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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돌이 디딤돌 되는 변이생성의 힘

소한마리-화절령- 2016. 6. 7. 08:21
걸림돌이 디딤돌 되는 변이생성의 힘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연구실 한구석, 작은 냉장고 옆에 컵라면이 놓여있다. 제대로 밥 챙겨 먹기도 귀찮을 때, 불량식품 특유의 맛으로 출출함을 달래려 사놓은 간식이다. 학교 복도 구석에 놓인 커다란 휴지통에도 늘상 빈 컵라면 그릇이 보인다. 이렇게 일상을 구성해온 익숙한 소품인 컵라면이 이젠 다르게 보인다.

내몰린 청년과 잇따른 사건들

   지난 5월 28일, 지하철 슬라이드도어를 수리하던 한 청년이 사라지며 남긴 소품들. 드라이버 같은 작업도구 옆에 나란히 놓인 포장된 컵라면 이미지는 울컥하게 만드는 상징물로 마음에 꽂혀온다. “19세, 컵라면, 두 단어에 울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또 한 당신입니다.” “비정규직은 혼자 와서 죽었고, 정규직은 셋이 와서 포스트잇을 뗀다.”

  2인 1조라는 작업 안전규정은 안 지켜도 1시간 이내 사고현장 도착 규정은 지켜야만 하는 부조리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부조리로 점철된 아픈 일상에 공명하는 수천 장의 쪽지 몽타주 잔영이 눈에 밟히는데 또 다른 날벼락이 떨어진다.

  지난 6월 1일, 한 청년이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순간, 귀가중인 공무원과 마주쳐 세상 떠나는 동행자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청천벽력이란 것일까? 팍팍한 인생길 빨리 떠나기로 결심한 청년이 남긴 글에 “본심이 아닌 주위 시선에 신경 쓰여서 보는 공무원시험 외롭다”라는 내용을 언론에서 접하니 마음이 얼얼해진다. 단기간 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런 상황은 남양주 지하철 사고,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이어진다.

  빠르게 달라지는 인공지능 세상 재편 속에 사라지는 직업들, 그런 와중에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부조리한 취업난. 이런 난맥상 속에 해고 걱정 없이 정년을 채우는 공무원 시험에 청년들이 몰린다. 학교 게시판에도 여느 학생 자치활동보다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 광고물이 가득 차 있다.

  청년들이 생성해낸 신조어 ‘헬조선’과 더불어 ‘문송합니다’(문과생이라 취업이 안 돼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90%가 논다)의 뜻을 배우며, 인문계로 분류되는 영화전공인 나 같은 기성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수시로 자문하게 된다. 유교적 이슬람 같은 기성세대 심리를 칭하는 ‘유슬람’ 풍토, 하여 “나도 소싯적에 해봐서 아는데….”같은 장유유서적 어른 대접받는 풍토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뛰어내리려던 오베, 돕다보니 달라져

  그런 와중에 만난 〈오베라는 남자〉(A man called Ove, 2015, 하네스 홀름 감독)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각색영화로, 장년의 까칠남 오베를 통해 변이생성의 힘과 유머를 보여준다. 고지식한 오베는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아내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에 설상가상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철도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살아갈 의욕을 잃는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여기며 부러워하는 북유럽 복지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와 이해타산 팽배한 일상이 펼쳐진다. 이제 그는 자살 기도를 한다. 근엄한 보수주의자답게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장 차림으로 천정에 줄을 내려 인생을 끝내려는 순간, 누군가 들이닥쳐 방해한다. 철도에 뛰어내리려는 순간에도 하필이면 다른 청년이 먼저 뛰어내려 청년을 구해내야 할 반전이 벌어진다.

  아늑해 뵈는 공동 주택단지도 자기 멋대로 사는 이웃들 천지다. 차량 진입금지 규정을 어기며 주택단지로 진입하는 공무원도 알고 보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돈을 빼먹는 불한당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 이사 온 이슬람 여인은 자질구레한 일상의 도움을 요청한다. 냉정하게 물리쳐도 포기하지 않고 도움을 청하는 이웃의 성가심을 투덜대면서도 도와줄 수밖에 없는 고지식한 오베에게 슬슬 변화의 조짐이 피어난다.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오베가 난폭하게 쫓아도 찾아오는 길냥이와의 관계 개선도 큰 웃음을 준다.

  오베의 삶의 폭이 넓어지면서 부당한 시스템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공무원의 비리를 잡아내는 모습은 변이생성의 희망을 보여준다. 더러운 세상을 고쳐나가는데 한몫하며, 백인 장년 남성인 자신보다 약자인 이민 온 이웃을 돕는 모습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저항을 통해 변이생성 해낼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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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2005 동국대 명강의상〉수상

· 저서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