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다 간...

[산에서 자고 출근하기, 첫 마이크로 어드벤처 체험기]산속 하룻밤에 두근대는 가슴..'일상'이 '모험'이 되다

소한마리-화절령- 2015. 10. 25. 21:30

[산에서 자고 출근하기, 첫 마이크로 어드벤처 체험기]

산속 하룻밤에 두근대는 가슴..'일상'이 '모험'이 되다 경향신문 | 김여란 기자 | 입력 2015.10.23 21:40

툴바 메뉴
  • 고객센터 이동

나의 첫 ‘마이크로 어드벤처’, 작은 모험은 도시의 산속에서 평일 하룻밤 보내기였다. 텐트도 없이 산속에서 잠들 모습을 상상하면 어쩐지 ‘반지 원정대’가 생각났다. 퇴근 후 작은 산에 올랐다가 다음날 출근하는 게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고 호들갑 떨지 말자 싶다가도, 가슴이 두근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취재 때문에 현장에서 밤을 새운 적은 있어도, 일부러 야외에서 자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지난 16일 새벽, 영종도 백운산 정상에서 비박한 ‘작은 모험단’ 일행이 바다 건너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원씨 제공

일월화수목금금금, 다시 월…. 주말까지 일정이 이어지는 날들의 한복판, 목요일의 작은 모험 계획은 시작 전부터 산뜻한 쉼표였다. 내 첫 작은 모험이 시작될 목요일 영종도 백운산에, 내 마음은 닷새 전부터 미리 가 있었다. 황지우의 시구 같은 심정으로 그날을 기다렸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드디어 지난 15일 목요일 아침, 침낭을 하나 챙겨든 것 외엔 평소 출근할 때 같은 모습으로 버스를 탔다. 작은 모험에 처음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새 물건을 사기보다는 일단 주변이나 렌트 업체에서 빌려서 체험한 뒤 자신에게 맞게 준비하는 게 좋다. 나는 침낭을 동료에게 빌렸고, 집에 있던 3000원짜리 은박매트를 챙겼다. 등산복과 등산가방, 등산화 없이 평소 입고 신던 차림대로 갔다. 야행에 필요한 헤드 랜턴은 하나 샀는데, 비박지까지 길이 험하지 않다면 더 저렴한 손전등도 무방하다.

사무실 한편에 둔 침낭가방을 보고 한 선배는 대학 때 산에서 비박하던 경험을 들려줬고, 또 다른 선배는 “이게 웬 노숙자 짐이냐”고 물었다. 작은 모험은 나만이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종일 붕 뜬 마음으로 마감을 마치자마자 약속 장소인 공항철도 운서역으로 향했다.

<모험은 문 밖에 있다>의 저자 험프리스는 퇴근 후 가까운 시골로 향해 산에서 홀로 하룻밤을 자고 다시 통근 열차를 타는 일은 “저렴하고 직접적인 작은 모험”이라고 소개했다. 윌북 제공

나와 함께 백운산에서 하룻밤을 보낼 모험단은 최근 출간된 책 <모험은 문 밖에 있다>의 독자들과 출판사 윌북 관계자들까지 6명이었다. 참가자 중 부부인 최수현(30)·이상원(36)씨는 백패킹 마니아였는데 그들도 텐트 없는 비박은 처음이라고 했다. 김경미씨(40)는 나처럼 생애 첫 비박이었다. ‘비박’이 한자어가 아니라 독일어 ‘bivouac’인 것도, 텐트·침낭 등 캠핑에 필요한 장비를 최소화해 짊어지고 다니는 백패킹과 차에 물품을 싣고 다니는 오토 캠핑의 차이도 처음 알았다. 이씨는 “백패킹을 시작하면서 캠핑 다닐 때 필요한 것만 들고 다니다 보니 그게 평소에도 몸에 뱄다. 그러면서 가치관이 바뀌고, 성공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고, 앞으로의 미래도 다르게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후 9시, 내 가방에 출판사에서 준비해준 침낭 하나까지 더해 짐 5㎏쯤을 지고 백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침낭 두 개와 매트는 다 가방에 매달았다. 손이 비어야 어둠 속을 걷기 편하다. 백운산은 250m의 완만한 산으로 정상까지 40분 만에 도착했지만, 어둡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건너 신도시 송도의 불빛이 가까우면서도 멀어 보였다. 그 거리가 소중했다. 평소대로면 평일 이 시간에 내가 할 일은 뻔했다. 집에서 시트콤을 보거나 술집이나 식당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시 혹은 가로등 빛과 콘크리트가 빠질 수 없는 공원 어딘가를 걷고 있거나.

