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공존과 번영

중국인문기행에서 만난 두 인물

소한마리-화절령- 2016. 5. 24. 07:55
중국인문기행에서 만난 두 인물
김 태 희 (다산연구소 소장)

  지난주에 소흥(紹興, 사오싱) 일대를 다녀왔다. 송재소 교수가 이끈 다산연구소의 중국인문기행이었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저쟝성)에 속한 소흥은 2,500년 전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근거지로,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배경이 된 지역이다.

  이곳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역사 인물들을 배출했다. 미인 서시(西施)와 하지장(賀知章)·육유(陸游)·서위(徐渭)·서석린(徐錫麟, 쉬시린)·채원배(蔡元培, 차이위앤페이)·노신(魯迅, 루쉰)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곳과 연고가 깊은 사람으로는 범려(范蠡)·왕희지(王羲之)·추근(秋瑾, 치우진)·주은래(周恩來, 주언라이)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두 인물이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바로 범려와 채원배였다.

범려, 실력과 공적에도 지위와 이름에 초탈

  춘추시대에 이곳 소흥에 근거지를 둔 월왕 구천(句踐)은 무리하게 오나라를 공격하다 패했다. 구천은 마지막에 회계산에서 포위되어 항복했다. 월나라는 20년을 도모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산의 치욕을 갚았다. 이렇게 구천이 재기하는 데는 함께 고초를 겪으며 보좌한 범려의 도움이 컸다. 나아가 구천은 중원을 호령하는 패자(覇者)가 되었고, 범려는 상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범려는 보상과 지위에 안주하지 않았다. 본디 초나라 출신인 그는 구천의 만류를 뿌리치고 월나라를 떠났다. 제나라로 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이름을 바꾸고, 바닷가에서 농사를 지어 많은 재산을 모았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서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범려는 존귀한 이름을 오래 갖는 것이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재산을 나눠주고 또 떠났다. 도(陶) 땅에 이르자 천하의 교역 중심지라 여겨 이곳에 머물렀다. ‘도주공(陶朱公)’으로 이름을 바꾼 범려는 상업에 수완을 발휘하여 또 많은 재산을 모았다.


  사마천은 ‘월왕구천세가’와 ‘화식열전’에서 범려에 관한 얘기를 상당부분 할애했는데, 세 차례 떠나면서도 머문 곳마다 공적을 쌓은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범려의 현명한 처신은 그와 함께 구천을 도왔던 문종과 비교되었다. 제나라로 떠난 범려가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가 모두 사라지면 활은 거두어지고, 토끼가 모두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요. 구천의 사람됨이 환난은 함께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거늘 어찌 그대는 떠나지 않소?” 범려의 걱정대로 문종은 말로가 좋지 않았다.

  또 한 인물은 채원배(1868~1940)였다. 소흥에서 태어난 그는 청조 말에 과거를 합격하여 한림원의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관직을 그만두고 교육과 혁명 활동에 종사했으며, 유럽 유학을 다녀온 후 베이징대학 학장(총장)을 맡아 대학을 변모시켰다(1916~1926).

채원배, 중국 5·4운동의 아버지

  그는 교수를 모으는데, 실력을 위주로 하여 학력, 연령, 정치적 성향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때 진독수(陳獨秀, 천두슈), 호적(胡適, 후스), 이대교(李大釗, 리다자오), 노신(魯迅, 루쉰) 등 새로운 사상을 지닌 교수들이 베이징대학에 들어왔고, 베이징대학은 반봉건 계몽운동인 신문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리가 되어 재산이나 모으려던 학생들의 의식도 일신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구학(求學)을 제일로 내세웠다. 다만 학생들의 구국(救國) 활동은 용인했다. 1919년 학생들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분노하고 군벌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여 일어섰는데, 바로 5·4운동이다. 군벌정부가 “베이징 학생들의 행동은 베이징대학이 책임져야 하고, 베이징대학의 죄는 채원배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채원배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5·4운동의 아버지’였다.

  능력도 없이 지위를 바라고, 책임감도 없이 권력의 단맛에 취하기 쉬운 게 세태다.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국을 만든 실력과 공적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명성에 빠지지 않았던 범려의 지혜로움을 되새겨본다. 1919년 3월 우리 학생과 민초들은, 백성을 팽개친 왕국의 위정자를 대신하여, 민국의 주인으로 나서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온몸으로 선언했다. 같은 시기 새로운 중국사회의 모색과 건설을 위해 인재를 모으고 지식인의 사명을 다했던 채원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부지런히 송 교수를 따라 다녔던 중국인문기행. 저녁시간에는 동행들과 소흥주를 기울이다 화제는 자연스레 우리 역사로 옮겨가곤 했다. 바다를 건너 제주와 광주, 바로 위를 날아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필자는 생각했다. 역사에서 긴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다.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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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태희

· 다산연구소 소장

·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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