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 말이 성희롱이냐고. 어? 커피 좀 타오라는 것도 성추행이래요. 시집
못간 거 걱정해 주는 것도 성추행이래요. 이놈의 기 센 여자들 등쌀에 살 수가 없어! 야! 안영이... 니가 말해 봐. 그게 성희롱이야?
성추행이야? 왜 말을 못해?” “듣는 사람이 성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이라고 생각됩니다.”
센 여자, 드센 여자, 카리스마 위의 대사는 드라마 『미생』(tvN, 2014)의 제
5국의 한 장면이다(만화 『미생』의 회차는 ‘수’로, 드라마에서는 ‘국’으로 표시하고 있다. 인생을 바둑에
견준 원작의 의도를 반영한다.). 문제적 상사 마부장(배우 손종학)과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신입이자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는
안영이(배우 강소라) 사이에 오간 대화다. 탁월한 연기력 덕분에 극중의 마부장은 비난받아 마땅한 상사, 직위를 빌미로 난폭한 언행을 행사하는
무례한 중년 남성에 대한 ‘실감 나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시청자의 반감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
대화가 오간 현장에 다른 사원들이 없었더라도, 과연 안영이가 이처럼 정확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드라마 속의 안영이는
위축되고 주눅든 태도를 보였다. 만화 속의 안영이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배려 깊은 이해 속에서 탄생된 인물이라면, 드라마 속의 안영이는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실제 여성을 대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게 무례하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마부장의 화법과 논리 구조는 그다지
예외적이라거나 기상천외의 것이 아니다. 마부장의 ‘태도’나 ‘레토릭’은 우리가 현실에서 흔히 접했던 평범성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기 센
여자’라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흔해빠진 표현이 그 단적인 예다.
누군가에 대해 ‘기 센 여자’, 또는 ‘드센 여자’라고
말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이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마부장의 발언에서처럼 여기에는 ‘그 여자 때문에 못 살겠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 말하자면 ‘남편 잡아먹는 여자’ (판소리〈변강쇠가〉의 옹녀) 나, 동생을 이겨
먹는 누이(‘오누이 힘내기’ 설화에서 결국 내기에 진 동생은 죽기 때문에, ‘능력 있는 누이’=‘동생
잡아먹은 여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처럼 한국 사회에서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여성은 남성의 ‘적’으로 위치 지어진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기 센’, 또는 ‘드센’이라는 표현은 오직 ‘여성’과만 결합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실제로 성격이 강하거나, 주변 장악력이 큰 남자에게는 '기센 남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드센 남자’라는 말도
없다(국어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기 센’, ‘드센’이라는 표현은 오직 ‘여성’과만 ‘공기관계[*]’를
형성한다.). 둘 다 모두 ‘여자’에게만 사용된다. 비슷한 분위기나 자질, 성품, 성향의 남자에게는 ‘상남자’라든가, ‘카리스마
있는 남자’라는 ‘멋진 표현’을 사용해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호감을 표현하는 언어생활을 하고 있다(동시에,
남자라면 기가 세야 한다는 것이 ‘기본’으로 간주되는 문화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허약하고 기력 옅은 남자가 살기 힘든 사회이기도
하다.).
신기[신끼]와 통찰 이와 유사한 언어적 사례로 '신기[신끼]'가
있다. 누군가 타인의 내면을 간파하거나, 어떤 계획이나 전략에 숨겨진 의미를 판독했을 때, 어떤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거나 미래를 예견했을 때,
당사자의 성별에 따라 그 사람의 자질을 표현하는 언어가 달라진다. 남성일 경우, ‘통찰력 있다’거나 ‘예리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여성일
경우, 그 사람의 연령,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신기 있다’는 표현, 다시 말해 ‘미신’과 ‘야만’의 영역에서 흘러나왔다고 간주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능력인데도 성별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다(우리사회는 여성의 역량을 정당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훈련’이 현저히 결여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반증 사례를 많이 찾아주면 좋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여성 인식이 좋은 방향에서 개선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능력 있는 여성’이
『미생』의 안영이처럼 젊고 신입인 경우, 그 여성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언어문화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다(바꾸어 말하면 그런 언어문화가 존재하는 사회, 집단, 조직, 사람이야말로 ‘인격적 성숙’의 고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해도
좋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존중하는 인정구조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문화가 없기 때문에 언어가 없다. 바꾸어 말해, 언어가 존재한다면 문화 또한 존재할 수 있다.
여성 혐오를 넘어서, 여성 능력과 공생하기 최근 들어 여성을 타겟팅한 사건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사건에 대한 형사적 판결은 여성 혐오가 아니라 정신질환자의 범행으로 결론지어졌지만, 이를 둘러싼 세간의 의견은 분분하다. 분분한
여론을 정돈하거나 가다듬기에 앞서, 거기에 함축되거나 ‘투사되고 있는’ 현실적 관점과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석의 끝은
법적 선언이 아니라, 정당한 문화를 만들어 가려는 다양한 차원(일상적, 제도적, 법적)의 대안을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여성은 우리 사회의 약자도, 보조자도, 조력자나 원조자도 아닌 정당한 공생의 파트너이자 사회적 주체다.
여성의 능력에 대한 폄훼는 여성의 존재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된 관념에 뿌리내리고 있다. 여자는 ‘내조하는 존재’로 위치 지어지지만, 사실 관련된
문헌을 살펴보면 그런 여성은 현대적으로 조명해볼 때, ‘여성 리더’, 또는 ‘여성 멘토’에 근접한 경우가 많다(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중이다). ‘리더’나 ‘멘토’가 모두 외래어라는 것이 시사하는바 또한 크다.
요즘에 나는 여성의 능력 자체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한국어 표현을 찾아보려고 공부하고 있다. 여성 혐오를 넘어서려는 문화를
형성하려면, 학문적으로도 다양한 영역에서의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일상에서의 소소한 실천과 태도, 언어 표현 또한 중요하다. 하루하루
우리가 사용하는 말, 표정, 몸짓, 태도 등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오직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이 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혐오’의 감정에는 단순히 무엇이 ‘싫다’는 거부와 부정성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무시와 멸시의 감정이
매개되어 있다(‘혐오’의 감정이 ‘약자’에게 ‘겨냥’되어 표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
혐오’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것은 ‘혐오할 만한 여성’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혐오를 정당화하는 우월감과 그 이면의 열패감을 지닌 주체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든 간에, ‘혐오’는 이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적극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증오, 혐오,
분노의 이면에 가려진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바라보는 용기, 그것에 대한 부정당한 거부와 은닉, 부정적 인식을 넘어, 공생의 길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유력한 길이 되기 때문에.
* 공기관계(co-occurrence
relation): 앞에 어떤 요소가 나타나면 뒤의 요소가 이에 지배되어 선택됨으로써, 이들 요소가 항상 함께 나타나는 것을 서로 공기 또는
공기 관계에 있다고 한다. |