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론의 거두였던 이재(왼쪽)와 그의 손자 이채(오른쪽). 유학자의 풍모를 잘 드러내 두 작품 모두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닮은 점도 흥미롭다. 학계에서는 손자 이채의 초상을 기초로 이재의 초상을 그렸기 때문이라는 설과,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⑮ 성찰과 반성
철학이나 가치관의 신념화는 언뜻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독선에 빠진 신념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독선만큼 무서운 위험이 또 있다. 논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승리는 쾌감, 명예, 물질적 보상 등으로 유혹하고, 그 이해타산에 빠져 초심을 잃게 되면 논쟁은 말장난이 되어버린다. 자신을 비워 독선을 경계하고, 초심을 되새기며 매양 반성할 따름이니, 가열된 논쟁에서 한발 물러나 성찰하고 반성하였던 모습은 언제나 귀감이 된다.
단순한 심성 견해차에서 폐단으로
학문시비가 이념시비로 불똥 튀고
상대 스승 폄하하고 학문 업적 매도
“자기반성·실천 없이 무슨 도움이랴”
‘실학’ 풍조도 성리학 반성에서 출발
혈전에서 벗어나기 전라도에서 올라와 김원행 밑에서 공부한 황윤석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 수십 년 동안 꼼꼼히 일기를 썼다. 일기는 지금 <이재난고>라는 이름으로 전하는데 한문본 50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호락논쟁과 관련한 학자들의 뒷얘기를 전해주는 데에도 이 기록만한 게 없다. 그중 한 대목을 들어보자. 하루는 황윤석이 조아무개라는 서울의 학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마침 호락논쟁이 이야기 주제로 오르자, 그 사람은 대뜸 심정을 토로하였다. “우리 집안은 낙학에 속하지만 친척 중에는 호학을 지지하는 이 또한 많았기에 그들의 견해 또한 많이 들어 왔다오. 그런데 학문에 대한 견해 때문에 양편에서 사달이 일어나고 끝내 피를 부르는 혈전까지 벌어졌으니 참으로 모를 일이지요.” 황윤석의 기록은 호론과 낙론 사이에 끼인 사람들의 착잡한 처지를 잘 보여준다. 학문 시비가 이념 시비로 불똥이 튀고 이해타산과 감정 대립이 얽히자 풀기 힘든 실타래처럼 꼬여버렸다. 이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황윤석과 동시대 학자였던 이채는 이렇게 진단했다. “지금 ‘호’(湖)라고 부르고 ‘낙’(洛)이라고 부르게 된 시비의 발단은 원래 미미했었다. 단지 심성(心性)에 대한 견해 차이였는데 시간이 흐르자 폐단이 심해져 서로 멀어졌다. 제자들이 서로 싸우고 또 자손과 문도들이 무리를 가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세상의 우려가 되었다.” 이채가 평범한 유생이라면 심드렁하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가 낙론의 거두였던 이재의 손자였고 낙론에서 상당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학계의 거물들이 가졌던 깊은 우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채의 언급은 이어진다. “원래 우리 할아버지 이재와 한원진 사이에는 이렇다 할 논쟁이 없었다. 한원진은 생전에 이간과 논쟁을 벌였을 뿐이니, 우리와 한원진 사이에는 아무런 혐의가 없다. 그런데 (이재의 제자인) 최석이 지은 한 편의 시 때문에 우리 집안과 한원진 집안이 관직에서 서로 피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실관계를 따지면 이채의 말은 옳았다. 언제 호론과 낙론의 거두들이 서로 치고받으며 싸웠단 말인가. 그러나 제자들이 자라고 호승심이 생기고 정치 집단과 얽히면서 상대방의 스승은 폄하되고 높은 학문적 업적은 매도되기 일쑤였다. 그 점을 짚은 이채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었다. 사실을 짚은 뒤에는 왜곡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김창협의 조카였던 김용겸은 마침 정조에게 이 야단스런 논쟁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는 호락논쟁이 학문하는 근본 자세를 잊어버리고 “말꼬리 잡는 데만 치중해서 빚어졌다”고 했다. 촌철살인의 논평이다.