주말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평일에, 언제든지 간단한 시도만으로 그 모든 것과 멀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새로웠다. 또 백운산은 백패커들이 자주 찾는 곳이지만 평일 밤에 오는 사람은 없다. 이 어둠 속에 우리뿐이라는 게 두근거렸다. 주말 산처럼 사람들로 번잡하지 않다는 것 역시 평일 비박의 매력이다.

지난 15일 밤, 퇴근 후 영종도 백운산에 오른 ‘작은 모험단’ 일행이 잠들기 전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상원씨 제공

잠자리는 헬리콥터 비행장에 마련했다. 평평하고 동쪽으로 시야가 탁 트여 있어 일출을 보기에 적격이었다. 침낭 6개가 놓일 바닥에는 먼저 커다란 비닐을 깔았다. 이후 각자 가져온 매트, 그 위에 침낭을 놓으면 준비 끝.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한기를 막기 위해 꼭 매트를 침낭 아래 깔아야 한다. 산속에서의 밤은 습기가 큰 복병이라는 것도 배웠다. 침낭 위는 비 맞은 듯 금세 축축해졌지만, 자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족발과 술을 꺼내 자정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야행도, 못 씻는 것도, 혹시 잠을 설칠 일도 다 괜찮았지만, 단 하나 추위는 무서웠다. 그날 나는 내복부터 점퍼까지 위는 다섯겹, 아래는 수면바지와 기모바지 두개를 겹쳐 입고 침낭에 들었다. 핫팩 사는 걸 잊어서 다른 이에게 두 개를 빌려 가슴과 등에 하나씩 붙였다. 그런데 추위 걱정은 기우였다. 삼계절용 침낭 두개를 겹쳐 쓰고 누웠다가 더워서 윗옷 두 겹을 벗었다. 보통 면바지를 입고 잠든 다른 모험단원들도 춥지 않았다고 했다.

산에서 어떻게 씻고 다음날 깔끔하게 출근할 것인가. 이 역시 평일 작은 모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 중 큰 부분일 테다. 결론부터 말하면 좀 후줄근하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좋다. 화장은 산에 올라오기 전에 들른 식당 화장실에서 지웠고, 자기 전에 손발을 물티슈로 닦았다. 산행하면서 마시고 남은 물로 양치했다. 산속은 어두우니까 옷은 어느 구석에든 가서 갈아입고 용변을 보면 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인근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으면 된다. 나는 전날 입은 옷차림대로 머리를 감지 않고, 사실 세수도 깜빡 잊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바람 한 점 없던 이날 밤, 산에는 소리가 없었다. 이런 적막 안에 있어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최수현씨(30)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게 좋다”고 했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나갔는데 충전하지 않고 뒀다.

아침에는 새 소리에 깼다. 안개가 내내 자욱해 밤하늘의 별은 희미했고, 일출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오전 6시쯤 산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안개와 구름 사이로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해를 지켜보다가, 다시 일터로 가기 위해 잠자리를 정리하고 내려왔다. 어젯밤에 보이지 않았던 산은 아침에 보니 솔숲이 아기자기해서 아름다웠다. 산길을 걸으며 ‘작은 모험? 흠, 별로 특별한 건 없네’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회사나 집 인근에서 비박할 만한 장소가 어디일지, 누굴 꼬드겨 함께 할지 저절로 떠올리고 있었다. 일 끝나면 집 혹은 약속, 다시 일. 변치 않는 평일의 생활 패턴에 작은 변화 하나 준 것뿐인데, 여행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거나 멀리 간 것도 아닌데도, 아주 멀리까지 다녀온 기분이었다.

험프리스는 바다에 가면 해변에서 하룻밤을 청해보라고 권한다. 윌북 제공

이 날의 작은 모험은 영국 모험가 앨러스테어 험프리스의 책 <모험은 문 밖에 있다>(윌북)를 길잡이 삼아 이뤄졌다. 책 안에는 당일 여행, 퇴근 후 뒷산에서 비박하기, 출퇴근길에 모험하기, 집 주변 일주, 사무실 탈출 모험, 강 따라 수영해서 여행하기, 로마 시대 사람처럼 방랑하기 등 일상에서 적은 비용으로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25가지 모험 이야기와 세세한 팁이 실려 있다. 이 작은 모험들에도 모험의 핵심인 도전·재미·일탈·흥분·배움은 모두 담겨 있다.

모험은 지구 반대편의 오지나 사막, 거대한 산에서만 가능한 거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짧고 흥미로우며 보람찬 모험은 바로 현관문 앞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이크로 어드벤처짧게, 쉽게, 언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 속 아웃도어 모험을 뜻한다. 영국 모험가 앨러스테어 험프리스가 만든 신조어다. 우리말로는 ‘작은 모험’으로 번역할 수 있다.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