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논쟁 최고의 이론가를 꼽으라면 단연 한원진(1682~1751)이다. 그는 호론의 철학을 대표했지만, 철학에 기초한 이념의 틀을 짜고 논쟁을 사회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그의 활동은 자신의 사조(師祖)였던 송시열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⑧ 한원진, 정학의 수호자
“명나라 말기에 유학이 흐려지니 이단이 생겨났다. 양명학이 일어나 주자(朱子)를 깔보고 배척하니, 의리가 어두워지고 풍속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자 문장과 학술이 가벼워지고 괴상하게 되었다. 자기 이론을 떠드는 자들은 주자와 다른 설을 내놓아 성현(聖賢)을 능멸하고 제멋대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세상의 도리가 망해 가니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타서 일어났다.”
한원진(1682~1751)이 명나라의 멸망을 분석한 글이다. 세상을 근심하는 선비의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세상을 읽는 방식이다. 이단이 생겨나자 학문과 문장이 뒤를 이어 타락했고, 그 영향으로 사회의 기풍이 흐려져 망국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사회나 국가의 쇠퇴를 경제, 정치 등 사회구조의 변화부터 주목하는 현대인과는 반대이다.
한원진과 같은 유학자들은 어려서부터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익숙하였다. 이 말은 유학의 경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데, 원래 앞에 네 단계가 더 있다. 그것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이다. ‘격물’에서 ‘평천하’까지를 이른바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이라고 한다. 팔조목은 간단히 말해 지혜를 다하고[격물치지], 마음을 다한 후에[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하라는 의미이다. 이를 보면 유학자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잘 보인다. 바른 마음이 바른 실천의 전제인 것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역시 이 같은 논리가 반영되었다. 상소는 대개 국왕에게 마음을 바로잡으라고 촉구하면서 시작하였다. 이어 학문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논하는 순서를 밟았다. 정쟁과 관련한 상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정책이나 논리를 비판할 때는 그의 마음이 잘못되었고, 학문이 잘못되었다는 점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정쟁이 치열할수록 상대의 마음에 대한 비판 강도가 심해졌다.
그러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다. 새 학설이나 정견을 주장하는 이들을 뭉뚱그려 마음, 학술이 잘못된 이들로 연결해버리는 이단의 계보가 쉽게 만들어졌다. 한원진이 살았던 시기를 예로 들어본다면, 선조 때의 정여립이 변해 광해군 대의 정인홍이 되었고, 정인홍이 다시 변해 숙종 대의 윤휴가 되었고, 윤휴가 다시 변해 ‘지금의 누구’가 되었다는 식이었다.
제2의 송시열을 꿈꾸며
마음과 실천을 연결하는 인식은 유학의 맥락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조선에서 이단의 계보화와 같은 논리 비약으로 나타나게 된 데는 조선의 상황이 또한 작용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유학은 조선의 재건을 위한 명분을 제공해야 했다. 명나라가 망하자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대부들은 조선이 홀로 남은 유교 국가라고 여겼다. 따라서 조선은 철저한 유교 국가가 되어야 했다. 유교 문명은 조선을 발판으로 미래에 다시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학의 역사 안에 존재 의의를 설정한 이 같은 논리는 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비상한 힘을 발휘하였다. 조선은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주자학의 나라로 재건된 것이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정파에서 그 작업을 대표한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맥의 계승자였다.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을 겪은 그는 자신이 스승들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음을 절감했다. 조선을 제외한 온 천하가 오랑캐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자 송시열은 성리학의 집대성자였던 주희(朱熹), 즉 주자의 다른 면모를 강조했다. 주자는 ‘오랑캐 금나라’와 ‘유학국가 남송(南宋)’이 대립하였던 12세기의 중국에서 유학의 가치를 지켜낸 이념가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주자의 역할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했다. 주자의 시공간은 세기를 뛰어넘어 17세기 조선의 시공간에 대입되었고, 주자학이 조선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근거가 마련되었다.
한원진의 시세 인식과 논리 구조는 송시열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영조 초반에 잠시 기대를 걸었지만 이내 단념하였고, 자신이 처했던 시대 또한 여전히 도리가 어두워져 있다고 파악하였다. 주자학은 여전히 존신되어야 했고, 조금의 오차라도 있다면 도리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였다.
