 오면 끝나는 느낌”의 연애는 또 그렇게 끝났다. ‘말하지 못한 나’는 부당한 죄인이 되어야 했다. 털어놓을 공간은 마땅치 않다. 사람들은 정민씨에게 말했다. “여자는 서른 넘어서 느낀다더라.” “부모님이 혼전 순결을 강요하니?” 성애 중심 사회에서 무성애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쉽게 무지의 폭력을 경험한다. 20대 후반까지 정민씨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참고’ 기다렸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스스로 정체성 탐색에 나섰다. 정민씨는 욕망의 부재에 대한 결핍감이 없다고 했다. 유성애자는 모르지만, 결핍은 ‘있다 없으니까’ 생긴다.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거나 하는 게 영화나 소설을 봐서 아는 거지, 나 혼자 살았으면 전혀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이렇게 누군가의 본능은 그녀에게 순전한 학습의 효과다. 이해받고 싶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을 때 연우씨는 친구들로부터 “성적 트라우마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반응을 돌려받고 허탈했다. 소수자 이슈에 꽤 관용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무성애에 대한 반응은 비슷했다. “세상에 무성애 같은 건 없어. 네가 아직 미성숙한 거야.” 연우씨는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성애가 결합된 사랑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성적 이끌림이 없는 사람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 교정하려는 건, 하나의 폭력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1980년대부터 ‘문제 상태’로 간주 무시는 때로 혐오보다 강력하다. 막연히 독신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세하(26·가명)씨는 인터넷에서 무성애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하고 ‘멘붕’이 왔다. 사람들이 성애를 말할 때 그는 늘 “담벼락 너머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남동생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무성애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그렇거든.” 남동생은 생각보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세하씨의 성정체성을 뒤바꾼 일대 사건이, 동생에겐 시답잖은 수다로 여겨진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동생이 그걸 완벽하게 잊어버린 거예요.” 어렵게 말해도 중요한 진실로 여겨지지 않는 벽이다.
정체성을 정치화하려는 욕망 성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통념에 대해 세하씨는 “왜 그렇게 생각해야 되죠?”라고 되물었다. 작가를 꿈꾸는 그는 남들이 연애할 시간에 글을 읽고 쓰면서 충분히 행복하다. 무의미한 섹스보다 한 조각의 케이크가 낫다는 의미로 케이크 위에 깃발을 꽂은 무성애자 상징물이 있다. 비유컨대, 세하씨에겐 케이크 위에 펜을 꽂은 달콤한 인생이 있다. 국내에서도 ‘에이섹슈얼 운동’을 고민하는 움직임이 있다. 퀴어 모임 ‘완전변태’의 한 회원은 몇 해 전에 퀴어퍼레이드에서 자보를 붙이고 에이섹슈얼인 누군가를 찾아보려 시도했다. 20대 중반의 바이섹슈얼 여성인 그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서면으로 설명했다. “정체화는 교류를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자긍심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무성애는 나의 단순한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함께 활동하는 퀴어 모임 회원들에게 에이섹슈얼임을 커밍아웃하고 자보도 붙였지만 “그 밖의 대상에게는 점차 꺼리게 되어 커밍아웃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적 운동’이 필요할 만큼, 무성애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는 걸까. “사실 에이섹슈얼이 하나의 정체성이고, ‘차별 사유’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점점 고민이 된다. 혼자 머리 속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라는 느낌이 강해져서다. 현재는 ‘이야기’가 없는 선언과 같다.” 그는 전했다. “한국에서 에이섹슈얼은 성소수자를 나타내는 LGBTAI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sexual, Intersexual, Queer) 표기의 가운데 끼어든 알파벳일 뿐이다.” 소수자 운동 내부에서 무성애자의 정치적 지위는 아직 의견이 갈린다. 지난해 6월 트위터에서 일어난 논쟁은 국내에서도 무성애와 관련된 논의가 본격화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무성애자는 타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들 중엔 때때로 자위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취지의 에이섹슈얼봇의 트위트로부터 불붙은 논쟁은, 무성애자 운동의 필요성과 절실함에 대한 것으로 번졌다. 논객 노정태는 자신의 트위터(@JeongtaeRoh)를 통해 에이섹슈얼들을 비판했다. “LGBT라는 정체성은 물론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만, 어쨌건 그들은 인권을 위한 운동의 성격을 지닙니다. 나는 남들과 섹스하기 싫다는 소리를 하기 위해 소수자 운동을 끌어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논쟁은 그다지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연우씨는 “대체로 무성애자들에게 불쾌감과 씁쓸함을 안겨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돌이켰다. “동성결혼 합법화나 호적상 성별 정정 문제처럼 명확하게 공적 영역과 연결된 지점이 무성애에는 아직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성애자 이슈를) 한 차원 낮은 수준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당사자에게 안팎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체성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체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만한 존중을 받아야지요.”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찾은 LGBT들에게 커뮤니티는 동질감의 위안은 물론 연애라는 선물도 준다. 하지만 무성애자 개인이 겪는 고통은 커뮤니티를 통해 해결되는 부분이 적다. 오히려 로맨틱 무성애자는 유성애자 애인과의 관계 속에서 ‘커뮤니티 이후’에도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성애자, 당신 곁을 떠나며 제대로 속사정도 말하지 못한 ‘그 사람’을 이해할 근거도 된다.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표현하고 정체화함으로써 그것을 정치화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성적 정체화는 자신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의 한 형태입니다.”
태어나고 죽을 때는 다 무성애자다 하나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한 사회의 해묵은 편견을 조정하는 일이다. 이성애 성향과 동성애 성향, 양성애(범성애) 성향을 고루 나눠가진 무성애는 어쩌면 칼로 자르듯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폭넓은 회색 영역을 제공할지 모른다. 임옥희 대표의 제안은 의미심장하다. “한국 사회는 성애로 바싹 달궈진 냄비와 같습니다. 무성애가 이 성애지상주의 사회에 진정제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더 나은 사회는 조금씩, 미세하게, 낡은 편견의 장막들을 걷어올릴 때 장막 너머로 언뜻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결국 우리는 모두 무성애자로 태어나 무성애자로 죽지 않던가.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참고 자료: 온라인 누리집 AVEN(www.asexuality.org), <무성애를 말하다>(앤서니 보개트·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