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 교정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다. 사납고 험한 세월을 거치며 정당(正堂)을 비롯해 전각은 모두 사라지고 함춘문으로 불리고 있는 중삼문(中三門)과 정당의 기단만 남아 있을 뿐이다.(경모궁에 담긴 애환의 사연들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또 캠퍼스 내의 암병원 6층 테라스에서는 250여 년 전 ‘임오화변’의 현장인 창경궁의 문정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종종 학생들과 함께 경모궁과 창경궁을 탐방하곤 한다. 나 스스로 역사의 무게와 진실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또 학생들에게 그 점을 상기케 하기 위해서다.
승정원일기 기록을 삭제하다
〈영조실록〉 1776년 2월 4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영조가 세상을 뜨기 꼭 30일 전의 일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때의 사실이 죄다 실려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습니다.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져 사람들의 이목을 어지럽히니, 신의 마음이 애통합니다. … 나라의 중요한 일은 모두 간첩(簡牒)에 적은 뒤 금궤·석실에 넣어 명산에 보관해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칠 수 없으니, 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는 것은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세손(정조)이 임금(영조)에게 올린 상소로, 〈승정원일기〉 가운데 사도세자에 관한 불미스러운 기록들을 지워달라는 요청이다. 이에 대해 같은 날 영조는 관련 기록들이 다른 사초들에 있으므로 승정원일기의 해당 부분을 삭제하는 것은 문제 될 게 없다며 허락한다는 뜻을 밝혔다. 요즈음 세태 같으면 삭제한 사실조차 모르도록 처리했겠지만, 다행히도 당시에는 삭제한 곳마다(세어본 사람의 얘기로는 100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1776년의 임금 분부로 지웠다(丙申因傳敎洗草).” 또는 간략하게 “임금의 분부로 뺐다(出傳敎).”고 표시했다. 따라서 지우고 뺀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의 기록이 삭제되었는지는 알 수 있어서 내용의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상영된 ‘사도’에서는 영조와 정조가 세초 현장에 나간 것으로 그려졌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적 허구이다.
정조는 태백산과 정족산 등 명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는 간첩, 즉 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남게 되므로 문제 될 게 없다면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승정원일기는 지워달라고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간청했고, 영조는 같은 이유로 왕위 계승자인 손자의 소원을 받아들였다. 그럼 실록은 무사했을까?
실록 편찬에 부당하게 개입하다
〈정조실록〉 1781년 3월 7일 자를 보자. “‘10년 동안의 실록은 총재관이 직접 엮고 다듬었으니 다시 교정할 일은 없다. 대신이 정리해서 그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이는 원임 대제학의 손을 거친 것이므로 여러 당상관이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 …’ 이에 앞서 총재관 이휘지가 대제학으로서 실록 편찬을 주관했는데, 임금이 1758년(戊寅年) 이후 10년 치의 승정원일기를 이휘지에게 주고 찬수를 맡겼다. 그리고서 여러 당상과 낭관이 참견 못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실록을 간행하는 일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정조는 영조실록 가운데 사도세자와 관련된 문제 시기의 편찬을 이휘지 한 사람에게 일임했다. 영조실록 편찬 과정을 연구한 오항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특정 시기를 특정 인물에게 찬수하게 했던 사례가 더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적어도 조선실록의 편찬 관례가 정착된 중종 이후로 이런 조치는 정조가 처음이 아니었나 한다.”
더욱이 정조가 이휘지에게 편찬 자료로 준 승정원일기는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사도세자에 관한 불미스러운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이휘지가 편찬한 부분을 누구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거듭 엄명을 내렸다. 몇 해 전, 죽음을 눈앞에 둔 할바마마에게 올린 상소와는 전혀 다른 언행이다.
일찍이 세종은 〈태종실록〉을 열람하려 했지만 황희, 신개 등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거두었다. 그에 앞서 태종이 〈태조실록〉을 보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변계량 등은 “전하께서 나아가 보신 뒤에 다시 내려주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할 역사라고 오히려 의심할 것입니다”라며 만류했다. 임금은 선왕(先王)의 시대를 기록한 실록을 볼 수조차 없는 것이 역사에 대한 조선의 법도이고 관례인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찬 과정에 직접 관여한 것은 나가도 너무 잘못 나간 것이었다.
역사 왜곡 성공했나?
이제 역사 왜곡의 마지막 제3막이다. 1789년 10월 16일,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사도세자의 새 유택, 현륭원이 완공되었다. 이에 맞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전기 격인 〈현륭원지(顯隆園誌)〉를 썼다. 원문은 10,078자이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글로 옮긴 것은 200자 원고지로 176매 분량이다. 승정원일기를 세탁하고, 국정(國定) 역사서인 영조실록을 ‘올바르게’, 즉 자신의 입맛대로 만든 위에 아버지를 성군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차라리 앞의 두 가지 역사 왜곡이 없었다면 현륭원지의 신뢰도는 조금 높았을지 모른다.
정조는 문종, 세종, 영조와 더불어 학식이 가장 뛰어났던 임금이다. 〈춘추〉와 〈사기〉 등 역사서도 당연히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역사와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 일자무식장이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왜곡을 거듭 자행했을까? 정조는 이유야 어떻든 명을 다하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했고, 또 그런 만큼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미화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이라면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아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남편인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은 빙애(경빈 박씨)나 비슷하게 목숨을 빼앗긴 내인, 환관들에 비할 것인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지우는 것은 그들을 거듭 죽이는 셈이다. 애민(愛民)과 인정(仁政)을 내세우는 조선의 임금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조는 생부의 만행이 가려지지 않으면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짐(朕)이 곧 국가”이던 시대에 국가 안보를 위해 부득이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정조는 선악을 분간할 줄 알아서 아버지의 비행을 감추고 지우려 했다. 그런 분별력도 없어 악행을 선행이라고 우긴다면? 떠올리기도 끔찍한 일이다.
정조의 시도는 잠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비친다. 하지만 유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어리석음과 무모함만이 뚜렷할 뿐이다. 누구든 역사를 희롱하다가는 역사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정조는 반면교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