호락논쟁 시비 발단은 미미했던 것
단순한 심성 견해차에서 폐단으로
학문시비가 이념시비로 불똥 튀고
상대 스승 폄하하고 학문 업적 매도
“자기반성·실천 없이 무슨 도움이랴”
‘실학’ 풍조도 성리학 반성에서 출발
반성에서 대안까지 논쟁 주제가 퍼지고 참여하는 학자들이 많아지자 얻은 것도 있었고 잃은 것도 있었다. 학파는 세력을 얻었다. 호론은 충청도에서 막강했고 서울의 일부 노론, 척신과 연계되었다. 낙론은 서울이 근거지였고 개성, 전라도,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남인의 근거지였던 경상도까지 문인을 확대하였다. 그런데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태고 자구 하나하나를 깊이 캐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생명력보다는 타성에 빠졌다. 타성은 반성 혹은 냉소를 부른다. 당사자였던 노론 학계 일부의 반성은 위에서 본 바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중립을 지키거나 냉소하였다. 먼저 국왕들. 영조는 학문 논쟁은 국가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고 초지일관 강조하였다. 권력 개입을 차단한 것이다. 정조는 유학, 서학, 문체(文體) 등 학문 동향에 대해 꽤나 적극적으로 대응했지만, 유학의 정교한 개념을 논증하는 호락논쟁에 대해 자신이 견해를 밝히면 다툼의 실마리가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 또한 논쟁의 이론에 관해서는 중립이었다. 소론에서는 어떠했는가. 소론의 지도자였던 남구만의 손자 남극관은 논쟁 이면을 보고 있었다. ‘사사롭게 주장을 펼쳐 결국 문도를 결집하고 있다’며 이해타산을 꼬집었다. 남인에서는 정약용이 있었다. 그는 호론과 낙론이 자신들 학설의 단점을 돌아보지 않고 이기는 결과에만 힘쓴다고 일침을 놓았다. 반성, 중립, 냉소, 비판 모두가 논쟁의 승패를 판정하기보다는 논쟁에서 이익을 바라는 잘못된 행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지적들은 애초의 진지한 태도를 회복하고 건강한 소통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반성은 대안과 짝을 이루어야 더 큰 힘을 받게 된다. 성리설을 극단까지 논쟁해보고 또 논쟁 너머의 폐단까지 경험한 학자들 사이에는 끝없는 말잡기 식의 공허함을 벗어나는 신선한 학문 정신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다. 그것은 허무한 공담(空談)을 지양하고 학문에서 실(實)을 갖추는 일이었다.
실(實)을 향하여 호락논쟁에서 실에 대한 강조가 나오게 되었지만, 그 같은 귀결은 노론 학계에서만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고수하였던 영남 남인의 경우를 보자. 19세기 학자 이원조는 퇴계 학파의 관행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퇴계의 후예들이 답습에만 골몰하거나, 정교한 학설을 구축하여 상대방을 이기는 데에만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행태는 한순간의 실질을 구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말폐를 비판하며 싹튼 실의 정신은 지금 우리가 ‘실학’이란 부르는 새로운 학문 풍조가 조선 성리학 전체의 자기반성에서 기원했음을 잘 보여준다. 다시 무대를 호락 쪽으로 돌리자. 실에 대한 강조는 후대로 갈수록 왕성해졌다. 그중 19세기 전라도의 실학자 하백원의 주장은 호락논쟁에 대한 반성과 대안의 종합판이다. 그는 “호론과 낙론의 시초를 캐면 문자와 경전 구절의 변증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논쟁은 경전을 읽고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갖는 의문에 대한 해결이었다. 그 의문에 대한 토론과 논쟁, 건강한 비판에서 학문은 발전한다. 진지하고도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학문의 세계에서 누가 누구를 어떻게 배제하겠는가. 하백원의 말은 이어진다. “호론의 입장에서 낙론을 모두 그르다고 할 수 없으며, 낙론의 입장에서도 호론을 다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하백원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근래 학자들은 학문을 통한 자기 수양을 직분으로 삼지 않고 입으로만 글을 외우고 글 뜻 캐기에만 몰두한다. 그들의 고담준론과 경전 해석은 옛 사람의 찌꺼기만을 붙들고 연연하는 일일 뿐이다. … 인간의 본성이 어쩌고, 하늘의 이치가 어쩌고 하며 천만 가지로 설명하지만 끝내 실용을 얻지 못하였다. 설령 경전의 깊은 뜻을 한 두 개 찾더라도 자신을 반성하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실용과 실천에 대한 강조는 아직은 일부에 그쳤고 대세는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의 학계에서 실을 추구하며 유교적 세계관 너머를 꿈꾼 이들은 없었을까. 없을 리가 없다. 어떤 이들은 서학을 신봉했고 어떤 이들은 민(民)과의 교감을 중시했다. 호락논쟁의 영역에 있던 학자들 중에서는 홍대용이 한 정점을 찍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논쟁과 관련한 글을 쓰다 보니 지금의 ‘국정교과서 논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국정 교과서에 대한 정부·여당의 집착은 위에서 본 여러 모습 가운데 안 좋은 것 세 가지를 합쳐 놓은 꼴이다. 그 세 가지는 ‘독선, 이해타산, 권력의 개입’이다. 그리고 하나가 첨가되었으니 그것은 ‘분별력 상실’이다. 21세기에 벌어진 이 논쟁은 훗날 ‘논쟁’이 아닌 ‘희대의 연구거리’가 될 것 같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