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와 정계에서 변신하며 출세했던 홍계희. 그는 탕평정치가 불러온 학문과 정치의 이합집산을 잘 보여준다. 본인은 영화를 누렸지만 그의 집안은 정조 초반에 쑥대밭이 되었다. 그림은 그의 평생도를 그린 병풍 가운데 <평양감사 부임>(오른쪽)과 <좌의정 행차>(왼쪽). 김홍도가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⑭ 분열하는 학파들
학자 군주 정조의 등장은 학계의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가 척신을 숙청하자 호론이 타격을 입었고, 낙론에 속했던 일부 인사들도 숙청되었다. 통치 10년을 넘기면서 정조가 의리에 대한 주도권을 강화하자 판은 더 크게 요동쳤다. ‘의리의 본산’을 자처했던 노론 학파들은 정조가 내건 원칙을 두고 동참과 반대 사이에서 다양하게 분화하였다.
척신들, 정순왕후-남당-호론 초토화
영화 ‘역린’ 소재 낙론 계열 풍비박산
‘호론 중의 낙론’인 ‘호중락’(湖中洛)
‘낙론 중의 호론’인 ‘낙중호’(洛中湖)
국왕 따르는 시파, 기존노선 고수 벽파로
호론의 기대는 정조의 통치 말년에 현실이 되었다. 만년의 정조가 전제권을 휘두를수록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조야의 반대는 강해졌고, 호론-벽파가 힘을 얻었다. 대체로 학파인 호론이 여론에 불을 지피고, 정계에서는 벽파가 나서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정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799년(정조 23)에는 호론계 유생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일까지 생겨났다. 무려 635명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원진의 시호(諡號)를 청한 것이다. 비록 요구는 온건했지만 과정과 내용이 문제였다. 그들은 상소를 작성하기 전에 통문을 돌려 힘을 모았고, 상소 가운데서 자신들을 ‘진짜 유학자’로, 낙론을 이단으로 몰고 있었다. 호론의 세력 과시에 발끈한 낙론에서는 ‘한원진이 공자를 속이고 영조를 능멸했다’고 노골적으로 모욕하였고, 양측의 대립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정조 초반의 파란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등극을 방해했던 세력을 숙청하였다. 그 핵심에는 영조 말년에 비대해진 척신들이 있었다. 홍봉한이 이끌었던 북당, 김한록·김구주가 이끌었던 남당이 그들이었다.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이 사사되었고, 김구주는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로서 영조 말년에 실력자로 떠올랐던 김구주는 끝내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10년 동안 유배지를 떠돌다가 사망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정조가 행한 숙청의 정당성을 기록한 <명의록>(明義錄)을 기롱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호론이 쑥대밭이 되었다. 한원진의 조카 한후익이 죽었고, 윤봉구의 수제자인 김규오 등이 유배되었다. 정조는 그 당시 호론의 근거지였던 충청도의 불량한 무리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조사의 초점은 김한록을 향해 있었는데, 그가 영조 말년에 세손(정조)의 정통성을 문제삼았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김한록은 한원진의 수제자이자 김구주의 스승이었고, 정순왕후의 5촌 숙부였다. 따라서 정조가 그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다면, 정순왕후-남당-호론으로 이어지는 세력에 대한 덜미를 잡을 수 있었다. 정조가 당시 어디까지 캐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기록에서는 정조가 알고도 덮어두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문제는 당시에는 터지지 않았고 훗날 순조 대에 불거지게 된다. 정조 초반에 숙청된 대표적인 낙론계 인사는 홍계희 계열이었다. 홍계희는 이재의 제자로서 애초 노론의 청류(淸流)로 활동했으나, 영조 중반 이후 실무형 관료로 변신하였다. 영조가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했던 균역법 제정과 청계천 준천(濬川) 사업의 실무자가 그였다. 영조의 신임이 높아지면서 홍계희는 권력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와 각을 세웠고,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홍계희 본인은 정조 즉위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 그런데 정조 1년에 자객이 정조를 시해하려던 사건이 터졌다. 최근 영화 <역린>(逆鱗)의 소재가 된 바로 그 사건이다. 이 일의 주모자는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으로 판명되었으므로, 홍계희의 아들·며느리·손자 등이 사형되어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정조 등극 뒤 호·낙론 각기 분파로
척신들, 정순왕후-남당-호론 초토화
영화 ‘역린’ 소재 낙론 계열 풍비박산
‘호론 중의 낙론’인 ‘호중락’(湖中洛)
‘낙론 중의 호론’인 ‘낙중호’(洛中湖)
국왕 따르는 시파, 기존노선 고수 벽파로
호론과 낙론의 학맥