문제는 국제 정세와 국내의 분위기가 차츰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변화를 한원진은 명나라 말기에 나타난 위험한 멸망의 조짐처럼 보았다. 그런데 불교나 도교와 같은 유학의 오랜 적들이나, 주자학을 반대한 양명학과 같은 유학의 이단은 드러난 환부에 불과했다. 더 심각한 것은 조선의 주자학자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이단의 싹들이었다. 특히 노론 내부에서 불교나 양명학과 흡사한 주장들이 보이는 것은 더욱 심각했다. 낙론에 대한 그의 경계는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멸망 뒤 ‘오랑캐’ 세상속 유일한 유학국가 자임
조선후기 성리학의 최고 성과 <주자언론동이고> 집필
사회구조 변동보다 ‘마음의 타락’에서 망국 원인 찾아
멸망 막을 바른 마음, 실천의 교본으로 주자학 정론화
그러나 그 신화의 이면엔 권위의 마지막 황혼만 짙어져 주자학의 정론 만들기 조선을 유학의 본산으로 만들자고 합의해도 구체적 방향마저 일치할 수는 없었다. 주자의 저술을 두고서도 치열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송시열은 이러한 논쟁이 주자학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주자의 저술에 나타난 언술, 개념 등의 불일치를 가지런하게 정리하여 누구에게나 통용 가능한 이론으로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논쟁의 여지를 봉쇄하는 교본을 만들자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주자의 저술은 사후 <주자어류>(朱子語類)와 <주자대전>(朱子大全)으로 집대성되었다. 각각 140권, 121권의 방대한 저술이었다. 이 가운데 논리와 개념 등이 모순되거나 불일치하는 경우는 일찍부터 발견되었고 논쟁을 야기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주자 본인의 견해가 달라진 경우도 있었고, <주자어류>나 <주자대전>이 후인의 집필, 편집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주자의 텍스트가 비판적으로 음미된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는 건강한 학문의 기풍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비상한 시기를 살았던 송시열은 그처럼 ‘학자 주자’를 들어 ‘학자 주자’를 공격할 수 있는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주자학은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전일(全一)한 이념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과 불일치가 확실해 보이는 주자의 언술이나 개념을 정합하여 ‘주자학’을 ‘주자주의’로 완결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이 기획을 착수만 해 놓고 거의 진행하지 못했다. 그 의무는 고스란히 한원진에게 이어졌고 한원진은 평생의 공력을 들여 완성하였다. 한원진이 60살에 탈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가 그것이었다. <주자언론동이고> <주자언론동이고>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최고 성과로 꼽힐 정도의 명저이다. 한원진은 방대한 주자 저술의 불일치한 부분을 모두 음미하고 정합적으로 해설하였다.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본뜻 살피기, 문맥 고려해 보기, 참고·비교하기, 끊어 보기, 대조하기, 폭넓게 보기 등등. 이로써 맥락, 시공간, 저자의 의도, 의리와의 상관관계, 논리성에서 출발한 주자학에 대한 질문들은 제 답을 찾은 듯했다. ‘주자학의 왕국’에 어울리는, 지금 한국 철학계의 자랑거리로도 손색없는 수준 높은 저서였다. 그러나 이 평가는 당대의 맥락을 끊어버린 지금의 시각이다. 애초 이 책의 기획에는 목적과 효과가 분명했다. 한원진은 서문에서 “주자는 공자의 의리를 계승한 공자 이후 최고의 인물이다. (…) 주자의 저술을 제대로 변별하고 본 의도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고금천지에 영원히 통하는 저술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는 송시열의 주자 존숭은, 한원진의 작업을 통해 ‘고금천지에 두루 통하는’ 무오류의 저술로 마감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류 없음’ 즉 무류(無謬)를 지향하는 이념이 끝내 바벨탑으로 흐른 사례를 많이 접했다. 중세의 ‘교황 무류’가 그랬고 현대의 ‘수령 무류’가 또한 그렇다. 그 신화의 이면에는 권위의 마지막 황혼만이 느껴진다. 그 권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생각은 아마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 그리고 그로 인해 넓어지는 공존의 지평일 것이다. 정학의 수호자 한원진은 그 지점에 서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내부의 적으로 위험시했던 낙론의 학자들은 얼마나 그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었을까.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조선후기 성리학의 최고 성과 <주자언론동이고> 집필
사회구조 변동보다 ‘마음의 타락’에서 망국 원인 찾아
멸망 막을 바른 마음, 실천의 교본으로 주자학 정론화
그러나 그 신화의 이면엔 권위의 마지막 황혼만 짙어져 주자학의 정론 만들기 조선을 유학의 본산으로 만들자고 합의해도 구체적 방향마저 일치할 수는 없었다. 주자의 저술을 두고서도 치열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송시열은 이러한 논쟁이 주자학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주자의 저술에 나타난 언술, 개념 등의 불일치를 가지런하게 정리하여 누구에게나 통용 가능한 이론으로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논쟁의 여지를 봉쇄하는 교본을 만들자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주자의 저술은 사후 <주자어류>(朱子語類)와 <주자대전>(朱子大全)으로 집대성되었다. 각각 140권, 121권의 방대한 저술이었다. 이 가운데 논리와 개념 등이 모순되거나 불일치하는 경우는 일찍부터 발견되었고 논쟁을 야기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주자 본인의 견해가 달라진 경우도 있었고, <주자어류>나 <주자대전>이 후인의 집필, 편집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주자의 텍스트가 비판적으로 음미된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는 건강한 학문의 기풍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비상한 시기를 살았던 송시열은 그처럼 ‘학자 주자’를 들어 ‘학자 주자’를 공격할 수 있는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주자학은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전일(全一)한 이념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과 불일치가 확실해 보이는 주자의 언술이나 개념을 정합하여 ‘주자학’을 ‘주자주의’로 완결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이 기획을 착수만 해 놓고 거의 진행하지 못했다. 그 의무는 고스란히 한원진에게 이어졌고 한원진은 평생의 공력을 들여 완성하였다. 한원진이 60살에 탈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가 그것이었다. <주자언론동이고> <주자언론동이고>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최고 성과로 꼽힐 정도의 명저이다. 한원진은 방대한 주자 저술의 불일치한 부분을 모두 음미하고 정합적으로 해설하였다.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본뜻 살피기, 문맥 고려해 보기, 참고·비교하기, 끊어 보기, 대조하기, 폭넓게 보기 등등. 이로써 맥락, 시공간, 저자의 의도, 의리와의 상관관계, 논리성에서 출발한 주자학에 대한 질문들은 제 답을 찾은 듯했다. ‘주자학의 왕국’에 어울리는, 지금 한국 철학계의 자랑거리로도 손색없는 수준 높은 저서였다. 그러나 이 평가는 당대의 맥락을 끊어버린 지금의 시각이다. 애초 이 책의 기획에는 목적과 효과가 분명했다. 한원진은 서문에서 “주자는 공자의 의리를 계승한 공자 이후 최고의 인물이다. (…) 주자의 저술을 제대로 변별하고 본 의도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고금천지에 영원히 통하는 저술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는 송시열의 주자 존숭은, 한원진의 작업을 통해 ‘고금천지에 두루 통하는’ 무오류의 저술로 마감된 것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