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호락논쟁13, 왕실 척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엮인 철학논쟁

소한마리-화절령- 2015. 9. 29. 07:54

왕실 척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엮인 철학논쟁

등록 :2015-09-24 19:37

크게 작게

화양서원 묘정비의 내용을 두고 대립한 윤봉구(왼쪽)와 김원행(오른쪽). 윤봉구의 초상화는 당대의 화가 변상벽이 그렸다.(안동 권씨 종중 소장) 김원행의 초상화는 원래 변상벽이 맡았었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도화서화원으로 초상화에 능했던 한종유가 그렸다.(개인 소장) 

 

화양서원 묘정비의 내용을 두고 대립한 윤봉구(왼쪽)와 김원행(오른쪽). 윤봉구의 초상화는 당대의 화가 변상벽이 그렸다.(안동 권씨 종중 소장) 김원행의 초상화는 원래 변상벽이 맡았었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도화서화원으로 초상화에 능했던 한종유가 그렸다.(개인 소장)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⑫ 철학 논쟁에서 인신 공격으로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이 학파를 유지시켜 주지는 않는다. 학파는 논쟁을 통해 정통을 세워야 했고, 교육을 통해 후세대를 길러야 했다. 그러나 정통은 권위를 불러오고, 교육은 경제력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학파가 성장해 갈수록 학문과는 무관한 욕망들이 따라붙는 것이다. 호락논쟁의 당사자들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2차 논쟁이 있고 다시 20여년의 세월이 흐르자 이전에 볼 수 없던 충돌이 생겨났다. 그 충돌의 이면에는 학계를 활용하려는 정치권의 욕망이 또한 있었다. (※ 이번회, 다음회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권오영 교수의 연구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화양서원 묘정비(華陽書院廟庭碑)

송시열은 만년에 속리산 북쪽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는 그의 지향을 기리는 건물 등이 차례로 세워졌다. 이로써 화양동은 노론의 정신과 학문을 상징하는 성지(聖地)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중 송시열을 추모하는 화양서원은 노론 쪽 서원 가운데 명망과 영향력이 으뜸이었다.

화양서원이 세워진 지 60여년이 흐른 1760년대, 서원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묘정비는 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그곳에서 제사하는 인물을 높이기 위해 세운다. 비에 새기는 글은 보통 서문과 명(銘)으로 이루어지는데, 서문은 해설하는 글이고 명은 찬양하는 시이다.

비문의 작성자는 윤봉구였다. 그는 권상하의 제자이자 한원진의 절친한 친구로, 한원진이 죽자 자연스레 호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대개 송시열이 유학의 의리를 굳건히 지켜 조선을 안정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명(銘)에는 결이 다른 문장이 들어갔다. 풀이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은 옛날부터 분분했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회통(會通)하니 하나가 되었네. … 단맛이 토(土)에 속한다 해서, 꿀의 성질을 신(信)이라 할 수 있겠나. … 선생이 옳았던 근본이 여기에 있으니, 이론과 사업이 일치하셨네.”

이 문장이 두 가지 이유에서 논란을 불러왔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송시열의 정신과 업적 위주였는데, 이 대목에서 송시열이 이기론과 같은 성리철학을 통일했다 하고 또 그의 행적은 바른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 것이다.

더 큰 논란은 인용문의 중간, ‘단맛이 … 꿀의 성질을 …’(甘雖屬土, 蜜豈性信)이라는 여덟 글자였다. 이것은 원래 송시열의 글인데, 조금 아리송하여 해설이 필요하다. 당시 사람들은 ‘화수목금토’로 이루어진 오행(五行)을 만물에 연관시켜 세상사를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오행의 하나인 토(土)는 방위로는 중앙, 색깔로는 황색, 인간의 얼굴에서는 입, 맛으로는 단맛에 속하였다. 또한 오행은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과도 결합하였다. 세상사는 이렇게 철학과 조응하게 된 셈인데, 오행의 토에 해당하는 오상이 바로 신(信)이었다. 그렇게 보면 단맛 운운은 ‘단맛은 오행 가운데 토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단맛을 내는 사물을 신이라는 윤리와 바로 결합시킬 수는 없다’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인(人)과 물(物)을 분리해서 보는 호론의 이론과 상통하는 듯했다.

결국 위 인용문을 재구성하면 ‘송시열의 철학은 유학의 논쟁을 통일하였다, 그의 바른 철학에서 큰 업적이 나왔다. 그런데 그의 철학을 호론이 계승했으니, 호론의 이론과 실천이 옳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었다.

