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타인을 헤아리는 도덕적 삶은 나 자신에게도 이롭다
차오르는 가래에 눌려 숨을 거둔 노인을 본 중년 여인은 목구멍에 느른한 무언가가 걸칠 때마다 겁에 질린다. 죽을까봐. 침몰하는 여객선을 목격했던 젊은 사내는 물줄기가 쏟아지는 자동세차기계 속에서 눈을 뜨지 못한다. 그들에게 엄습했을 죽음의 고통이 전이되어. 비행기 타는 엄마를 향해 어린 아이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한다. 죽으면 어떡하냐고. 질주하는 자동차 도로를 일상으로 건너는 자신 또한 당할 수 있는 마지막에 대한 확률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고 있지만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 애써 참구하려 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깊게 사려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마냥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 결국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지푸라기는 ‘이 살아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일 것이다.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지막 회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죽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죽음 수업(Death class)’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예일대 철학교수 셸리 케이건과 함께한다. 그의 수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우리의 대화는 ‘살아있는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그것이 곧 ‘죽음’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과의 만남은 가을이 깊어지는 길목, 미국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의 250년 된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고색창연한 건물로 스무살 청춘들의 잰걸음이 오갔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인 셸리 케이건은 “‘죽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잘사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라며 “최고의 삶은 세상에 정의가 더 많이 작동되도록 기여하는 시간 속에 있다”고 강조했다.
안희경= 제 딸 이야기로 시작할까 합니다. 그제 수영장에서 나오면서 울더라고요. 물을 먹었다고. 소독약이 들어있는데, 이제 자기는 죽는 거냐며 겁에 질렸습니다. 고작 8살인데요.
셸리 케이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확실히 널리 퍼져있어요. 저는 그 두려움을 헤쳐보고 싶습니다. 당신 딸의 경우는 곧 죽게 될 거라는 걱정이죠. 죽음이 얼마나 빨리 우리한테 올까 무서워하는 데는 나이 구분이 없지요. 저도 지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말은 아니에요. 여기 두려움에 대한 저의 두번째 입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멸의 시간을 상상하는데, 그렇다고 영원히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죠. 그냥 그러면 좋겠다는 것이지.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요? 지금처럼 영원히 살면 좋을까요? 좀 지루하지 않을까요? 진저리나게 진력나고 곧 악몽이라 느낄 겁니다. 그러느니 저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어요. 영생이 이토록 괴로운 일이라면 죽음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닙니다. 죽음 그 이후에 무엇이 있지도 않다면, 그 미지의 시간에 겁 먹을 필요도 없는 거죠.
안= 건장하셨던 제 아버지께서 마지막을 치매로 보내셨습니다. 그 상태로 10년, 20년 계속되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겨우 1년이었습니다. 깊은 후회도 들었고 복잡한 심경이었어요. 불멸이 고통이라는 말에서 죽음도 변화하는 질서가 주는 희망일 수 있겠다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가시지 않네요. 죽음은 무엇입니까?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진짜 알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진정 끝이냐?’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역사를 통틀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사후세계를 믿고 또 말합니다. 이번 생이 끝나고 어딘가에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요. 살아있을 때 모습대로 천국의 왕국에 간다든지 아니면 환생할 거라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안도를 얻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생이 끝나는 거라고 믿어요. ‘나’라는 것은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과 뼈, 피로 이뤄진 덩어리죠. 뇌가 망가지면 우리는 멈출 겁니다. 더 이상 다른 방식의 생각하는 무엇으로 진행될 수 없어요. 고장난 기계가 되니까요. 점차로 부식할 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이 죽음이에요.
안=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굳이 그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까요?
케이건= 제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스무살 언저리입니다. 다들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죽지 않을 것 같이 살거든요. 죽음이 지식으로만 있는 겁니다. 예전에는 죽음이 집 안에 있었어요. 돌림병이 일어나면 집집마다 아이들이 먼저 죽어나갔죠. 그런데 지금은 병원에서 죽고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죽음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예의없는 일이 됐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까요? 이번 생이 오로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귀한 기회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거나 어딘가에 가서 이대로 또 살아갈 수 있다면, 지금 살아있는 이 시간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기회를 갖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 생이 내가 갖는 유일한 자원이라면 신중하게 보살피겠죠. 허투루 보내면 두 번째 기회는 없으니까요.