갈등하고, 오고가고 정조의 흔들기는 외부에서 몰아친 바람이었지만, 그 바람 이전에 이미 호론과 낙론은 분열하고 있었다. 호론에서 가장 큰 비중은 한원진-김한록, 윤봉구-김규오로 이어지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노론 의리를 강경하게 고수하며 탕평책을 비판하였고, 낙론과 같은 유연한 견해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정조 초반 김구주 숙청에 연루되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던 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강고한 그룹 내에서도 한원진과 윤봉구의 제자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낙론 또한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영조 초반 낙론을 대표하였던 이재 학파에서는 수제자였던 박성원과 홍계희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재가 생전에 홍계희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실이 알려지자 홍계희는 파문되었다. 그리고 정조 초반에 홍계희 일족이 몰락하자 그 학맥은 영영 맥이 끊겼다. 홍계희와 다투었던 박성원은 제자를 많이 길러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따라서 영조 후반의 낙론은 이재의 또 다른 제자였던 김원행과 민우수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김원행은 교육에 힘을 쏟아 낙론을 크게 확대하였다. 따라서 정조 대에는 ‘김창협-이재-김원행’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낙론의 주류가 되었다. 노론 학계가 호론과 낙론으로 분열하고, 또 호론과 낙론 안에서 각기 분파가 생겨나는 정황을 김원행의 제자 황윤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이의 제자들과 성혼의 제자들이 원수가 되고, 송시열의 자손과 송준길의 자손이 원수가 되었다. 이재의 제자들이 분열하여 홍계희와 박성원으로 갈라졌고, 한원진과 윤봉구의 집안이 또한 이를 면하지 못했으니, 아아 이것은 운명이 그러한 것인가.” 호론과 낙론이 분열하는 와중에는 이색적인 그룹들도 생겨났다. 자신의 소신대로 학파를 선택한 자들이었다. 송시열의 후손 송능상, 송준길의 후손 송명흠·송문흠 형제, 권상하의 증손자 권진응 등은 호론 명문가 출신으로 한원진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낙론 학자들과 더 활발하게 교류하며 낙론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세간에서는 그들은 ‘호론 중의 낙론’이라는 의미의 ‘호중락’(湖中洛)으로 불렀다. 낙론 내에서는 이재의 제자 민우수의 학맥이 이채로운 존재였다. 민우수와 그의 제자들인 김종후·김종수 형제, 유언호 등은 호론의 학설에 동조하였다. 이들은 ‘낙론 중의 호론’이라는 의미의 ‘낙중호’(洛中湖)로 불렸다.
시파(時派), 벽파(僻派)와 연계되다 정조는 10년을 넘기면서 의리에 대한 국왕의 주도권을 강화하였다. 국왕이 제시한 의리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붕당들이 주장한 각종 의리를 포괄하려 한 것이다. 정조의 탕평이 이른바 ‘의리탕평’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왕의 의리가 붕당의 그것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자 정계는 국왕을 따르는 시파와 기존 노선을 고수하는 벽파로 나뉘기 시작하였다. 의리 문제에 관한 한 학계는 더 민감하였다. 사실 정조는 노론 의리를 승인하고 나서 국왕의 의리를 새로 제기한 방식이었다. 낙론에서는 정조가 자신들의 대강(大綱)을 인정했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낙론의 신진 가운데 출사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이 다수 생겨났고, 그들은 정조를 지지하는 시파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정조는 호론 인사들을 완전히 소외시키지도 않았다. 노론 중에서 호론-남당 계열은 정조 초반에 많이 숙청되었으나, 그들에 동조하는 서울의 호론, 이른바 ‘낙중호’는 건재하였다. 특히 민우수 학맥 가운데 김종수와 유언호는 정조와 일정하게 타협하며 또 다른 정파인 벽파를 구성하였다. 정국은 다시 낙론-시파, 호론-벽파로 갈라진 것이다. 시파는 국왕이 제기한 의리를 따르기 때문에 정조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세를 장악한 듯했다. 그러나 ‘시’(時)라는 말이 붙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시파(時派)는 시류(時流)를 따른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 탕평에 동조하다 보면 소론·남인과의 공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을 따라 타 정파와 공조할수록 노론 안에서는 그들이 지조를 버리고 권력을 좇았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호론-벽파는 그 점에서 우위에 있었다. 시세를 따르지 않기에 ‘궁벽하다’는 ‘벽’(僻)으로 불렸지만, 그 호칭은 그만큼 청렴하고 비타협적이라는 측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호론-벽파 그룹은 겉으로 보면 수세에 몰린 듯했다. 하지만 정조가 사사로운 의리에 기울어 스스로 내걸었던 원칙을 벗어난다면 지지층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들은 궁중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의 후원까지 받고 있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