 

 

노론의 아성 송시열 추모 화양서원
묘정비 건립과 그의 영정 두고 대립
그 뒤엔 북당-남당 정치 대결
사도세자비 혜경궁 홍씨 집안의 북당
영조 새 왕비 정순왕후 집안의 남당
영조 후반기 전제왕권 강화 뒤 발호

화양서원 묘정비는 우여곡절을 거쳐 세워졌고 윤봉구의 글도 그대로 새겨졌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甘雖屬土, 蜜豈性信’이란 여덟 글자는 후대의 누군가가 긁어놓았다.(점선 부분)
화양서원 묘정비는 우여곡절을 거쳐 세워졌고 윤봉구의 글도 그대로 새겨졌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甘雖屬土, 蜜豈性信’이란 여덟 글자는 후대의 누군가가 긁어놓았다.(점선 부분)

 

 

묘정비 건립을 둘러싼 힘겨루기

비문을 쓴 윤봉구는 1767년(영조 43년)에 사망하였고, 윤봉구의 제자들은 속히 묘정비를 세우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 제동을 건 이가 있었다. 낙론의 수장이자, 당시 화양서원의 원장이었던 김원행이었다. 화양서원의 원장은 노론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가 명예직처럼 추대되었고 서원 실무에 간섭하지는 않았으므로 김원행의 행동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원행의 주장은 간단했다. 묘정비는 송시열의 지향과 행적을 높이자는 취지이니, 이기론과 같은 복잡하고 논쟁적인 이론을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면 오히려 송시열을 욕보인다는 것이었다. 김원행은 그 구절을 빼버리든지 아니면 건립을 유보하고 후대의 논의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유학에서 철학 논쟁은 항상 있었음을 생각하면 김원행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비문의 당사자인 윤봉구가 이미 사망해버렸으므로 원문을 고치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유학의 거장들도 해결 못했던 철학 논쟁이 과연 언제 통일될 것이란 말인가.

호론 유생들 사이에 그리고 호론과 낙론 사이에 편지가 돌고 말이 보태어졌다. 호론에서는 김원행이 일부러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여론이 돌았다. ‘잠시 유보하자’는 것은 ‘영원히 정지하자’는 저의가 아니냐는 의심도 생겨났다. 언사가 점차 거칠어지고 오해가 생겨났다. 김원행의 처사에 항의하여 서원의 직임을 사직하는 이가 나오는가 하면, 발끈한 일부 유생들은 인근 서원에 통문을 돌리기도 했다.

화양서원 묘정비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점차 수그러들 무렵, 서원에 걸려 있던 송시열의 영정을 둘러싸고도 또 한 차례 격동이 일었다. 송시열의 영정을 서원에 둘 것인가,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오해가 쌓이고 감정이 격해진 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도 ‘조상을 욕보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 ‘스스로 난신적자가 되었다’, ‘방자하게 날뛰었다’는 등의 유벌(儒罰)을 서로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당(北黨), 남당(南黨)과 얽히다

하필 이 시기에 갈등이 연달았던 데에는 정치적 이유가 없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정계에서 일어난 일들로 인해 이들 학파의 지위가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지 30여년. 정치의 생리에 익숙해진 영조는 이 시기를 넘어서자 신하들과 조정하고 타협하는 탕평군주에서 어버이처럼 군림하는 전제형 군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국왕의 권위가 높아질수록 친위 그룹이 점차 힘을 얻었는데 그 핵심에 척신(戚臣)들이 있었다. 당시 척신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홍봉한이다. 홍봉한은 자신의 딸(혜경궁 홍씨)과 사도세자의 혼인을 계기로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나날이 높아졌다. 홍봉한의 고속 승진은 영조의 안배였음은 물론이다.

외척들의 지형은 1759년(영조 35년)을 계기로 또 변했다. 정성왕후를 잃은 영조는 이해에 새 왕비를 맞이하였다. 훗날 순조 초까지 정국의 중심에 있던 정순왕후 김씨가 바로 그녀였다. 영조는 새 왕비의 부친 김한구, 오빠 김구주를 비롯한 일족의 벼슬도 파격적으로 올려주었다. 그러자 정국은 홍봉한을 중심으로 한 북당과, 김한구·김구주 부자를 중심으로 한 남당이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다.

남당은 연소하고 빈한한 선비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강경한 명분론을 내세웠다. 후발주자가 기성 권력을 비판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사실 그들의 학맥·인맥과도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호론을 대표하는 한원진의 수제자는 김한록이었는데, 그는 김한구의 사촌 형제였고 5촌 조카 김구주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로써 정파 남당은 자연스레 학파 호론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영조 또한 당시 호론의 수장이던 윤봉구에게 대사헌을 내리며 우대했다.

남당이 충청 지역에 뿌리내린 호론의 지지와 강경한 노론의리를 내세워 유림의 마음을 포섭하자, 북당에서는 낙론 쪽과 손잡고자 했다. 선발주자였던 그들은 아무래도 서울 출신이 많았으므로 상대적으로 낙론과 친한 인사들도 많았다. 홍봉한이 특히 공을 들인 인물은 김원행이었다. 김원행 본인은 척신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혐의를 지울 수는 없었다. 호론 사이에는 ‘김원행이 홍봉한을 돕는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거기에 화양서원 묘정비와 영정 문제가 불거지자 이제는 ‘김원행이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화양서원 묘정비 사건은 학술 논쟁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영정 문제는 자존심과 욕구가 노골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파와 연결되자 인신공격에까지 이르렀다. 영조 말년의 이같은 갈등은 정조 대에는 더 맹렬해졌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