안= 5년 전, 명상하며 느꼈던 자각이 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내 안에 머물고 계시구나 라고요. 얼굴 생김새도 이어지고, 세상 가치에 대한 기준도 그렇죠. 이제 내가 아버지의 일부로 세상에 있구나 여겨지며 뭔가가 저를 감싸는 기운을 느꼈습니다. 치유의 시간이었어요. 물론 이는 부모자식이라는 유전자 관계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옛 사람들이 글로 남긴 가르침들이 이어지는 것도 이에 해당하겠죠.
케이건= 당신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존재를 느꼈다면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억, 당신에게 준 영향, 그런 걸 겁니다. 당신이 느끼는 감사도 포함될 거고요. 이는 대단한 거죠. 그가 잘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편안함을 얻었다는 기운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는 이들 가운데는 당신과는 구별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들은 말 그대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기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혼이 찾아왔다고요. 물론 왜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죽음 수업을 하면서 만나는 한가지 어려움이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 찾는다는 거요.
안=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관점을 부정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요. 그렇다면 이는 살아있는 이들을 통제하려는 이데올로기일 뿐인가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삶과 죽음’. 화려한 색채·율동적 선으로 표현한 생명력 넘치는 삶과 어둡고 칙칙한 죽음의 세계를 대비시킨 그림은 가치 있는 삶을 강조하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되뇌게 한다.
케이건= 세상에는 누군가의 목적으로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이데올로기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왕의 신권은 도덕이나 공평한 제도가 아니라 신의 뜻을 가져와 압박하려던 완벽한 예지요. 그렇지만, 이원론이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육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인간이 단지 기계일 수 없다라는 이론은 매우 가능성 있는 답이에요. 많은 현대 철학자들도 주장하는데 제가 동의하지 않을 뿐입니다. 저는 물리주의 입장이에요. 우리들은 물질적인 존재라는 거고, 사후세계가 아닌 삶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죽음 수업을 하는 동안 한 학생이 세상을 떠났어요. 이 친구를 떠올리면 아직도 목이 메는데요(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예일에 들어올 때 암에 걸려 있었어요. 의사가 3, 4년 남았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왔다고 해요.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이고, 기회가 된다면 졸업장도 받고 싶었다고요. 그가 3학년 1학기에 제 수업을 들었어요. 물론 저는 세상에 영혼은 없고 죽음은 끝이라고 말했죠. 2학기가 되자마자 그는 플로리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을 맞으려고요. 우리 교수들은 회의를 해 그에게 졸업장을 주자고 의견을 모았죠. 매우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던 친구입니다. 학장이 직접 집에 가서 학위를 주었습니다. 네, 그는 죽었어요. 저는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남은 대학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남은 생에 무엇을 하고자 합니까?’ 만약에 우리가 살던 관성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진정 하고 싶은 그 일을 할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질문들은 우리 삶을 다시 고려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안= 인간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물리적인 관점으로 고려해 봄으로써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거라 여기나요?
케이건= 철학에는 일반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도덕을 진전시키는가? 도덕은 진보하는가? 그렇다고 답하는 이들도 있고 아니라는 이들도 있죠. 철학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진보했는가? 물으면 아니라고 말하겠어요. 물리주의자의 입장 역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담은 <파이돈>에도 나옵니다.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죽자 플라톤이 제자들에게 물어요. ‘영혼이 있는가? 영원한 생이 있는가? 마음이 있는가?’ 그가 말하는 것의 하나는 물리주의자의 관점입니다. 하지만 그 단어는 쓰지 않았죠. 중국 철학자 맹자에게서도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철학의 진보는 그리 많지는 않은 거죠. 다만 세상이 진보해온 자취는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철학적인 생각들이 점차 우리 삶의 상식이 되어왔으니까요.
안= 사람들의 마음이 문명의 진보를 이뤄왔다는 거네요.
케이건= 요즘 사람들은 노예제도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대부분의 사회는 노예를 가졌어요. 인간이 허락한 도덕적 진보가 이제는 이를 반대합니다. 질문 하나 할까요? 당신은 여성을 동상으로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안= 대부분의 동상은 남성이죠. 특히 의자에 앉아 있는 상은 남성이었고요. 권력을 상징하니까요.
케이건= 그래요. 심지어 50년 전만 해도 거부당했습니다. 이는 도덕적인 진보이고 인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권이 있다는 생각을 갖기까지 우리는 편견을 극복해야 했죠.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편견이 있어요. 동물을 인간처럼 헤아리지 않아요. 현대화된 공장에서 학대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입니다. 맛을 위해서요. 이도 편견임이 서서히 깨우쳐지고 있습니다. 200년이 지나면 노예를 끔찍해하는 것처럼 편견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네번째 예는 흥미로운 역사적 질문을 해보고 싶어요. 매일 아침 뉴스를 열면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죠. ‘우리는 한 번이라도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 궁금해질 거예요. 독일 철학자 칸트가 이 질문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앞으로 국가들은 서서히 민주화되기 시작할 것이다’라고요. 기념비적인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민주주의가 없었으니까요. 조금 있다 해도 오로지 백인 남자만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칸트는 오직 그의 철학에 기초해서 예언한 겁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전쟁과 함께하지 않는 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는 제게 희망을 줘요. 칸트는 국가 연합의 사상을 말했고, 국가들이 연맹을 이루며 갈등을 평화롭게 풀어가는 길을 발견할 거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사상에서 매우 멀리 있기는 하지만 이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도덕적 진보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안= 결국은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인데요. 하지만 이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 아닐까요? 경제가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으로 흐르면서 학교는 생각하는 시간들을 줄였습니다. 배출되는 인력들은 산업사회의 여러 상품을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고요. 우선 살아남으려면 스펙 쌓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케이건= 알아요. 저도 때때로 느낍니다. 하지만 진실이 아닙니다. 경험철학 수업에서 이를 증명해 나갑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죠. 사람들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물어보라고 해요. 행복하지 않으면 1, 대체로 행복하다고 여기면 7을 답하게 하는 등의 제안을 하죠. 그 숫자가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와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결론은 그리 많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집세도 못 내고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못 챙겨준다면, 낮은 숫자를 말할 거라고 여기겠죠. 최저임금을 받는데 여분의 돈이 생겼다면 그 숫자가 확 올라갈 거라 여길 겁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돈이 많아지면 소비 기준 또한 올라갑니다. 새 청바지는 살 수 있는데 아이폰 신형은 못 사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대학에서 철학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덫에 걸릴 수 있어요. 중산층이 못 되면 인생을 만족하게 못 살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옳지 않아요.
안= 사실, 10대에게나 20대에게나 제일 어려운 질문이 ‘무얼 하고 싶어요?’ ‘꿈이 뭐예요?’라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되돌아오는 답이 ‘저는 무얼 하면 좋을까요?’이거든요. 중년들도 마찬가지죠. 상담심리가 번성하는 것도 ‘내가 모르는 나’를 알려줄까 하는 기대라고 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케이건= 제가 가르치는 또 다른 수업이 있습니다. ‘죽음 수업’과 쌍을 이루는 ‘인생 수업(Life class)’입니다. 학생들에게 물어요. 너희들이 유일하게 누리는 ‘너의 삶’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요. 저는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서 바랄 수 있는 가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거요. 이는 철학자가 아주 오래도록 의문을 가져온 것이기도 합니다. 도덕적으로 사는 생은 다른 사람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롭습니다. 물론 질문해야죠. ‘그래서 무엇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의인가?’ 답은 많아요. 노예에 대한 반대, 여성에게 권리가 있다는 생각, 동물권리 확대 등. 더불어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풍요를 누리며 부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는 열심히 일해서 월급을 타면서도 힘겹게 살아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불균형 말이에요. 최고의 삶은 세상에 정의가 더 많이 작동되도록 기여하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적 자원이 조금이라도 더 생기는 그곳, 그래서 힘겹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그 시간에서 삶은 가치를 갖게 돼요. 이것은 죽음에 대한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잘 사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나올 수 있거든요.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충만함은 뭔가 내 삶에 가치 있는 일이 들어올 때 이뤄집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안= 마지막 질문입니다. 각자도생하는 시절에 혹시 사랑이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랑마저도 포기합니다. 관계 맺는 것이 두렵죠.
케이건= 내게는 두 가지 질문으로 들려요. 하나는 ‘세상은 지금 무엇을 요구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감정’이오. 만약에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은유적인 표현을 쓴 것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행위라고 말한 거라면 이때 사랑은 어떤 확장된 감각으로 사용되죠. 그렇다면 동의합니다. 그런데 느낌으로의 사랑을 이야기한 거라면 저는 좀 달라요.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돕는다는 행위니까요. 칸트는 ‘사람을 돕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해야 할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뭔가를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아도 기부하는 일이 옳기 때문에 하거든요. 그러면 됩니다. 칸트학파들은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존중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완전한 존재로 실재한다는 그 사실을 존중해야 하죠. 해치지 않아야 하고 삶에 필요한 자원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칸트철학의 언어는 인식입니다. 도덕적으로 헤아리는 거죠. 이는 사랑이 만들어내는 감성적인 톤은 아닙니다.
안= 불안이 깊어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시대라면, 더 많은 타인과도 연결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케이건= 매우 일반적인 감각에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도 좋아요. 사랑에 빠지는 데 위험부담은 있지만, 매우 중요하죠. 사랑은 삶을 불러줍니다.
안= 그 말 좋은데요. 삶을 부른다. 활짝 살아나게 하는 느낌입니다.
케이건= 인생 수업에서 일주일 동안은 사랑을 이야기하며 보냅니다. 왜 사랑은 가치가 있을까? 엄청난 가슴앓이를 가져올 수 있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사랑이 잘 진행되어도 그래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갑자기 진땀을 흘리며 말하죠. ‘이건 열병보다 더해!’라고요. 그래서 질문합니다. 사랑은 왜 가치를 갖는가? 제게는 헤겔의 답이 떠올라요.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지만 칸트는 개체로서의 인간을 세상으로 이해하기를 시도했고, 헤겔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맥락 속에 있는 사람을 봐야 한다고요. 그래서 헤겔의 한 면은 사랑입니다.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저는 그를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할 때도 역시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사랑은 누군가 멋진 사람이 내가 멋지다는 것을 알아봐주는 겁니다. 내 가치를 다른 이가 인정해주는 일은 삶에 있어 참으로 중요하죠. 그럼으로써 내 인생이 가치로워지니까요. 그러면, 왜 알아주지 않는 사랑은 고통스러울까요? 당신은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기 진정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인생에서 사랑이 빠져나가는 일이 왜 파괴적인가 하면 바로 가치를 인지하는 우리의 감각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안= 아프건 달콤하건 사랑이 머물 때는 구르는 낙엽 하나에도 온통 흔들리죠. 상대에 대한 가치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연결도 끈끈해지고요.
케이건= 남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돌보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에게 있는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하지 못해 많은 실수를 합니다. 우리가 존중하는 그 사람이 우리가 보살피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러면서 우리의 가치를 판단한다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런 우리와 사랑에 빠진다면요. 그 사람은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도 사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서로가 가치 있는 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비록 그 사랑이 지속되지 않을지라도, 가슴앓이 시간일지라도 위험을 안고 달려가볼 만한 곳이에요. 사랑의 짐은 질 만한 가치가 있답니다.
안= 나의 삶이 가치 있는 곳을 향할 때, 나와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 역시 가치를 일구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리즈를 마치며
지난해 ‘문명, 그 길을 묻다-세계 지성과의 대화’를 진행했습니다.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망을 보이며, 성장의 정점을 지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좌표를 찍어보고자 했습니다. 그 안에서 세상의 진전을 이루는 것은 개개인의 마음이라는 상을 잡았습니다. 개인의 선택이 모여 이뤄진 세상이 오늘이라면, 그 선택이 사려 깊어질 때 내일 우리의 삶은 보다 평화를 일궈내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3월부터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을 연재했습니다.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작동들을 살펴보며 각자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는 길을 끝자락이나마 보이고 싶었습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세상은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동시에 변화를 일으키는 우리의 품속에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 시리즈 끝>
셸리 케이건은 누구 - ‘죽음 수업’으로 유명세 미국 대표 현대 철학자
셸리 케이건은 예일대 철학교수(사회사상·윤리학 전공)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1982년 프린스턴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피츠버그대, 일리노이대에서 강의했다.
그의 철학은 도덕철학과 규범윤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삶과 죽음의 문제, 행복, 도덕적 가치, 공공의 선, 인간의 본성 등에 관한 논문과 저작을 발표하면서, 공리주의로 대표되는 결과주의 윤리학과 칸트주의로 대표되는 의무론적 윤리학 사이의 논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대표 저작인 <도덕의 한계>와 <규범윤리학>은 세계 유수 대학에서 철학 교재로 채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